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슬란드 미남과 쿠알라룸프르(결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by 져니박 Jyeoni Park


내가 묵고 있던 숙소에는 어느 날 진귀한 장면이 펼쳐졌다.

단체 행사로 인해 그간 묵었던 손님들이 모두들 짐을 싸들고 나왔다.

공용공간에는 여행자들의 배낭이 수북했다.


"택시 타고 가자."

같은 숙소로 옮기기로 한 크리스와 나는 자연스럽게 체크인도 함께하기로 했다. 그 숙소 까지는 고작 걸어서 8분. 나는 당연히 걸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크리스는 당연히 걸어갈 수 없다고 했다. 저번 글에도 소개했듯 추운 지방에서 온 친구라 더위에 아주 취약했.

그는 걸어가다 죽을 수도 있다며 펄쩍 뛰었다. 그리고 자신은 뱀파이어라며 트와일라잇 로버트 패틴슨 사진을 얼굴옆에 갖다 댔다.

치명적인 척하는 모습이 재수 없긴 한데 썩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게 더 짜증 났다.


"어느 나라든 짚어봐 내가 다 맞출게."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크리스가 게임을 제안했다. 벽에 걸린 세계지도 그림을 내가 가리키고 멀리서 그가 나라이름과 수도를 맞추는 식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멀리 섰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아무 나라나 짚기 시작했는데, 정말 모든 나라를 맞췄다.

"너 대단하다! 이런 건 언제 공부한 거야?"

"뭐, 코로나 시기에 심심해서."

나의 칭찬에 크리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라를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직접 가보는 게 중요하다고."

그때 공용공간에 나와있던 흑인 여자가 짐을 정리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미국인으로 나와 며칠간 같은 방을 썼었다.

"나는 그동안 90개국을 가봤어."

누가 물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여자는 무심하게 자신의 자랑을 했다. 나는 그 당시 그녀의 경험에 순수히 놀랐고, 존경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100개국을 여행했어."

그런 그녀에게 크리스가 갑자기 허풍을 떨었다. 언제는 모로코, 멕시코, 그리고 서너 국가 정도 여행했다고 할 땐 언제고.

내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그는 암묵적인 신호와 같 윙크했다.


"미국인들은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부류야. 그래서 아까 내가 거짓말한 거야. 더 이상 자랑하지 못하도록. 유럽인들은 이래서 미국인들을 별로 안 좋아해."

택시가 거의 도착할 때라 건물 앞에 나가있을 때였다. 영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상황을 크리스는 번역기를 돌려 들려줬다. 속된 말로 전형적인 꼰대 남성의 말투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에 그 미국인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밝게 인사했고, 크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젠틀하게 대답했다.

"김정일은 항문이 없다지?"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듣는 거야?"

"다큐멘터리에서."

택시가 도착했고 우리는 짐을 실었다. 그 와중에도 크리스는 자신의 지식을 끊임없이 내게 쏟아냈고, 나는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이 못 미더웠다. 어떻게 보면 아까 미국인만큼이나 자신도 아는 척을 퍽 잘하지 않는가.




애매한 숙소 위치에 택시가 같은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았다.

간신히 도착해 올라간 숙소는 아주 쾌적하고 널찍했다. 화장실이며 샤워실까지 사우나 못지않았고, 거기다 수영장도 딸려 있었으며, 조식도 제공했다.


"나 여기 호텔 맘에 안 들어. 게스트 하우스처럼 한방에 여러 명 쓰게 하면서 호텔인척 하잖아."

우리는 4인실 도미토리에 같이 마주 보고 있는 2층 침대를 썼다.

크리스는 졸리비(필리핀으로부터 생겨난 패스트푸드가게, 동남아에서 유명하다)를 시켜 먹겠다고 했고, 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던 참이었다.

듣자 하니 그는 배달기사와 만나지 못해 결국 음식을 포기했고, 결국 에그타르트 두 개와 오렌지 요구르트를 사들고 들어왔다.

"에그타르트 맛이 쓰레기야. 이건 음식이 아니라고."

그는 신발을 고스란히 신고 자신의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먹다 만 에그타르트와 요구르트를 옆 수납장에 턱 올려놓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붙은 음식물 반입 금지 문구다.


"이따 무에타이 같이 갈 거야?"

불평을 마친 크리스가 낮잠을 자기 전 내게 물었다. 우연히도 나는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웠고 그는 이곳에서 무에타이를 배우러 다니던 중이었다.

"좋아."

우리는 낮잠을 한숨 자고 같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크리스는 체육관에 들어서자 익숙하게 운동준비를 했다. 나는 오랜만에 발차기할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훈련은 태국 치앙마이에 있을 때 보다도 느슨하고 어딘가 허술하긴 했지만 나름 운동할 맛이 났다.

그때 크리스는 다시 젠틀 모드에 들어갔고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엄지를 치켜들며 아는 척을 했다.

"혼자 갈 수 있지?"

혼자 긴 레깅스에 반팔을 입고는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 크리스가 내게 말했다. 그는 세 시간가량을 내리 운동했고, 반면 나는 한 타임이 끝나자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시원한 저녁이었다. 운동한 후 씻고 배를 두둑이 채운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이제 딱 침대에 누워 쉬기만 한 면 되겠다 싶은 시간이었다.

그때 어둑한 방안으로 크리스가 들어왔다.


"미안해. 늦었지."

이후로 내게 영어로 한참 늦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결론적으론 같이 무에타이를 하던 태국 여자 둘이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해서 끌려갔다는 말이었다.

"태국 음식은 내 입맛에 안 맞아. 면, 밥, 나 이런 거 싫어해. 그래서 밥을 별로 못 먹었어."

크리스는 또다시 불평불만이었다. 분명 그들 앞에서는 또 젠틀한 척 싫은 기색 하나 안 냈겠지.

"나 졸리비 좀 시켜주라."

음식 배달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한 그는 내게 주문을 부탁했다.

"고.. 고맙습니다."

크리스는 한참 무언가 골똘히 연구하더니 내게 한국어로 말을 했다. 순간 맹구 같은 음성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조금 있다 음식이 도착했고, 나갈 채비를 하느라 늦는 그 대신에 내가 먼저 뛰쳐나갔다.

"어.. 얼론?"

배달 기사는 아무도 없는 내 뒤를 기웃거리며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다. 햄버거부터 해서 치킨, 아이스크림 등등 족히 4인은 먹을 양을 그가 시켰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가방을 비워 온 그가 따라 나왔다.

"분명 저 기사 아저씨 나를 돼지라고 생각할 거야."

음식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으며 우리는 깔깔거렸다.

"또 침대에서 먹을 거야?"

"왜? 뭐가 문제 있나?"

너무도 당연히 음식을 들고 침대로 가는 크리스의 모습에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러나 크리스는 뭐가 잘 못 됐냐는 반응이었다. 결국 그는 커튼을 친 채로 늦은 밤 침대에서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체크 아웃 시간이 다 되어 부스스한 채 일어났다.

"다음 숙소는 조금 더 사교적인 곳이야?"

아침을 먹고 옷가지를 정리하던 내가 묻자 그는 개인실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그리고 비몽사몽 짐을 싸가지고 나가다가 돌아와 나와 작별의 포옹을 했다.

"한국가게 되면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곤 그는 떠났다.


그리고 내게 세 차례 문자가 왔었다.

하나는 자신의 좋은 숙소를 찍은 영상을, 하나는 외국인이 한국인 말투를 흉내 내는 영상을, 하나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숙소에서 못 봤냐는 문자였다.


나는 그 후 한동안 이상하고 은근히 짜증 나는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