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
동남아를 떠돌아다닌 지 5개월. 말레이시아 여행에 접어들었을 때 이미 여행에 대한 권태기가 온 것 같았다. 계획하기론 다음 나라는 인도였는데, 나는 말레이시아 인디아 타운에 퍼질러 있는 인분을 보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 도저히 저런 풍경은 견딜 수 없다는 걸.
나는 그때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몹시 지쳐 있었다. 매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늘은 어딜 가야 하나, 어디서 자야 하나 전전긍긍하는 일에도 신물이 났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집에 가고 싶어?"
그렇지만 늘 돌아오는 나의 대답은 'No'였다. 아직 목표한 6개월까지 한 달이 남았고 자금도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하는 망아지 마냥 다음 여정을 떠날 에너지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여행이라기보다 한 곳에 머물며 현지인 백수 같이 지냈다. 배고프면 먹고 답답하면 좀 걷고...
그러던 어느 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필리핀 어학연수를 가는 거야!"
이는 나에게 아주 좋은 묘안이었다. 삼시세끼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기다 영어도 배울 수 있다니. 그간 나는 여행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에 늘 아쉬움이 있었고, 한편으론 나라별 토론에서 조리 있게 반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 스스로에게 분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당장에 구글맵을 켜서 필리핀 어학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지 학원에 바로 문의하면 될 줄 알았건만, 한국 유학 사이트에 의뢰를 해야 하는지 알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당장 몇 주 안으로 등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유명한 학원들은 이미 예약이 꽉 차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생소한 이름의 학원에 자리가 하나 나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번갯불에 콩궈먹듯 등록을 마치고 필리핀 세부로 날아갔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하여 새벽에 세부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중에 마침 한국발 비행기가 들어와 한국인들이 우르르 줄을 섰다. 그러자 사방에서 익숙한 언어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한국에 온 것도 아닌데 벌써 고국에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나오니 직원이 팻말을 들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노란 봉고차를 타고 밤중에 기숙사로 인도되었다. 방에는 낯선 여자 둘이 각자의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었는데, 내 침대는 그들 가운데였다. 나는 조심히 짐을 풀고 대충 세수만 한채 침대도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나 홀로 있는 방에 강렬한 햇살이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나는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신입생 일정에 맞춰 내려갔다. 입학 설명회엔 여러 나라의 매니저와 학생들이 와있었는데, 일본, 대만, 몽골,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베트남 등 그 국적은 생각 보다 더 다양했다. 그중 한국인 학생은 나뿐인지라 태국 학생들 무리에 끼어 캠퍼스 투어를 다녔다. 마침 그때 나는 무에타이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에 그들과 어울리는데 조금 덕을 보았다.
오전일정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수영장 바로 옆 구내식당에는 수업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로 북적였고 여유로운 카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뷔페식에 신이 나서 음식을 마구 집어 담았다. 듣기론 다들 밥이 별로라는데, 떠돌이 었던 나에겐 감지덕지였다. 삼시세끼 밥 나오지, 당장에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저녁엔 헬스장에 갔다. 그간 무에타이 이후로 운동을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몸이 전보다 무거워졌다는 생각에 먼저 체중부터 재봤다. 그리고 충격을 먹었다. 처음엔 체중계가 고장 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몸무게는 출발 전 보다 무려 6킬로나 더 불어있었고, 살면서 처음 보는 숫자였다. 나는 서둘러 러닝머신에 올랐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의 매일 빠짐없이 헬스장을 찾았는데, 며칠 후 헬스장 앞엔 이러한 문구가 붙어 있었다.
'공사로 인해 2주간 문을 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