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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미남과 쿠알라룸프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by 져니박 Jyeoni Park

새벽에 쓰기엔 이번 글은 딱 이불 킥하기 좋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쉽사리 말하지 못했던, 영상이나 사진으로는 담아내지 못했던 여행기기에 적어보기로 했다.


여행을 갔다 와서 어디가 가장 좋았냐는 질문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

"짝지는 찾았어?"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도 신기할 따름이다. 6개월간 전 세계는 아니더라도 꽤 넓은 면적을 돌아다녔음에도 마음 맞는 사람 하나 찾질 못하다니!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몰라도, 여행 중 미묘한 감정들은 무수히 스쳐 지나갔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꼽으라면 쿠알라룸프르에서 만났던 크리스.

아직도 그날을 가끔 떠올려 보면 황홀하기도, 분하면서 짜증 나기도 한 기억이다.



나는 크리스를 숙소에서 처음 만났다. 현관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중에 그가 신발을 신으러 나왔는데,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금발의 전형적인 백인미남이었고 말투나 행동에서 젠틀함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그가 있었다. 공용공간 벽에는 일자로 앉아서 업무를 볼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는데, 화장실을 가려면 그 통로를 런웨이 하듯 걸어가야 했다. 나는 세수를 하러 그곳을 지나쳤다.

"Good Morning."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가 일을 하다 말고 내게 눈을 들어 인사했다. 정말이지 주책맞은 생각이지만 그 순간 무슨 영화배우가 내게 말을 걸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왜 이렇게 아는 체를 잘하는지 김칫국을 마실 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곧 그가 엄청난 사교성과 수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눈을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바로 이는 수다로 이어졌다. 밤에도 그가 공용공간에 출몰하기만 하면 서먹했던 공간이 한순간에 왁자지껄 해지기도 했다.

그런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생각했다. 그와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야지. 내 짧은 영어가 그의 수다를 받아주기엔 부담스러웠고 생각만 해도 피곤했으니까.





다음날, 하루 종일 관광을 하다가 돌아온 밤이었다. 나는 말끔히 씻고 손빨래한 속옷을 드라이로 말리려고 화장실로 나갔다. 그때 마침 크리스가 들어왔고 내게 어김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내게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름을 물었다.

"너 저번에도 내 이름 물어봤었어."

얼마나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붙이고 다니는 건지. 크리스는 기억이 안 난다는 듯 나의 대답에 조금 당황하는 듯싶더니 금세 아랑곳 하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그렇게 한두 마디 대답을 해주던 나는 결국 그의 옆에 앉아 꽤 긴 시간 동안 붙잡혀 있었다.


"배고파. 나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어."

한참 대화를 하던 그는 배달 어플을 열어 살폈다. 그때 시간이 자정을 넘겼을 때였고 당연히 대부분의 음식점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나는 그에게 나가서 근처 편의점이나 피자집에서 저녁을 사 먹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러자 그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대답했다.

"같이 가줄까?"

"응, 나 납치당할지도 모르니까."


얼떨결에 나는 그와 쿠알라룸프르의 새벽거리로 나왔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줄 알았던 그는 생각보다 입맛이 까다로웠다. 그는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원했고 나는 계획을 틀어 이전에 봐뒀던 케밥집으로 길을 안내했다.

번화가인 부킷빈땅 중심지에 가까워질수록 어두웠던 거리는 반짝이는 간판들로 환해졌고, 많은 사람들로 인해 초저녁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국 여자들은 이렇게 혼자 여행 잘 안 다니지 않나?"

크리스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한국인 여자가 장기간 혼자 여행을 다닌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운 듯 말했다.

나는 그가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것 같았고, 그의 고정관념 같은 것을 바꿔보고자 애썼다.

"아니야, 혼자 여행 다니는 한국인 여자 많아. 전에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I met a woman before, 사귀었다로 해석가능)..."

그러자 크리스가 나를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아차 싶어 말을 고쳐보려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그는 신난 표정으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 나 아주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새벽 한 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케밥집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린 마치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줄을 서 기다렸는데 크리스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 분명 아까 샤워했거든? 근데 이거 봐봐 머리가 다 젖었어."

그는 축 쳐져 곱실거리는 금발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나중에 듣고 보니 그가 왜 이렇게 더위를 먹었는지도 알법했다. 그는 아이슬란드에서 왔다. 거긴 기껏해야 여름에 25도 정도 오르는데, 그 정도만 올라도 워낙 추운 지방이라 많은 사람들이 열사병에 걸린단다. 그런 사람이 적어도 35도가 웃도는 나라에 왔으니 정신이 온전한 것조차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흥미로운 사실을 나누는 동안 우리 차례가 되어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곳의 내부는 꽤나 고급레스토랑의 모습이었다. 나는 슬리퍼에 잠옷차림 같은 끈나시 옷을 입고 머리는 부스스한 상태였다. 복장을 갖춘 웨이터는 우리를 식당 한가운데 테이블로 안내해 내 의자를 빼주었다. 나는 처음 부끄러움에 약간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크리스는 배가 고팠는지 케밥에 피스타치오 디저트까지 시켰다.

식사를 하며 우리는 각자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크리스는 모로코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고작 삼일을 머물렀단다. 어쩌다 알게 된 모로코 친구의 초대로 갔는데 별로 가이드도 받지 못하고 그나마 사막에서 낙타를 탄게 기억에 남는다나... 그러면서 내게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우."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속으론 탄성을 내질렀다. 사진은 마치 어느 화보에서나 볼법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새벽 두 시가 다되어서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번화가에서 조금 멀어지자 길은 어두워졌고 도로의 차들도 뜸해졌다.

"저기 봐 박쥐야!"

크리스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설마 이 큰 도시에 박쥐가 있겠냐며 못 믿는 눈치였다. 그래도 계속 박쥐를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그때 크리스의 뜨거운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저기 있잖아 저기."


그때 진짜 박쥐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날이 크리스와 같은 숙소를 쓰는 마지막 날이었다. 더 연장을 하고 싶어 매니저에게 물으니 오래전부터 예약한 그룹행사가 있어 방을 모두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 내일 묵을 숙소 찾았어?"

나는 케밥을 먹고 들어온 날 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물었다.

"무슨 숙소?"

크리스는 어리둥절 표정이었다.

"내일 여기 다 비워줘야 한대. 너한테는 말 안 해줬어?"

크리스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자신은 내일도 예약이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너 그거 인종차별 당한 걸지도 몰라."


다음날 아침도 어김없이 크리스는 공용공간에 나와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어제 네 말이 맞았어. 나 지금 숙소 찾아보는 중인데 너는 어디 묵을 거야?"

"더 베드 호텔."

"거기? 난 거기 별로야.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전혀 없잖아. 나는 좀 사교적인 공간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나는 속으로 어련하시겠냐며 방으로 들어와 떠날 채비를 했다. 그 후 다시 만난 크리스가 내게 말했다.


"나 그냥 너랑 같은 숙소 예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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