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9일의 Grace에게
안녕,
나는 10년 뒤 너야.
그때의 너는 나를 자주 상상했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금방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막상 그 10년은 생각보다 멀고도 길었단다.
쥴리아야,
그 시절의 너는 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았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새로운 인연을 맺는 데도 능숙했어.
하지만 그만큼,
‘좋은 관계로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너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지.
‘이 말이 오해되진 않을까?’
‘내 의도가 잘 전달됐을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나?’
너는 사람을 좋아했기에,
한 인연이 틀어지는 일에 유난히 마음이 쓰였고
조금의 어긋남에도 오래도록 곱씹었지.
그 물음에 나는 지금,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어.
“아니야, 넌 잘하고 있었어.
다만 그때는 ‘관계의 거리’라는 지혜를 아직 몰랐던 것뿐이야.”
나는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지혜를 체득하기 시작했단다.
그전까지는 좋은 사람이라면 자주 만나고,
오래 연락하고, 깊이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지.
‘가까움’이 곧 ‘깊음’은 아니라는 걸.
그 어느 날,
오랜 친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달라진 나를 느꼈어.
예전 같았으면 애써 분위기를 맞추고
서로의 말에 계속 호응했을 텐데,
그날은 내 안의 작은 신호를 느꼈지.
‘지금 나는 이 말에 공감하고 있을까?’
‘내가 진심으로 이어가고 싶은 이 관계에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 질문의 끝에서 떠오른 말이 있었어.
칼 융의 공명의 법칙이었지.
“우리는 우리 무의식과 공명하는 사람을 만난다.”
무엇이든 쉽게 얽히지 말고,
울림이 있는 관계에 집중하라는 신호였던 것 같아.
그때부터 나는
무엇보다 ‘오해 없이, 조화롭게’ 이어질 수 있는 관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어.
말을 아끼기도 하고,
때로는 조심스레 선을 긋기도 하면서.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사람들과의 거리가 오히려 편안해졌어.
적당한 간격은
서로를 더 오래 바라보게 해주었고,
침묵은 그 자체로 좋은 언어가 되어주었지.
쥴리아야,
이건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이 아니라
‘너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이기도 해.
칼 융이 말했듯,
모든 만남과 사건은 우리 무의식의 반영이야.
그러니 지금 네가 조심스러워하는 그 마음도,
결코 나약함이 아니야.
그건,
더 건강하게 관계 맺고 싶은
너의 따뜻한 책임감이자
내면의 성숙이야.
그러니 오늘도,
조금은 망설이고,
조금은 돌아서더라도 괜찮아.
그건 분명,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싶은 네 마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흔들림이니까.
“넌 오늘도
그 울림 하나면, 이미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