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너무 어렵다.
어떤 선택을 해도 그다음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깜깜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전에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매번 고민한다.
선생님을 해야 할까? 요리사를 해야 할까? 사업을 해야 할까? 의사를 해야 할까?
결혼을 선택해야 할까? 커리어를 더 키울까? 투자에 집중할까?
어떤 선택이든 완벽한 정답은 될 수 없기에 우리는 고민 끝에, 살면서 추구하게 된 가치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돈, 행복, 가족, 친구, 봉사 등을 가치 혹은 신념으로 갖고 선택을 하지만 사실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옳은 길인지 의문이 남아 있긴 하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내 선택이 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추구할만한 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적어도 어떤 상황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삶 속에서 유일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옛날부터 불변의 진리를 찾아 나선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항하기 위해, 아니 대항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유를 찾기 위해서 진리를 찾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는 당연히도 진리가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진리를 찾는 이들이 모두 직접 보거나 경험한 적도 없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보통은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실제로 발견되고 발견자의 증언을 토대로 그것을 찾는 일이 시작된다.
하지만 진리는 실제로 발견되지 않았고 복잡한 가정과 계산을 통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만 나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존재가 추측을 통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열과 성을 다해 진리를 좇고 있다.
그만큼 진리가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진리는 마치 우리가 애타게 찾던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우리 인생의 다양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줄 성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돌아봤을 때, 진리가 인간의 필요로 인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마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영원하고도 아주 큰 행복을 꿈꾸며 그것을 좇는 행보에 정당성과 자신감을 부여하는 것과 유사하다.
인간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존재를 상상하고 그것이 실존할 것이라 믿으며 불확실성을 감수한다.
진리 역시 우리가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거친 환경에 나가 생존을 위한 행동을 하도록 도와준다.
때문에 진리는 인간의 상상에 불과할 것이며 특히 생존을 향한 본능적인 마음이 그러한 상상을 유도했을 것이다.
진리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성보다 본능이 더 근본적인 역할을 했기에 이러한 상상은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또 그 영향력이 강력하다.
오히려 냉철한 계산으로만 진리를 꿈꿨다면 진리가 우리의 가장 큰 불안을 한 번에 해소해 줄 뻔하고도 꿈만 같은 모습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확인해 보고자 진리와 생존이 어떤 상관을 갖는지 추측해 보자.
인공적인 진리는 과연 실존하는 것일까?
꼭 플라톤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많은 이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상상해 낸다.
또 그들이 애타게 원하는 진리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비슷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진리를 특별한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단순히 플라톤의 철학이 논리적으로 너무 대단하거나 교육의 영향이 너무 강력해서 이런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배우거나 깨우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진리를 필요로 하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배우거나 깨우치지 않아도 우리 모두 공유하는 생존과 더 나은 삶을 향한 동기가 진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우선 진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존과 삶에 도움이 된다.
진리는 신념의 역할을 하면서 개인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
성공, 행복, 철학을 넘어서 결국에는 진리를 찾아 나선 우리의 행보를 돌아봤을 때, 결국 진리란 기존에 갖고 있던 신념을 더 의심하고 고민한 끝에 도달한 더 굳은 신념으로 볼 수 있다.
즉 더 굳건한 신념으로서 진리는 신념과 같이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에너지를 절약해 준다.
우선 진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생존과 번영을 향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앞선 우리가 진리를 상상하게 되는 과정에서 다뤘듯 진리는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불확실성을 이겨내고 더 좋은 선택을 하고자 만들어진다.
경험, 수집된 정보, 머릿속의 계산 등으로 만들어진 신념이나 진리는 나의 선택이 어떠한 미래로 이어질지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에 불확실성의 공포를 덜어준다.
신념이나 진리를 통한 선택이 결국 만족스러운 미래로 안내해 줄 것이라 믿으며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자신감을 찾는다.
