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보다 먼저 닿는 건, 말이 아닌 마음이다.
3학년 4반
올해도 나는 18명의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봄을 맞았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응당해야할 모든 학습활동을 전면 거부하는 아이, 민호(가명)다.
처음부터 그랬다.
수업 시간에 책을 펼치지도 않고,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어요.”
“이건 네가 해볼래?”
“싫어요.”
똑같은 수업, 똑같은 교실. 그런데 민호는 늘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미술 시간에는 누구보다 먼저 색연필을 꺼내들었고, 체육 시간에는 눈빛이 반짝였다.
“이건 할래요!”
활동을 골라서 참여한다. 국어 시간에는 무기력한 눈동자, 체육 시간에는 승부욕이 활활 타오른다.
나는 처음엔 민호가 단순히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달랐다. 그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었다.
어느 날, 국어 시간.
“오늘은 역할극을 해볼게요. 주인공과 친구가 싸우고 화해하는 이야기예요. 자, 누가 주인공 해볼까요?”
한두 명의 손이 들리다 말고,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민호는 눈을 피하며 교탁 옆에서 자신의 필통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아이들 눈치를 살피다 슬쩍 물었다.
“민호야, 혹시 네가 주인공 해볼래?”
“싫어요. 왜 꼭 그런 걸 해야 해요?”
그 말은 날카로웠고, 교실 안의 공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다른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선생님한테 왜 저래?” “또 저러네.”
그때 나는 묘하게, 민호의 눈빛을 보았다.
말은 차갑고 고집스러웠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왜 자꾸 나를 끌어내려고 하세요. 나는 아직 준비 안 됐어요.’
며칠 후, 쉬는 시간에 민호가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보았다.
하얀 도화지 위에 무언가를 그리다 말고, 다시 지우고 또 그렸다.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그림이야?”
“몰라요. 그냥 그리고 있어요.”
민호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손놀림은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한참을 지켜보다가
오.. 엄지척!
그 순간, 민호가 살짝 웃었다.
그날 나는 민호와 한 장의 그림을 나눴고,그건 우리 사이 첫 번째 대화였다.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민호는 칭찬을 갈망하는 아이는 아니다.
민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었다.
그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민호는 정답을 들으면 오히려 더 멀어졌고, 설명이 길어질수록 눈빛은 어두워졌다.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면 오히려 교실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냥 옆에 있어 줄 때, 민호는 다시 돌아왔다.
그 후로 나는 민호에게 잘 묻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림을 함께 그리고, 책상 옆을 조용히 지켜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어떤 날은 가만히 그의 연필 끝을 따라가 보았고, 어떤 날은 그의 침묵 속 표정을 들으려 애썼다.
민호는 여전히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내가 쓴 판서에 조용히 손가락으로 밑줄을 긋고 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어느 날, 특별활동 시간.
자유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너희가 하고 싶은 걸 해도 좋아. 만들기, 발표, 그림… 뭐든 좋아.”
아이들은 여기저기 모둠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문득 민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만들기 해도 돼요?”
“그럼! 뭘 만들고 싶은데?”
“저기 있는 종이랑 고무줄로 자동차요. 이거 어제 집에서 해봤어요.”
그의 눈빛은 오랜만에 환했다.
작고 서툰 손으로 고무줄 자동차를 만들던 민호는,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 자신의 결과물을 들고 나왔다.
“이건 제가 만든 거예요. 뒤로 당기면 앞으로 가요.”
박수 소리가 났다.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치던 나를 보며, 민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땐,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정답보다 빛났다.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질문이어야 한다.
“왜 이 아이는 하지 않을까?”가 아니라,
“이 아이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라고 묻는 마음.
정답보다 먼저 닿는 건, 말이 아닌 마음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아이를 바르게 이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아이의 속도를 잊는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정답’이라는 말이 버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그 아이가 준비될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어른 한 명.
그 존재만으로도 아이는 다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
민호는 여전히 ‘골라먹는 학습자’다. 맛있는 것만 골라먹는,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아이가 언젠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지금은 다만, 자신이 준비될 때까지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일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민호의 옆자리를 비워둔다.
그 아이가 편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그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이해다.
“왜 안 해?”보다 “어떤 마음일까”라고 묻는 순간, 아이는 조금씩 열린다. 『오늘도 충분히 좋은 부모입니다』는 정답보다 마음을 먼저 보는 법을 알려줍니다. 서툰 부모, 느린 아이 모두에게 따뜻한 숨 고르기의 시간을 선물할 책입니다. 이책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두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