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배우고 싶어서
반에 기현이(가명)가 있다. 이 아이는 한부모 가정이고 아버님이 멀리 출퇴근을 하셔서 할머니랑 많은 시간을 보낸다. 주 양육자가 할머니인 셈이다.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 심리 검사를 했을 때, 기현이에게 엄마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만나지 않았구나를 추측하고 학부모 상담 때 할머님과 통화하며 슬쩍 물어봤다. "기현이가 엄마를 종종 보나요?" 할머님은 예상대로 안 본 지 오래되었다고 하셨다. 기현이는 분명 엄마의 존재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엄마랑 아빠는 왜 헤어졌는지,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지 어느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은 채 성인이 될 것이다. 기현이를 위해 할머님께 부탁을 드렸다. 기현이가 어렸을 때 일부러 엄마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이 마음속에만 담아두면 영영 한쪽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못한 채 무의식적 감정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말씀도 드렸다.
자연스럽게 생각은 딸에게 옮겨갔다. 그러는 나는 어떠나. 딸과 둘이 있으면서 전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낸 적이 있나? 나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그 사람을 내 입으로 말할 때면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딸도 가족을 그리면 늘 나와 딸 둘만 그린다. "아빠는 어딨 어~?" 물어보면 부끄러워하면서 "없어^-^"라고 대답한다. 아이를 위해 '전남편'과 '아이아빠'라는 개념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내가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면 아이는 아빠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아이아빠에 대해 투명하게 대화해야 할 곳이 다름 아닌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라는 존재가 아이에게 모호한 존재로 남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의도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00아, 00 이가 아빠 본 지 오래됐잖아. 아빠 보고 싶진 않아?"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한참 있다가 또다시 물어봤다. "00아, 엄마는 선생님이잖아. 그럼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 아이는 1초 만에 대답한다. "응! 아빠는 00(본인) 도와 주고 회사 다니는 사람이야!" "그렇구나~ 그럼 엄마랑 아빠랑 왜 헤어졌는지 알아?" 이어서 핵심질문을 해본다. 아이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응! 나 어렸을 때 아빠가 엄마를 버려서 헤어지게 됐어!" 맙소사. 아이는 전남편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아이는 지금 엄마인 나랑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을 확률이 큰데 자신도 버림받았다고 연결 지어 생각해서 훗날 아이의 연애와 결혼에 영향을 미치면 어떡하지? 아빠에 대한 미움이 있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한번 더 물어봤다. "아빠가 엄마를 버렸어? 엄마 아빠는 서로 바이바이 한 건데." 아이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덧붙여 말했다. "음... 아빠가 차에서 동전 있는 곳에 엄마를 버렸어. 그래서 나 슬펐어." 아이가 기억했던 부부싸움의 한 장면이 있었나 보다. 차 속에서 싸운 후에 내가 길가에 내렸던 적이 있다. 전남편이 나를 내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고 내가 스스로 내린 것인데 아이는 아빠가 엄마를 길에 내려줬고 그건 엄마를 버린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상황이 아이에게 강렬하게 인식돼서 그것 때문에 엄마 아빠가 헤어지게 된 거라고 연결 지어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랬구나 ㅠ 00 이가 엄청 슬펐겠다.. 그때 엄마가 내리고 싶어서 내린 거였거든. 엄마 아빠 싸웠을 때 많이 속상했지? 미안해."
이후에도 아이와 하루에 두어 번 씩 아이아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00아, 다른 친구들은 아빠랑 놀 때 있잖아. 그때 부럽거나 슬프지는 않아?" 아이는 "응! 나는 부럽지 않고 놀러 가서 기쁜데?"라고 말한다. 나는 집요하게 다시 물어본다. "근데 아빠는 힘이 세서 00 이를 번쩍 들 수도 있는데 엄마는 00이 어깨에 태워주지 못하잖아. 그럴 때 아빠 보고 싶진 않아?" "음.. 그렇긴 하지!" 아이가 순순히 동의한다. "00아, 어떤 가족은 아빠랑만 살기도 하고 00 이처럼 엄마랑만 살기도 한대!" "마쟈! 엄마 어떤 애는 고모랑 살기도 하지??" "응 그럼~ 우리는 다양해."
아이와 아이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거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 내 마음이 얼마큼 치유되어 가는지의 정도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아이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단 거니까. 아이를 위해 애써 꺼낸 대화들이 오히려 나의 선택을 당당하게 만들기도 하고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엄마는 이런 삶을 살고 있는데 지금 이대로도 참 좋고 행복해.'를 애써 말하지 않아도 아이에게 직간접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편하다. 내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 아이에게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