주치의로 허덕인 6월 서울

by 글쓰는 외과의사

본원의 외과 3년 수련 시스템에서 연차별 역할은 꽤 뚜렷하다. 1년 차는 병동 주치의, 2년 차는 중환자실 주치의, 3년 차는 수술방 전담. 중간중간 업무가 섞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1년 단위로 굵직한 역할들이 바뀐다.

3년 차가 되고 벌써 4개월 차. 오랜만에 병동 주치의를 맡았다. 간담췌 파트의 가장 senior 교수님 주치의였다. 덕분에 수술방에 있는 시간만큼이나 병동과 스테이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간 주로 수술방에만 있으면서 환자들과의 소통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수술방에선 마취가 되어있는 환자 대신 간혹 있는 보호자들과의 면담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 한 달은 2년 전 병동 주치의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한 달이었다.

주치의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들과의 대화는 더 오래 기억이 남기도 했었는데, 이번 710호의 노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담관암으로 2년 전 수술을 하셨던 할아버지셨다. 일상생활을 잘하던 와중 복통과 발열로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검사상으론 담관염이 의심되었고 담관에 튜브를 삽입한 후 퇴원 계획을 세웠다.

보호자이신 할머니는 상당히 교양 있으셨다. 차분하셨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이해를 곧잘 하셨다. 하지만 걱정과 불안 또한 상당하셨다. 병동에서 만나 뵐 때마다 질문 리스트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물어보셨다. 담관 튜브는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지, 수술 후에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앞으로 또 재발할 것인지 등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너무나 합당한 궁금증들이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답을 해드렸지만 질문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른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사실 솔직한 마음으론 710호 할머니를 마주치기가 무서웠다.

하루는 수술방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갇힌 날이었다. 수술 후 수북이 쌓여있는 노티 중 절반이 710호 할아버지 내용이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710호 꼭 방문해 달라고 몇 통의 노티를 보내셨다. 수술방을 마무리하고, 급한 일을 다 끝내니 6시였다. 어차피 당직인 날이어서 늦은 저녁쯤 710호를 방문했다.

그 교양 있으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화가 잔뜩 나 계셨다.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는 게 어딨냐고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셨다. 순간 기분이 확 상했다. 수술방과 밀린 드레싱, 병동 일로 하루 종일 틈이 없었다고 같이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 마디에 화난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저녁에는 주치의 선생님들 퇴근한다고 하시는데, 그전에 언제 오실지 몰라서 지금 화장실도 세 시간째 못 갔어요."

내가 무슨 권리로 일흔 살 할아버지, 할머니를 화장실 한 번 못 가시게 했을까? 단지 나의 몇 마디 대답을 듣기 위해, 나의 방문 시간을 놓칠까 봐 오후 내내 병실에서 기다린 것이다. 하루의 피곤함과 변명하고 싶은 의지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수술방에 있었다는 당당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많이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어서 화장실부터 다녀오시라고. 그리고 내가 가진 지식 안에서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해드렸다. 그래봤자 채 10분이 소요되지 않았다. 나는 바쁨을 핑계로 이 10분을 내지 못했고, 710호 노부부는 이 10분을 위해 오전부터 기다리신 것이다. 나의 우선순위와 환자의 우선순위는 정반대였다.

사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은 경우 자주 그 병실을 찾아간다. 그래서 매번 환자들에게 병원에서 의사를 잘 못 보면 지금 치료가 잘 되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자주 보는 게 더 안 좋은 거라고 설명을 해드린다. 하지만 환자 상태와 별개로 환자와 보호자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히 더 있었다. 의료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경과들이 환자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주치의에겐 환자의 조직 검사가 1-2주 걸리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환자에겐 1-2주가 너무나 길고 기다리기 힘겨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병동에선 사람을 통해 사고의 확장이 이뤄진다.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해하게 되고,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된다. 사실 병원의 일상이 되는 곳이란 블로그가 생기고, 브런치 북이 발간된 장소가 병동이었다. 다양한 환자들과 또 그만큼이나 다양한 보호자와의 스토리를 담았다. 환자들과의 에피소드에서 지식을 배웠고, 보호자들과의 에피소드에서 인생사를 배웠다.

책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사람을 통해서 느끼고 배우는 바는 더 깊이, 더 오래 기억되는 듯하다. 6월도 마무리, 내일은 이제 제주도 파견행 비행기를 한 번 :)

장마 초입 퇴근길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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