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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태국의 탁발식 2

태국 캄팽팻

by 져니박 Jyeoni Park

태국은 불교국가이다. 그래서 태국의 남자들은 성인식을 치르듯 일정 나이가 되면 머리를 밀고 절에 들어간다.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이같은 사실에 다른 태국 친구한테도 문자를 보냈다. 친구도 이십 대 때 절에 갔다 왔다고 했다. 나는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원래 이렇게 탁발식이 성대하고 화려한 거야?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마 각 가정의 형편과 상황에 맞게 치러지는 듯했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참여하는 탁발식은 꽤나 큰 규모인 것은 사실인 듯했다.


시끌벅적한 마당에 다시 나가니 탁발식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주인공인 언니 조카는 제단 앞에 손을 합장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 조카 옆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 차례대로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냈다.

언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도 줄을 서라고 손짓했다. 내 차례는 금방 찾아왔고, 나는 앞에 사람이 하던 데로 가위를 받아 잠시 두 손 모아 예의를 갖췄다. 가까이서 보니 조카의 머리는 듬성듬성 쥐를 파먹은 듯 볼품없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은 머리카락을 찾아 잘라냈다. 줄은 더 이상 조카의 머리카락을 잘라낼 수 없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조카의 아버지를 비롯해 두 명의 남자가 함께 나머지 머리털을 면도기로 말끔히 밀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지는 의식이었다. 어른들은 민머리 조카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상의를 탈의하게 하고 꽃잎 물에 몸을 씻겨주었다. 나는 그중에 조카의 가슴팍에 새겨진 천사 날게 문신을 보았다. 나만의 선입견일 수 있지만, 아마 어떤 행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보았더라면 조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머리가 밀리고 절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카는 마음까지 새로워진 듯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제단에 섰다. 거기엔 가족들과 동네 어르신 몇 분이 둘러앉아 있었다. 조카는 그들 앞에 한 명씩 절을 했다. 덤덤히 이어지던 분위기가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에 이르러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이 눈물을 닦았다. 그때 나도 왜 눈물이 나려고 하던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서 가족 간의 애틋함을 느꼈던 것 같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순서가 끝나고 마당이 다시 밝아졌을 때였다. 집 앞에는 거대한 이동식 밴드 트럭이 때맞춰 들어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러한 광경은 우리나라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잔치와도 비슷했다. 나는 얼마간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친 한 할머니의 손짓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못 보던 처자가 그들 사이에 들어와 춤을 추고 있으니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나는 그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추기도 하고 특이한 전통 손동작을 따라 하기도 했다.


후회 없이 춤을 췄다고 생각했는데, 집안에서 쉬고 있는 나를 엄언니가 또다시 불러냈다. 듣기로는 조카가 절에 간다고 했다. 나와보니 어제 보았던 리본장식이 된 차 뒷칸에 조카와 그의 부모가 타 있었다. 조카는 흰색 의복과 면사포 같은 천을 머리에 올려놓고 합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새 신부 같았다.

조카를 태운 차를 뒤에 두고 나는 동네 사람들과 걸어서 출발했다. 앞에는 더운 날씨를 생각해 마실 것들을 실은 차량이 있었고, 마지막 대열엔 이동식 밴드 차량이 있었다. 동네 전체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또다시 춤을 추었다. 이제는 그냥 평범히 가려해도 아까 같이 춤을 추었던 동네 어르신들이 나를 춤을 추도록 부추겼다. 행렬은 동네를 지나 논밭길로 이어졌다. 나는 신이 나기도 했지만 뜨거운 햇볕에 녹아버릴 것 같아 괴롭기도 했다. 행렬 중반쯤에 이르러서는 더위에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춤을 추었다. 그렇게 간신히 절에 이르니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냥 지나쳐 나왔다. 알고 보니 동네 절에는 단지 인사를 가는 거였고, 조카가 진짜 들어갈 절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 또 춤을 추었다.


밤이 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마당에서 나는 엄언니와 저녁을 먹었다. 이쯤 되니 조카가 얼마나 절에 오래 들어가 있길래 이렇게 성대한 탁발식을 하는 걸까 궁금했다.

"도대체 조카가 얼마나 절에 들어가 있어요? 한 1년?"

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한 2주? 길어야 한 달."

나는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군대에 들어가는 개념과 비슷하다고 여긴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다음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스님분들을 잔뜩 태운 봉고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스님들이 조카의 집 안에 둘러앉았고 마당에는 전 날보다 조금 적은 수의 동네 분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불교 의식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경을 한 목소리로 외웠고 그 후엔 큰 스님이 마당으로 나와 성수를 뿌렸다. 한쪽 테이블에는 시주단지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어른들은 단지 안에 음식을 골고루 넣었다. 시주가 끝나자 스님들이 줄지어 시주단지를 매고 절로 돌아갔다.


점심을 지나서 나는 엄언니 가족 차에 올랐다. 보아하니 이번엔 진짜 조카가 절에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절은 차로 사십여 분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도 여느 태국 절처럼 다소 화려했다. 스님들이 몇 분 나와있었고, 그중에 담배를 피우고 팔에는 문신이 있는 분도 있었다. 여러모로 한국의 불교보다는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데, 또다시 이동식 밴드가 절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고요하던 사원이 시끌벅적한 파티의 장처럼 변했다. 차에서 내린 주인공을 앞세워 사람들은 한 사원 건물로 향했고 그곳을 여러 번 춤을 추며 돌았다. 그렇게 한 열 바퀴쯤 돌았을까. 알 수 없는 의식 끝에 조카가 절 내부로 이어진 계단 중간에 올라 종이꽃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단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줍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중에는 아까 절 한쪽에서 모여 기다리던 낯선 아이들 몇 명도 끼어있었는데, 그들은 우산까지 펼치고 종이꽃들을 잔뜩 받아냈다. 나도 네 개를 집었는데, 그중 두 개는 어떤 아저씨가 알 수 없는 말로 달라기에 순수히 내주었다. 그리고 조카가 절 내부에 들어가 스님이 되는 절차를 밟는 동안 밖에서 그것들을 만져보았다. 안에는 무언가 달그락 거리는 게 궁금해 열어보니 동전 두 개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까봤어?!!!"

나중에 집에 돌아와 언니에게 이를 말하자 언니는 화들짝 놀랐다. 그 동전이 들어있는 종이꽃은 그들에게 복주머니 같은 의미였다. 이는 복을 쌓듯 사람들은 꽃을 풀지 않고 주로 집에 모아둔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나머지 하나까지 이웃집 아이에게 주었다. 정말 이곳 사람들은 이를 소중히 여기는지 아이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캄팽펫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조카는 무사히 절에 들어갔고 사람들이 마당에서 천막부터 여러 소품까지 하나씩 철수해 나갔다. 마당은 다시 땡볕이 내리쬐는 평범한 땅이 되었고 나는 반나절을 더위에 찌들어 집안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되어 엄언니의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나도 그들 가족 중 일부가 된 듯 헤어짐의 아쉬움이 밀려왔다. 엄언니, 삼촌, 엄언니 친구 녹, 그리고 동네 아이 어깟까지. 어느덧 정이 들어버린 그들과 터미널에서 하나둘 작별했고 나는 그렇게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왔다.


이동식 밴드 차량과 대용량의 태국 전통 음료
머리를 미는 과정


현지화 되어가는 나
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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