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의 하루
한달 전, 딸의 어린이집 체육대회에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했다. 굳이 얼굴을 마주치고 싶진 않았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좋을 것 같았다. 이후에 전남편이 체육대회 전 잠깐 30분 정도 이야기 할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10분도 힘든데 30분이나!’ 즉문즉답과 가스라이팅에 강한 그와 30분이나 이야기를 하면 내가 밀릴 것 같았다. 병가 중인 것을 모를테니 퇴근 후 바로가면 시간이 그만큼 안될 것 같다고 말했다. 10분 정도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 10분도 나는 참 긴장됐다. 통제가 곧 안정인 J의 성향을 띄고 있어서 만나기 전에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몇 개 생각해봤다. 하나는 보이스피싱 관련 소식을 딸에게 들었을 때, 하나는 재혼 준비 중이다->양육비 관련 변경?, 다른 하나는 아이의 보험이나 주식 관련 이야기(일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음) 등을 할 까 싶었다. 뭐가 됐던 아이 관련된 논의는 법적으로 하자고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고, 보이스피싱 관련 이야기나 양육비를 저축보험쪽으로 넣으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침범이니까 경계를 세우면 될 일이다. 이렇게 마음 먹어도 언제나 그와의 대면은 긴장되고 어렵다.
왠걸 예상치 못하게 내가 15분이나 늦는 바람에 이야기는 커녕 후다닥 체육대회 장소로 가기 바빴다. 전남편 무릎에 앉은 딸을 보고 그쪽으로 갔다. 전남편의 중학교 동창이 교사로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거여서 이혼 전 서로 왕래가 있던 그들이었기에 마음이 아예 자유롭진 못했다. 하려던 이야기가 뭐냐고 물어보니 이따 이야기 하겠다고 미룬다. 비언어적으로 긴장되고 스스로가 가책을 느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느낌적으로 봐서 내가 대화에서 밀릴 것 같지도 않아서 안심하면서도 워낙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힘들었던 날들이 있어서 ‘사업하다가 부도났나? 그래서 양육비 못준다는 말인건가. 사업하다가 불법 저질렀나?’ 쪽으로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러다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장애물 건너뛰기 게임을 했다. 전혀 어렵지도 않고 몸을 쓰지도 않은 게임이었음에도 한두번의 점프에 무릎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어서 ‘나 아직 젊다고! 가벼운 뜀뛰기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속으로 나에게 외쳤다. 부부게임을 하는 시간에는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를 업고 달려가서 풍선을 터뜨리는 그런 게임이었는데, 하필 우리팀 한 분이 임신 중이셔서 업을 수가 없다고 나와 전남편에게 대신 참석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몸이 너무 아프다고 선을 긋는 건 내 몫이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 중에서 이혼한 것을 아는 선생님은 굳이 와서 권하지 않았는데 모르시는 선생님들이 와서 권할 때 거절하는 마음이 쉽지 않았다. 겉은 쿨한 척 했지만...
그러다 아이만 참석하는 게임을 할 때, 전남편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전보다 아이를 자주 보지 못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말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너는 만나는 사람 없냐, 아이가 무슨 삼촌 어쩌고 하던데 정말 없냐 부터 너도 어서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를 위해 아빠 역할을 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게 탈이다.) 원래도 이혼 전 별거 때부터 여자들과 연락하고 썸 탔던 것을 아는데 굳이 새삼스럽게 각 잡고 말할 필요가 있나, 아이는 이전부터도 자주 못봤는데 자랑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다가 대화하면서 그만큼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진심이고 재혼이나 아이 갖는 것도 고려 중인 것 같아서 양육비나 꼬박꼬박 주고 아이 어린이집 행사 있을 때라도 참석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본인이 새로운 자식이 생기더라도, 혹여 내가 누군가와 재혼하더라도 아이가 성인 될 때까지는 책임지고 양육비는 댈 것을 구두로 한번 더 약속 받았다. 전남편은 나랑 연애할 때도 그랬다. 본인이 나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할 때, 과거를 청산하고 새시작을 하려는 본인만의 다짐으로 과거 잘못했던 사람들(대부분 여자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다. 지금도 그런 행동의 일종 처럼 느껴졌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거다. 나보고 누구 만나는 사람 없냐고 할 때 없다고 하면서 내가 누굴 만나도 지금 너처럼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속으로는 ‘아이를 키우면서 누굴 만나는게 자유로운 홀몸이 된 너보다 쉽겠냐?’ 생각이 들어서 살짝 짜증이 났지만, 싸우려고 만난 자리가 아니니 겉으로 쿨한 척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주말까지 간간히 그때의 대화들을 생각했다. 이별을 해도 진짜 헤어짐이 아니고 상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때 또 한번의 이별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정말 서로 이제 남이 됐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이지만, 그만큼 사랑도 줬던 사람이기에 씁쓸하기도 했다. 늘 증오했던 전남편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로봇이 아니기에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더라도 과거 행복했던 찰나의 결혼생활이 생각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아빠, 남편이라는 존재가 가정을 안전하게 지켜줬던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어떤 마음 하나 무시할 수 없었다. 억누르고 싶지도 않았다. 내 삶의 일부였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휴,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런 가능성은 다분히 있지만, 나 자신에게 확신과 희망을 주기가 두렵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지금-여기’를 생각하며 오늘만 살아봐야겠다 생각도 든다. 마음이 정리가 안된다. 괜찮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