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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의 목적 - 개인의 정의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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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현 Feb 24. 2025

먼저 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지 정하고자 할 때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것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

삶의 목적은 스스로 의미를 찾고 부여해야 하는 것이기에, 개인마다 시작점도 종착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전에 법륜 스님이 ‘공(空)’ 사상에 대해 설명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스님은 누군가 시카고에 간다고 할 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에 질문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면 동쪽으로, 보스턴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쪽으로,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북쪽으로 가라고 해야 한다고 하셨다. 즉 질문자가 있는 위치에 따라 방향이 다 다르며, 가는 방향이 없는 것도,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도 아니지만 ‘시카고로 가는 절대적인 방향'은 특정하여 말할 수 없다고 하셨다.  

요점은 삶의 목적을 정할 때 자신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즉 "자신"이 누군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정의


필자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범위에서 정의해보려고 한다.

첫번째는 넓은 범위 - 물리적으로 바라본 개인

두번쨰는 좁은 범위 - 사회에서 1인의 역할을 하는 한 개체의 인간 


넓은 범위

먼저 넓은 범위의 인간부터 생각해보겠다. "개인"의 범위는 넓게 보았을 때 주변 환경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개념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개념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라는 사람은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 자신이 어딘가 남긴 글이나 작품 등 흔적을 남긴 곳 등...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크룩스처럼 자신의 흔적이 닿은 곳에는 전부 그 일부분이 투영된다고 볼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생각의 영향을 받은 범위도 어느 정도는 "나"라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럴 경우, 한 물체에 타인과 자신의 영향이 조금씩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개념적으로 보았을 때 "개인"이라는 것은 타인이나 주변에 귀속될 수 밖에 없다. 


또 역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국가, 회사, 학교 등의 조직은 여러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렇기에 그 단체의 개념이 "개인"의 일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하면 가장 일반적으로 자신의 출신지, 근무지 혹은 속한 학교, 또는 가족의 역할 등으로 얘기하지 않는가? 마치 트러플 버섯이 0.0000007% 만큼 들어있는 감자칩 이름에도 트러플 이름이 붙는 것처럼 누군가의 안에 한국인이란 역할이 미세하게라도 속하면 반대로 그 사람의 일부는 한국이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인 설정이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면 물리적으로 한번 얘기해보겠다. 사람이 보통 물리적으로 "자신"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의 범위라고 정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자신일까? 손톱 끝의 케라틴 단백질? 아니면 단백질 속 더 미세구조 속에서 오고가는 전자까지도 자신의 범위로 보아야 할까? 전자가 아니더라도 폐 속으로 드나드는 공기의 일부분도 자신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의 일부분을 잃고 동시에 얻는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한 사람의 팔을 잘라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전보다 덜 사람인 것인가? 아니면 잘라내진 팔 또한 하나의 사람인 것일까? 물론 그럴리가 없다. 팔이 잘리더라도 살아있고, 이전과 동일한 사고를 하고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지탱하는 신체 기관만이 그 사람으로 정의되어야 할까? 한 사람의 주요 장기만을 놓고 그 사람으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장기를 기증한다고 그 사람이 기증받은 사람의 일부분으로 기생하면서 살지 않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불의의 사고 없이 일반적인 상황을 보자. 신체의 세포 하나씩을 개별로 보았을 때, 각 세포들은 분열하고 새로 생성되고,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세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다면 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세포들이 그렇게 변경된 후에 그 사람은 이전과 다른 사람일까? 테세우스의 배 역설처럼 말이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확실히 개인을 정의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모호하다. 그래서 필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이란 범위는 넓게 보았을 때 환경과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개인이라는 정의 자체가 만들어진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사회에서 독립된 한 개인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한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좁은 범위"의 개인을 정의해보고자 한다.

 

좁은 범위 

물리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결국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각자 신체로써 느낄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미세 단위에서 인간이 하나의 개별 개체로 완벽하게 나뉘어질 수 없다고 해도 신체적으로 인지 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를 기반으로 좁은 범위에서 개인을 한정시킬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한 사람은 결국 한 사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사회구조에 맞춰서 정의될 수 있다. 한 예시로 원시 시대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을 비교해보자. 현대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1명으로 특정되기에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자신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원시 시대때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인류의 사회구조는 하나의 큰 공동체로 운영되었으며 다수의 남성이 한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그렇기에 신생아가 태어나면 그는 그 공동체의 아들이지, 특정인원의 아들로 속하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범주가 그 공동체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이후 사회가 변화하며 권력이 분할되고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강해지며 개인 하나하나의 정체성이 더욱 커졌다. 또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가족의 크기가 작아지고, 심지어 이제는 1인 가구의 수 조차 늘어나고 있는 요즘, 우리는 이에 맞춰서 한 개인의 개체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한 개인이 비대해진 요즘, 필자는 좁은 범위의 개인을  순간의 시점에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조금 더 넓은 정의로는 정신과 신체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까지도 포함시킬수도 있겠다. 인간은 정신적으로는 외부 자극이나 신체의 상태 등의 환경을 인식(입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반응(출력)을 하는 하나의 시스템인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출력값인 반응을 보고 스스로 이를 다시 인식하여 재입력시키기도 한다. 어떤 노래를 듣고 흥미를 느껴 자신이 그런 장르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반응에 대하 해석조차 하나의 입력 값으로 재입력하기에 사람은 루프적인 사고를 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라는 시스템은 매 순간 유동적으로 변화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는 설명을 편히 하기 위해 정신과 신체라고 말하였지만, 미세 단위로 보았을 때 정신이란 것은 신체 상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신체 내부에서 뉴런이나 장기들을 포함한 각종 구성체와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등의 화학적 구성상태에 따라 한 사람의 정신이 구성된다. 비인간적으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예시들이 많다. 어느 정도 논란은 있지만 사고로 쇠 파이프가 전두엽을 관통한 뒤 폭력적으로 성격이 뒤바뀐 피니어스 게이지의 경우나, 호르몬 부족이나 과다로 인한 기분 변화, 혹은 아산화 질소 흡입시 나오는 웃음 등등… 이런 사례들을 보았을 때 인간의 정신도 결국 복잡한 하나의 시스템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시스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속해서 변화하는 하나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수없이 많은 입력값을 넣으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며 유추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본능, 생각 방식, 신체 구조, 방어 기재 등을 포괄하여 이해하여야만 비로소 자신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더 넓은 범위에서는 환경과 개인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이 속해있는 집단의 환경, 그것이 단체든, 국가든, 세상이든 그 환경의 특성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개인이라는 대상이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삶의 목적 또한 매 순간 바뀌는게 아닌지 물을수도 있겠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애초에 절대적인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그 의미는 매 순간 변화의 기로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기에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프로 농구 선수가 평생 선수로서 살 수는 없지만 코치가 되듯이 우리도 조금씩 바뀌며 살아갈 뿐이다. 


아무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개인별로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가 다르고 만족법도 다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고, 장단점을 깨닫는 메타인지가 중요하다. 살다 보면 스스로 정의 내린 자신의 모습과 실제 자신은 늘 어느 정도 오차가 있다. 우리가 두려워 하던 일들도 막상 부딪혀보면 별거 아니였던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정의를 끊임없이 바꾸며 살아가야 한다. 삶의 저래적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것도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정해진 것은 없다. 자신이 그 기준을 세워야 하기에 누구보다 그 기준을 확고하게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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