불확실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자연환경에서 기꺼이 생존활동을 할 동기를 만들어 주기에 우리는 생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번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리의 존재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을 줄여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진리는 의사결정 과정을 단축시켜서 에너지 사용 효율을 올려준다.
뇌는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의사결정을 할 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감정이 보낸 긴급한 신호를 읽은 뇌 속 이성은 바로 행동하기보단 더 좋은 선택을 하고자 잠시 행동을 멈추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이 한두 번도 아닌데 이러한 결정 앞에서 매번 한참 동안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는 없다.
특히나 더 열악한 상황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적당히 고민하고 결정해 버리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에서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다 보면 새로움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먼저 행동한 다른 동물에게 생존 자원을 뺏길 수도 있다.
적당히 고민해 살아남은 조상님의 생존 비법을 물려받은 우리 역시 여전히 매번 적당히 고민하고자 한다.
빠르지만 적중률이 나쁘지 않은 의사결정을 하고자 살아가면서 직접 겪는 경험이나 다양한 지식들을 조합해 어떤 상황이 와도 적당히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나만의 만능 답을 만든다.
이글의 첫 부분에서 다뤘듯 이러한 만능 답이 곧 신념이나 삶의 목표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더 완전한 신념과 삶의 목표를 꿈꾸며 어떤 상황에서든 불변인 진리를 상상해내기도 한다.
많은 고민과 의심 끝에 접근한 진리이기에 그것을 따른다면 마음 편히 빠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고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심지어는 다양한 상황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진리의 존재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불안을 통제해 더 잘살고 싶은 인간의 바람에서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복잡한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진리를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개체로서는 나약한 사회적 동물에게 무리에서 낙오되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에 다양한 생존본능은 사회생활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사회적인 동물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생존 활동은 사회에 속하거나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거나 혹은 사회에 기여하고자 이뤄진다.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면 생존 가능성이 올라가며, 무리에서 더 특별한 존재가 되면 생존을 넘어 번영할 수 있다.
또한 내가 속한 무리 자체가 번영하면 나의 생존과 번영의 가능성은 더 올라간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것을 믿으면 같은 무리로 인정받을 수 있고 더 깊은 깨달음을 이뤄 조금 더 진리에 가까워진 특별한 소수는 존경받을 수 있다.
다수의 공통된 믿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진리는 더 큰 규모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기에 사회가 발전하는데 꼭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믿는다.
자발적으로 진리를 믿고 심지어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다른 이에게도 추천하며 믿음을 재생산한다.
정말 구성원이 진리를 믿는다고 사회가 발전할까?
우선 진리가 어떻게 사회의 규모를 키워나갔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2011)에 의하면 인간이 결국 지구를 뒤덮을 수 있던 이유는 다른 생물에 비해 협력하는 개체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하나의 사회로 묶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라고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머릿속의 내용을 언어와 행동으로 공유하는 것만으로 결속할 수 있다.
보통 무리 동물들은 하루 종일 서로의 털을 가꿔주는 등,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하며 같은 무리임을 확인하고 결속력을 다진다.
서로에게 긴 시간을 투자하며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상호작용할 대상의 수는 제한되고 무리의 크기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생 인류는 같은 신을 믿는 것과 같이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서로를 믿고 무리를 형성했다.
신뢰 형성의 과정이 더 간결하기에 다른 동물에 비해서 더 큰 무리를 이루고 큰 규모를 통한 더 강력한 협동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믿음은 실존하는 대상을 향한 믿음이 아닌 인간이 상상해 낸 신, 법, 사회, 진리 등의 개념에 대한 믿음이었기에 믿음의 대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상상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믿음을 형성할 수 있었다.
때문에 더욱 큰 규모의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더 큰 규모의 사회, 내가 가는 곳마다 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그야말로 생존에 이상적인 아주 안전한 환경이다.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큰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요구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생기고 퍼졌을 것이다.
진리 역시 그중 하나로서 사회의 규모를 키우는 역할을 했다.
