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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년 Grace로부터 온 편지 #14

2025년 6월 12일의 그레이스에게

by 두유진

To. 2025년 6월 12일의 그레이스에게

사랑하는그레이스

기억나니?
여기저기 화려하게 핀 장미꽃이 빛나던 그 여름날, 유난히 맑고 조용했던 6월 12일.
누군가에겐 그저 하루였을 테지만
너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버지와 함께한 생일’로 남았지.

몸이 많이 불편하신 것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어깨를 떨구시는 것도
사실 네 눈엔 다 보였을 거야.
하지만 아빠는 그날, 생일인 너보다 훨씬 더 들뜬 얼굴이었지.

“꼭 오늘 함께하고 싶었어.”
그 말을 남기시며,
냉장고를 여시며 파리바게트 케이크 상자를 보여주시는데 왜이리 먹먹한지.

손녀에게 전해주라고 하시며 미니케이크도 준비해주셨지.

소중한 보물단지를 모셔둔 보석함을 열듯이 열어서 보여주시는 아빠..


내 생일이라고, 불편하신 몸으로 케이크를 사오신 아빠, 축하해 주러 오셨는데도 내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엄마, 저 멀리 일산에서 분당까지 급하게 오시느라 고생하신 고모.


그날, 고모와 아빠, 엄마와 함께 나눈 특별한 25년 6월 12일의 생일은
내 삶에서 오래도록 선명히 남을 여름의 한 페이지였어.


아빠가 “꼭 생일 당일에 함께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가슴 깊이 애틋함이 번져왔었고.

한때 누구보다 건강하고, 강인하고, 무언가를 도와주는 걸 마다하지 않으셨던 나의 아버지.
지금은 발걸음도 자꾸 흔들리고 기억도 가끔은 가물가물하시지만
참 신기하게도,기억하고 싶은 인생의 장면들만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나시는 듯했지

지금까지 아빠가 겪어오신 인생의 굴곡과 그 속의 꿈,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대장정으로 이어지며 완성된 그 감동의 서사는,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어.


아빠는 어김없이 꺼내셨지. 늘 너의 생일이면 빠짐없이 하셨던 이야기.
마치 인생의 성공 신화처럼 들려주셨던 아들 딸의 태몽 이야기.

“난 아주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빠가 꾼 태몽 말이야.
해태 얼굴을 한 돌거북이가 물을 머금고 마을을 살리러 왔다고…
그래서 너는 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어.”

그 말을 할 때마다 아빠의 목소리는

소년처럼 들떠 있었고,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였지.


태몽 이야기를 할 때의 아빠는
지금보다도 훨씬 건강했던 시절로 돌아가 계신 듯
목소리엔 확신이,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어.


이제는 걷기도 흔들리는 발걸음과 기억도 가물가물하신데.

신기한건 기억하고싶은 인생의 장면들은 더 명확해지고 뚜렷하다고 하셨지.


생생하게 묘사하는 아버지의 해맑은 표정이 나를 웃게하고, 어쩌면 횡설수설이기도하고 확신의 찬 인생의 명장면을 계속 반복해도 아빠를 가장 사랑하는 엄마 고모 나는 정성껏 진심으로 들어주었지.


네가 믿음을 잃을 때마다 아빠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넌 특별한 아이야. 넌 반드시 사람들에게 따뜻한 빛이 될 거야.”
그렇게 널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지.


그레이스,
너는 그날을 단지 생일이라 부르지 않았어.
그건 ‘사랑이 모인 하루’였어.
아빠의 시간, 엄마의 진심, 고모의 온기,


아빠와 엄마는 크게 이룬 것도 없는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고

고모는 책을 출간한 조카를 보며 기특함에 따뜻한 말씀을 너무 많이 해주셨지.

그리고 다음 책에 대한 방향도 조심스레 알려주셨지. 꽤 솔깃한 제안이었지.


그리고 너의 깊은 마음이 한자리에 고요히 내려앉은 날.

이제 너는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친한 지인이 아빠 또래이신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신 다음날이라 아빠를 바라보는 내시선과 마음이 너무 달랐던 기억이 나.


언젠가, 아버지를 먼 길로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잊지 마.
그분은 이미 너의 생일 속에,
너의 추억 속에,
그리고 그 오래도록 반복해 들려주신
‘태몽’ 속에 살아계셔.

그 믿음은 여전히 너를 이끌고 있어.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그레이스

지금의 생을 잘 견디고 있는 너를
조용히, 깊이 응원해.


언제나 네 편인


From. 2035년 그레이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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