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진리는 이성적인 활동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겨져 왔다.
혹은 경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고도 여겨졌는데 어쨌든 경험하고 사유하거나 그저 머릿속에서 사유하거나 모두 사유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왜 철학에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과거부터 생각이란 특별하게 여겨졌다.
완전한 무언가를 해내기 어려운 육체에 비해서 생각은 다양한 것들을 너무 쉽게 해낸다.
생각을 통해 직접 본 적도 없는 개념이란 것을 인식할 수 있고 각양각색의 인간이 그 개념만은 어느 정도 동일한 형태로 공유한다.
예를 들어 개개인이 그리는 원은 절대로 완벽한 구체가 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두 완벽한 구체의 개념을 알고 상상할 수 있다.
모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형태의 완전한 무언가를 생각해 낼 수 있다는 통찰은 사물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근원인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가장 순수한 본질이란 것이 존재하고 각종 상황과 주관에 의해서 그 본질이 영향을 받아 현실의 다양성이 생겨난다.
또 본질과 유사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실인 진리라는 것도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도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생각을 통해 본질에 가까운 개념이란 것을 인지할 수 있기에 개념을 사유하는 방법에서 불순물을 더 제거하면 진리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본질과 진리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우리 삶은 완전히 변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고정 값, 그것만 찾아낸다면 불확실함이라는 무기로 끝나지 않는 두려움을 주던 미래는 오히려 정복하고 통제할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시작해 그 영향을 받은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이라는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철학자들이 주장한 어려운 사유 방법 하나하나 살펴보기보다는 애초에 정신세계에서 이뤄지는 활동이, 즉 이성적인 사유가 정말 완전하거나 순수해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 앞선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의 완전무결함을 의심해 보자.
생각이 결국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과 같이 우리가 “의지”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서 온다.
이 글에서는 “의지”라고 부르겠다.
모든 내적 정신 활동과 외부 자극을 의식하는 주체인 “의지”는 우리의 몸과 생각을 조종하는 특별한 무언가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완전한 존재기에 자유의지라고도 불린다.)
‘의지’는 내가 나임을 알고, 나의 신체를 의식하며, 기억을 활용하며, 의식할 수 있는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과거부터 “의지”를 “영혼”이라고도 하며 그것이 육체와 분명 다른 점이 있기에 물질계가 아닌 본질에 더 가까운 세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이 '의지'는 본질과 진리를 향한 불순물 제거 과정을 수행하기에 충분할까?
순수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지가 생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외부 불순물에 휘둘려서 생각이 흔들린다면 진리를 향한 과정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우리 의지는 정말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을까?
슬프게도 근현대 심리학, 아니면 우리가 가끔 하는 바보 같은 실수만 돌아봐도 우리의 의지는 능력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대표적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통찰만 살펴봐도 본능에 끌려다니며 그를 진정시키는 역할만 하는 의지가 정말 우리 몸과 마음의 지배자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의 이론처럼 가끔 우리는 직관과 감정으로 행동을 시작하고 뒤늦게 이성적인 판단을 더 한다.
의지의 허점을 알아갈수록 의지가 진리를 향한 불순물 제거 과정을 잘 수행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넘어 애초에 의지가 추측해 낸 진리라는 존재 자체가 그럴듯한 상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프로이트의 직관을 실험으로 설계해 의지의 허점을 더 깊게 연구할 수 있다.
심지어 몇몇 연구는 프로이트의 주장보다 더욱 의지의 입지를 좁게 만든다.
리벳의 1980년도 연구는 우리의 의지가 우리 몸과 생각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의도하고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즉 순서로 치자면
1. ‘의지’를 통해 의식적으로 행동을 결정한다.
2. ‘의지’의 결심을 수행하기 위해 ‘뇌’가 활성화된다.
3. ‘뇌’의 신호를 통해 우리의 ‘몸’이 움직인다.
의지도 물론 뇌 안의 어딘가 있겠지만 어쨌든 ‘의지->뇌(행동이나 시각을 관장하는 부위)->행동’ 이런 행동 원리가 있다고 믿었다.
