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타이핑, 이포
타이핑역에 도착했을 때 소나기가 쏟아졌다. 나는 작은 매점에서 눅눅해 보이는 과자와 샌드위치를 집어 들어 계산대에 내밀었다.
"타이핑에는 무슨 일로 왔어?"
매점 주인은 내가 외국인 여행자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비행기 타려고요."
나의 대답에 매점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타이핑에 있는 경비행장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역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적거렸다. 출입구 너머로 보이는 세상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고 간간이 천둥이 일었다. 사람들은 종종거리며 빗속으로 뛰어들거나 역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그중 나이가 지긋이 든 어르신 한 분은 머리에 비닐봉지를 쓰고 점잖게 길을 나섰다. 과연 저 모자가 무슨 소용이 있으려나.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느지막이 부른 택시가 왔다는 알림이 떴다. 일단 숙소로 가는 거다. 그리고 내일은 경비행기를 타보러 가야지. 단지 타이핑에 온 이유는 그뿐이었다. 굵은 빗줄기는 어느새 잦아들어 택시가 한 낯선 집 앞에 멈추었을 땐 뚝 그쳐 있었다. 건너편 주택에선 철장 너머로 큰 개가 왕왕 짖고 나는 출입문을 찾지 못해 헤맸다. 결국 거칠게 문을 좀 두드려 본 후에야 한 남자가 나왔는데, 보아하니 여자친구와 거실에서 영화를 보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숙소의 호스트인 줄 알고 체크인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남자는 다소 귀찮은 눈치로 한 메시지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 후로 나는 한 시간가량 거실 소파 한쪽에 앉아 휴대폰으로 진짜 호스트와 결제 문제로 씨름을 했다. 그사이 연인 둘은 다시 영화에 집중했고, 한 가족이 능숙하게 무인체크인을 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결국 나는 짐을 싸들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외진 곳에 다른 숙소를 잡았다. 그때부터 아무것도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한참 진행되던 경비행기 예약도 현지은행 결제방식만 된다고 하여 포기해야 했다. 나는 투박한 시멘트 방에서 홀로 있었다. 누런 침대도, 슴슴이 올라오는 담배 냄새와 하수구 냄새도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또다시 고독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허기가 졌다. 나는 침체되어 가는 기분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관리가 되지 않아 여기저기 부서진 파편들이 나뒹구는 육교를 건너 상점가로 한참을 걸었다. 대부분 점포는 문을 닫았고 해가 야자수 너머로 발갛게 물들어 가던 중이었다. 나는 인적 드문 길에서 개를 만나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며 걸었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상점들에 잠시 안심해 가며 걷다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서 치킨덮밥을 하나 포장해 돌아왔다. 나는 독방에 들어앉아 좁은 책상에 음식을 풀었다. 그리고 치킨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러니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왔을 때, 말레이시아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온 친구 소피를 만났다. 나는 소피에게 말레이시아에 가볼 만한 도시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그녀는 이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포는 좀... 아무튼 좀... 뭔가... 직접 가 봐."
우기가 다가오고 있는 5월, 이포는 밤만 되면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다. 나는 비가 잦아들거나 그칠 때를 맞춰가며 끼니를 때우러 나갔다 들어오곤 했는데, 길거리가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이슬람 비중이 많아 그런지 밤늦도록 음악이 울려 퍼지는 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게들은 해가 저물기도 전에 문을 닫거나 아예 연 모습을 보지 못한 곳들도 있었다.
낮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레스토랑 앞에는 밤이 되면 노숙자들이 몸을 뉘일 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한 번은 노란 수박을 마트에서 사들고 들어가는 중이었는데, 피자가게 앞에 기대 서있던 남자가 나를 보고 허공에 키스를 날린 적도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소피의 말을 서서히 깨달아 가며 이포에서 지냈던 며칠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여행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점점 강렬해졌는데, 나는 그래서 한 동안 이곳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과연 단순히 지금 내가 있는 도시가 맘에 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간의 여정에 몸과 마음이 지친 것일까. 명확하게 결론 지을 수 없는 감정에 그냥 가만히 멈춰 서있었던 것 같다.
아마 이포에서 중국인 친구 제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의 기억은 타이핑만큼이나 지루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제시와 공원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세상에 대해 논하던 기억이 후에 자라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보트를 타고 동굴탐험을 했던 기억보다 훨씬 좋다. 숙소에서 와이파이 번호를 물어보다 알게 된 제시는 조용하고 한 편으로 왜소해 보이는 평범한 동양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그녀가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 또한 홀로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중 이란 여행기를 제일 흥미롭게 여겼던 것 같다. 아직 나는 엄두도 내보지 못한 중동국가. 거기서 매일 히잡을 쓰고 다니며 그녀가 보았던 세상은 어땠을까. 이곳에도 달랑 작은 백팩 하나만 매고 온 제시는 그렇게 덤덤히 나의 마음을 조금 일으켜 주고 이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