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푸껫
여행하면서 드는 참 이상한 심리가 있다. 육지에 오래 있으면 바다가 보고 싶고, 바다에 오래 있으면 육지로 나가고 싶은 그런 심리. 이 때문에 치앙마이에 있다가 푸껫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쪽에는 푸껫보다 좋은 곳들이 많을 텐데,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태국을 떠나기 전 대표적인 휴양지에 들르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참 호스텔 침대에 누워 푸껫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봤다. 처음엔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방콕을 경유해서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 들었다. 그간 아무리 버스를 오래 타봤다고 해도 좌석 버스에서 열 시간 이상을 가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결국 비행기표를 끊었다.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올 때 이후로 비행기를 타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치앙마이를 떠나던 날, 호스텔 매니저 레이디 보이 언니가 배웅을 나왔다. 고작 반개월 있었는데 그새 정이 들어 버린 건지 언니는 눈가가 촉촉해 있었다. 나도 택시에 오르는 길에 마치 고향을 떠나는 듯한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방콕을 경유해 푸껫 공항에서 나올 때 이미 도시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나는 으슥한 거리를 사십여분 가량 배낭을 메고 걸었다. 그리고 숙소 문을 열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그 안에는 건장한 서양 남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윗 옷을 벗고 다녔고 어딘가 자유분방함이 넘쳤다.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게 한편으론 속이 쪼그라들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대마초 냄새였다. 태국은 대마초 합법국가이다. 그래서 방콕에서부터 단풍잎 같은 마크가 달린 상점을 많이 보았고 그 냄새를 일반 담배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유명 관광지라서 더 그랬을까. 방콕 이후로 잘 맡아보지 못하던 그 냄새를 문 앞에서 피워대는 룸메이트 몇몇 때문에 다시 괴로운 순간들을 보냈다.
종종 공항 근처 해변에서 비행기가 낮게 날아들어오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어디를 가야 하나 찾아보던 중 푸껫공항 근처에도 그런 해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래사장을 걸어 들어가기를 한참, 정말로 모여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거대한 비행기가 날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신이 났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 말고는 공중에 떠있는 비행기를 그리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비행기는 십 분에서 십오 분 간격으로 날아들었다. 구름사이로 점과 같은 빛이 보이기 시작해서 그 형채는 점차 커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거대한 몸체가 내 위로 지나칠 때 느껴지는 짜릿한 기분이란!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순간을 자신의 모습과 함께 담기 위해 모래사장에서 고구분투 했다. 나도 그 속에서 나름 노하우를 키워가던 중이었다. 그중 혼자온 남자 한 명이 옆에서 노련하게 신발에 휴대폰을 끼워 사진을 찍었다. 이에 나도 그의 방법을 따라 했는데, 그로 인해 대화를 몇 마디 나눴다. 그 남자는 어느 사이트인지 비행기가 들어오는 현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고, 이를 나에게 공유해 주곤 훌쩍 떠났다. 그 후로도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여러 번 푸껫으로 들어오는 비행기에 손을 흔들었다.
스쿠버 다이빙까진 아니더라도 에메랄드 바닷속 산호와 니모를 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간 게 된 시밀란섬 호핑 투어였다.
처음 목적지 섬까지는 중형 보트로 한 시간을 가는데, 나는 그때 내가 뱃멀미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앞자리 백인 아주머니는 출렁이는 배안에서 책까지 읽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래서 차라리 잠이라도 자보려고 눈을 감았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 한분이 내 어깨를 두드려 깨웠다.
"멀미가 나면 눈을 감지 말고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봐."
용케도 내가 멀미를 하는 줄 안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먼바다를 가리켰다. 거칠게 흔들리는 배안의 모습과는 다르게 먼 바닷 물결은 햇살에 반짝이며 평안해 보였다.
한 시간가량 바다를 가르던 배가 중간에 멈추었다. 직원들은 스노클링 장비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나도 안내에 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게 내 생애 처음 스노클링이었다. 그래서인지 욕심을 좀 냈다. 방수가 되는 고프로가 있음에도 휴대폰을 굳이 방수팩에 넣어 들어갔다. 방수팩은 빡총 어느 마트에서 천원도 채 되지 않게 주고 산 싸구려 물건이었다. 나는 다 죽어 칙칙한 산호들이 보이는 물속을 헤집고 다니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 올린 방수팩 안에는 이미 물이 들어가 휴대폰에 앞착 된 모습이었다.
나는 급히 배를 향해 허우적거렸다. 구명조끼에 불안정한 부력 때문인지 헤엄쳐 배에 오르기까지 몇 번 더 휴대폰을 바닷물에 담갔다.
배 위에 오른 나는 급히 휴대폰을 분해해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조급 마음에 다시 조립해 전원을 여러 번 눌렀다.
한 동안 미동이 없던 휴대폰은 마지막 숨을 토하듯 진동을 울렸다. 그리고 열병을 앓듯 점점 뜨거워지더니 내내 지잉지잉 거리다 죽어버렸다.
그때 나는 왜 이리 다리가 달달 떨리고 심장이 두근 대던지. 마치 예상치도 못하게 여행이 끝나버린 기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코코넛 아이스크림!"
직원의 외침에 물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올라와 아이스크림을 받아갔다. '그래,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즐기자.'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 위기로 여행 전부를 불행하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혀끝에 닿아 사르르 녹아내렸다.
시밀란 섬 투어는 사실 실망스러웠다. 투어에서 알게 된 대만 아저씨가 태국 섬들을 많이 들어가 봤는데, 이곳은 꽝이라고 했다. 산호도 다 죽어있고 물고기도 별로 없다고 그 아저씨는 두 번째 스폿부터는 아예 물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어쨌든 나에겐 태국 바닷속을 보았고, 무사히 돌아온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휴대폰 문제로 앞길이 막막했다.
나는 혹시 몰라 가저온 구형폰으로 길을 찾아 간신히 푸껫 올드타운에 입성했다. 날씨는 맑았고 색색으로 칠해진 올드타운 거리는 관광지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며칠간 숙소 침대에 들어앉아 머리를 싸매고 휴대폰을 고칠 궁리만 했다.
처음엔 푸껫 삼성 서비스센터를 찾아가 보았다. 그리 오래된 모델이 아니니 금방 고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도 품었다. 그러나 내 차례가 되고 오분도 되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같은 삼성이어도 한국과 태국은 부품 자체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또다시 며칠을 보냈다. 그간 답답한 마음에 근처 공원으로 달리기를 나가고, 야시장 거리를 누비며 걱정스러움을 애써 달랬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쇼핑몰 지하에 수리점을 발견했고 곧장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 탔다. 이번에도 안 되면 새 휴대폰을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간 곳이었다.
다행히 수리점 사장님은 고쳐보겠다고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나는 쇼핑몰 푸드코트와 게임코너를 오가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을 때 휴대폰이 되살아나 있었다. 그러나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뒷부분은 뜯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터치가 매끄럽게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전화가 되고 홈버튼이 눌린다는 게 어딘가. 무엇보다도 그 순간 푸껫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ㄱ과 ㄹ이 잘 눌리지 않고, 때로는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이 휴대폰을 가지고 여행했다. 이것으로 사진을 찍고, 영상을 편집하고, 길을 찾아다녔다. 완벽한 조건의 여행이란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된다는 것을 그때 푸껫에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