리벳은 정말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뇌의 활성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0. 실험 중에는 뇌가 활성화되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뇌전도가 측정되었다.
1. 돌아가는 시계를 본다.
2. 버튼을 누를 의지가 생기는 순간의 시간을 기억한다.
3. 버튼을 누른다.
4. 버튼을 누를 의지가 생겼던 순간(그 순간 시계가 가리키던 숫자를)을 실험자에게 보고한다.
이 실험을 통해 뇌가 활성화되는 순간, 버튼을 누를 의지가 생기는 순간, 실제 누르는 순간까지 세 가지 시간이 측정되었다.
실험 결과, 의지가 행동을 앞선다는 우리의 통념은 증명되었다.
하지만 의지를 통해 뇌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순서는 반대였다.
1. ‘뇌’가 활성화되며 신호를 전달한다.
2. ‘의지’가 그 신호를 눈치챈다. (하지만 의지는 이 신호가 자신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착각한다.)
3. ‘몸’이 움직인다.
순서는 뇌 -> 의지 -> 행동 순서였다. (뇌 활성화 -> 누르고자 의지 생김 -> 실제 누름)
의지가 생각하기 전부터 뇌는 활성화되었다.
즉 버튼을 누르고자 하는 신호의 시작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리는 의식할 수 없는 뇌 속 의사결정 네트워크였다.
뇌가 먼저 누르자는 판단을 하고 그 신호를 의지에게 전달한 것임에도 우리는 의지가 우리 뇌와 신체를 통제하는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후속 연구는 뇌, 의지, 신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후 이어진 여러 후속연구에서는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 신호를 보낼 때 '뇌->의지->운동신경->행동'과 같은 순서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의지를 담당하는 영역과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에 각각 따로 동시에 신호를 보낸다고 보고한다 (Frith, C. 2005).
즉 의지는 몸을 움직일 거라는 신호의 복사본을 받긴 하지만 다시 그 신호를 직접 몸에 전달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 또한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라는 신호는 중간에 의지를 거치지 않고 뇌에서 해당 신체 신경에 직접 전달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즉 우리 의지는 자신이 몸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의지는 우리 몸의 지배자가 아니다.
먼저 뇌에서 신호가 나오고 나서야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또 행동한다.
사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뇌의 신호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보다 모두 앞선다.
우리가 느끼는 우리가 몸을 조정했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며 가짜이자 착각이다.
실제로는 생각과 몸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했다고 착각하고 주장하는 ‘의지’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내 신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착각을 하고 있는 의지가 과연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출처 : Anil K. Seth (2018, Consciousness: The last 50 years (and the next))
의지는 어떻게 자신이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일까?
의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에 담긴 진실과 의도를 알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설명하고자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만을 활용해 나름대로의 추론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만든 추론을 굳게 믿는다.
예를 들어 실제로 뇌와 신경에서 생기는 일은 모르는 체, 의지에게 갑자기 운동 명령의 복사본에 대한 희미한 느낌과 그 명령과 일치하는 시각, 촉각 정보가 주어진다.
의지는 이러한 정보를 엉성하게 조합해 자신이 운동은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기상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이 전혀 없던 시절, 자신이 열심히 한 기도를 떠올리며 그 때문에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조상을 보면 이러한 착각은 아주 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은 많은 경우, 실제로 벌어진 일과는 전혀 다르다.
이제 우리는 의지가 인지할 수 없는 물과 공기의 이동이 기상 현상의 원인인 것을 알기에 기도나 의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했기에 만들어낸 의지의 전능함과 그 전능함을 통한 진리의 도달가능성을 부정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뇌 손상을 가진 환자에게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접근 가능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정보에도 접근 못하는 환자로부터 의지가 가진 추론 능력의 한계를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심리학자 Ramachandran은 신체 왼쪽의 마비를 겼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남겼다(1995. 1996).
해당 연구에 의하면 환자들 혹은 그들의 의지는 분명 왼쪽 신체를 조종할 수 없었으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면 해당 환자들에게 양손을 사용해야 하지만 성공 보상이 더 많은 작업과 한 손을 사용하지만 성공 보상이 더 적은 작업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청했는데, 환자들은 반복되는 요청 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양손 작업을 선택했다.