또한 같은 것을 믿고 따르는 사회는 안정적이다.
즉 내부에서 갈등이 적다.
특히나 사회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진리는 다른 추상적인 개념들에 비해서 더 극적인 역할을 했다.
여러 가지 가치관 중에서 으뜸인 진리가 없는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나름대로 자신의 신념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매번 답이 없는 대결을 하고 사회는 그 추종자들의 싸움으로 협력이 아닌 분열을 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오히려 사회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현대 민주주의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모두 존중되고 또 다양성이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바탕이 되는 공통된 믿음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
현대 사회도 절대적인 기준에 대한 부정과 개개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공통적인 믿음 기반이 있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갈등이 타협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의 생명과 신념의 무게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고 믿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리는 이러한 당연한 믿음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갈등이 타협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수많은 공통 믿음이 하나도 없던 그 과거 시절을 상상해 보자.
이전에도 다뤘지만 그 과거 그리스 시절에 진리의 존재는 혁명이었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 사회는 도시 수준에서 국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과거 그리스에서 플라톤과 그의 철학이 하나의 공통 기준이 되는 과정을 다시 살펴보자.
과거 그리스에는 선생님 혹은 현자를 소피스트라고 불렀고 이들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가르침을 펼쳐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그런 현자들의 다양한 주장은 모두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기에 각각이 사회의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사회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분열이 되었고 그들이 모인 의회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일관성 있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진리가 상대적이기에 정해진 게 없다는 소피스트들의 다양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사회에 혼란을 만들었다.
이에 맞서 하나의 완벽한 진리가 있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개념이 나왔다.
자연에서 완벽한 원을 관측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 세상 속 물질의 근본이 되는 완전한 개념을 우리 모두가 분명 인식할 수 있음을 근거로 모두가 인정할 완벽한 무언가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완벽하고 순수한 개념, 오직 하나의 진리라는 길을 제시했다.
플라톤의 철학과 가르침은 수많은 지식인들과 또 기독교에 전해져서 근대까지 서양의 다양한 제국과 나라가 발전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활용해 천국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기독교는 중세까지 자신들의 진리를 기준으로 사회 모양을 만들고 안정적으로 운용했다.
많은 유럽인이 상상 속의 완벽한 세계인 천국과 그 정반대인 지옥을 믿으며 하나로 뭉치곤 했다.
즉 진리가 도시 국가를 넘어 더 안정적이고 큰 사회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듯 사회가 발전하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데 진리가 큰 기여를 한다.
사회적 동물은 더 크고 안정적인 사회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고자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가장 알맞을 방법으로 해소시켜 줄 것이기에 우리는 진리를 경험한 적도 없으면서 그것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진리의 완벽함과 인간의 비합리성, 그리고 진리가 주는 이점 등을 근거로 의심해 보면 진리는 우리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진리가 생존에 있어서 다양한 도움을 주기에 이성 밖에 생존 본능이 우리를 진리로 유도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보았다.
우리는 불안을 해소하고 에너지를 절약해서 생존 가능성을 올리고자 어떤 상황에서든 잘 통하는 답인 신념을 만들어냈다.
이미 같은 무리의 이들과 신념을 공유했지만 기왕이면 더 안정적이고 큰 무리를 만들어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자 공통 신념을 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한 현자가 절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강력한 신념을 만들고 진리로 정의했다.
이제 진리는 문화나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체계적으로 이어지고 많은 이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개인과 사회, 모두의 입장에서 강렬히 필요했기에 그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서 만든 진리라는 우상이 실존한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정말 진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필요로 인해 태어난 무언가라고 해도 그것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양치기 소년이 머리에서 만들어낸 늑대가 정말 실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 과정이 완전하다면 진리 그 자체가 완전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찾을 수 있을까?
인공적인 진리라도 정말 실존할 수 있을까?
유발하라리. (2015).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김영사
한국 정발 기준. 이스라엘 정발 기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