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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년 그레이스로부터 온 편지 #15

2025년 6월 20일그레이스에게

by 두유진

사랑하는 2025년 나에게,

문득 그런 날이 있어.
지금의 내(2035)가 너무 고마워서,
예전의 너(2025)에게 꼭 한 통의 편지를 전하고 싶은 날.

2025년 3월, 너는 ‘무지출 30일’이라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지.
그 실험은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소비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를 처음으로 분리해 보려는 몸짓이었어.


30대의 너는 성실했지만 동시에 무방비했지.

사회가 제안하는 행복의 틀에 너무 쉽게 기대곤 했잖아.
지나가다 문득 들어선 옷가게, 그날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ZARA에 종종 들르곤 했지.
커피향이 반가워 무심히 들어간 카페, 물론 카페의 여유가 나에게 큰 힘을 주곤 했지만, 커피값을 쉽게 생각했던 시절이었어.
어느새 SNS 속 누군가의 소확행이 내 것이어야 할 것 같았던, 그런 시대의 딸이었지.

도파민의 유혹이라는 게 그리 뇌 과학적인 단어일 줄 몰랐어.
그저 기분 전환, 일상의 작은 보상이라 믿으며 내 통장은 매일같이 말라갔고, 나는 그걸 감정의 순리쯤으로 여기며 살아냈지.

그 소비가 내 감정을 덜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된 순간들이 있었어.
누구에게도 말 못할 외로움과 허전함을 한 잔의 라떼, 한 권의 예쁜 노트, 올리브영의 유혹적인 화장품과 스낵들, 내 안색을 바로 맑게 해줄 것 같았던 건강보조제들..덜어내지 않고 계속 보태기로 쌓여가던 택배들.

배송 예정일로 채워가던 날들이 분명 있었지.

좋은 물건을 좋아하던 나는 기필코 사고싶은 명품은 무리해서라도 구입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리며, 40대의 나는 비로소 반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었어.
어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나는 왜 그렇게 ‘즉시적인 것’에만 반응하며 살았을까.

그때의 너는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니야.
그저 몰라도 되는 척, 고개를 돌려 외면했던 거야.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지.
‘이 소비는 정말 내 삶을 위한 것인가?’
‘이 충동은 어떤 감정의 그림자인가?’

그래서 너의 30일 무지출 플랜이 그저 절약의 의미를 넘어서
‘자각의 선언’으로 느껴졌을 때, 나만 느끼는 작은 울림, 파동이 있었어.


매일의 끝에 오늘 쓴 돈 0원을 적어내려가며 넌 나를 다시 데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낸 너는 비로소 ‘경제를 안다’는 말의 진짜 뜻을 알아갔지.
돈은 결국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시간과 감정을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었어.


그리고 기억나니?
무지출데이가 딱 30일이 되는 날,
늘 지나가던 금거래소 앞에 멈춰 섰지.
조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너는 처음으로 ‘은 100g’을 샀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부여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애.

그것은 금속이 아니라 절제의 상징, 네가 쌓아온 감정의 기록이었어.
세상은 돈을 쓰는 사람을 멋지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돈을 머물게 한 너’가 가장 우아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 2035년의 나는, 그때 네가 조금씩 모아두었던 은을 바라보며 뿌듯한 감정을 감추지 못해.

그 은은 지금,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한 삶을 사는 기반이 되었어. 그때부터 이어져온 내 생활태도가 말이야.
그 은 하나하나에 담긴 네 각성의 시간들이 이제는 내 삶의 무기가 되었고, 나는 더는 충동에도, 광고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


그래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그때 네가 멈춰줘서, 정말 고마워.”

무지출 30일.
그건 단지 지갑을 닫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손잡이를 다시 쥔 시간이었다고.
나는 네가 그 작은 걸음으로 결국 나를 구해냈다고 믿어.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은을 닦아 햇살 아래 반짝이게 만들며 생각해.

그레이스, 넌 참 멋진 사람이야.
나는 그걸 10년이 지난 지금도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어.


다정한 응원을 담아, 2035년의 그레이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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