환자들은 양손을 사용하는 작업에서의 실패로부터 기분 나쁜 좌절을 경험하지도 않고 실패를 통해 다음에는 양손 작업을 선택하면 안 된다는 학습을 하지도 않았다.
실험에서는 반복적으로 환자들에게 마비된 왼손의 사용을 직접적으로 요구해 봤는데, 보통 그들은 왼손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사용할 마음이 없다고 답했다.
그들 중 일부와는 면담을 하며 왼손 사용을 끈질기게 요구했는데, 한 번은 피험자가 그 끈질긴 요구 끝에 왼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자신의 아들의 손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처럼 연구에서 나오는 환자들의 의지는 자신의 마비와 관련된 신체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망상을 보는 것도,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연구자가 분명 요구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마비에 관한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접근 가능한 정보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설명한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설명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처럼 의지는 자신이 접근 가능한 감각 정보, 느낌, 기억 등을 설명하고자 다시 자신이 접근 가능한 정보만을 활용한다.
그들이 의식할 수 없는 마비와 같이, 의지가 접근할 수 없다면 실제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라고 해도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의지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자신이 직접 만든 상상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사실 이는 환자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 역시 자신의 신체 내부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의지는 접근 가능한 기억만을 활용해 섣부른 진단을 한다.
심각한 문제를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르는 복통을 겪으면서 그저 배탈이라고 여기거나 뇌의 손상에 대한 신호가 될 수 있는 우울함이나 무기력함을 일시적인 기분 변화라고 여긴다.
자신의 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도 모르고 반쪽짜리 추론을 맹신하는 의지가 정말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 상상과 달리 의지는 뇌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로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저 뇌가 활성화되고 나중에 의지에게 다양한 정보가 전달된다.
의지는 자신이 받은 정보를 조합해 실제로는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닌 생각, 행동에 대한 명령이 자신의 통제 하에 내려졌다는 추론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이러한 의지는 통제 그리고 추론과 관계가 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지가 원하는 통제와 통제를 정당화하고자 만든 추론은 실제와는 다른, 엉성한 상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지가 순수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의지는 늘 뇌가 주는 정보에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또 그의 추론 방식은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주어지는 정보에 대해 완전한 결정권이 없기에 정보가 편향적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있고 한계 있는 추론 방식 때문에 순수함을 향한 끝없는 비판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진리도 의지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핑계가 아닐까?
평소처럼, 뇌가 주는 불안이라는 신호를 의지가 잘못해석하고 또 여기에 자신이 몸과 마음 그리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지의 근거 없는 믿음이 더해져 진리라는 그럴듯한 허상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특정 의도를 갖고 생각과 행동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 안의 영혼을 의지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라고 불러온 것은 의도를 갖고 생각과 행동을 온전히 통제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때문에 영혼 혹은 의지는 그 의미를 알맞게 축소시키고자 차라리 단순히 생각과 경험이 인지되는 공간인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거짓된 믿음을 주는 의식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애초에 왜 우리는 의식을 통해 현상을 인지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그저 뇌의 행동과 핑계에 끌려다니는 부산물에 가까울까?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의지가 사실 의식 밖의 영역의 다양한 의사결정과 그것을 향한 의식의 착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뤄볼 것이다.
참조
Anil K. Seth (2018, Consciousness: The last 50 years (and the next))
Frith, C. (2005). The self in action: Lessons from delusions of control. Consciousness and cognition, 14(4), 752-770.
Gazzaniga, M. S. (2005). Forty-five years of split-brain research and still going strong. Nature Reviews Neuroscience, 6(8), 653-659. ISO 690
Libet, B. / 1983 / Time of conscious intention to act in relation to onset of cerebral activity (readiness-potential). The unconscious initiation of a freely voluntary act / Brain 106 : 623~642
Ramachandran, V. S. (1995). Anosognosia in parietal lobe syndrome. Consciousness and cognition, 4(1), 22-51.
Ramachandran VS, Rogers-Ramachandran D.(1996). Denial of disabilities in anosognosia. Nature. 382(6591):501. doi: 10.1038/382501 a0. PMID: 870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