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민 Jul 08. 2023

삶의 목표 4. 철학

철학은 우리를 구원해 줄까?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로 하는 성공, 한국인으로서 평범한 삶, 행복 중 하나를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로 두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여러 방식으로 그것을 건전하게 추구하는 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다양한 고민과 경험을 해보니 그것만을 삶의 목표로 갖고 가기에는 불안했다.

실패를 반복하며 성공이란 목표를 포기하기도 했었고 행복을 추구했을 때 그것에 끌려다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보다 완전한,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체계적인 세계관을 가진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리학, 철학, 심리학, 신학 등등 삶에 대한 얘기가 들어있는 학문과 그 안에서 뛰어난 통찰을 가진 현자들의 이론을 공부했다.

세상은 이러하다!라고 외치는 현자들에게서 어쩌면 완전한 삶의 목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아리송한 얘기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든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론들 안에서 진정한 삶의 목표라는 것이 있었을까?

이번에는 철학과 신학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물론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 아주 깊게 얘기할 수준은 아니다.

그 하나하나를 깊게 다루기보다는 애초에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알아낸 철학이 개인의 삶의 목표로서 적합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대학생 시절 철학 입문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각 철학자들의 이론은 파보면 매우 깊겠지만, 입문 수업 수준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한두 가지의 특징으로 간단하게 소개되곤 했다.

이데아의 플라톤, 현세와 행복의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코기토의 데카르트, 의지와 표상의 쇼펜하우어, 논어의 공자, 도덕경의 노자, 인도 철학의 세계 등등 수많은 철학자가 매력적으로 소개되었던 수업이었다.

그중에서는 이해하기엔 어렵지만 매력적인 학자들이 있었다.

많은 부분 그들의 이론에 공감함에도 폭넓은 그들의 이론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일부는 나와 맞지 않기도 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잘 짜인 구조가 있고 논리적으로 말이 되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놔야 했다.

실제 삶이 그러한가? 우리는 마르크스 말처럼 노동과 떼어놓을 수 없을까? 플라톤의 말처럼 이데아가 존재할까?

이것을 깊게 전공하면 정말 삶에 대해서 깨우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전공해서 매몰된 노력과 시간이 그저 깨우쳤다는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이처럼 철학을 공부하고 또 삶을 고민하며 의문이 많아질 때쯤 결국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왜 이런 주장들이 생겼을까? 왜 철학자들이 각자 철학을 만들고 주장할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서일까? 아니면 좋은 학문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일까?

철학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아낸다면 내 삶에서 철학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철학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철학자는 자신이 만든 철학의 추종자가 많아져서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강력하게 원한다고 생각한다.

즉 각자가 주장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철학을 만드는 가장 큰 동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철학은 곧 사회의 방향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다.

사람과 세계에 대한 공부를 했던 철학자들은 그들이 찾아낸 본질에 맞춰 사람과 사회가 어떤 형태로 나가야 하는지도 논의했다.      


그렇기에 철학은 곧 사회론이자 정치론이었다.

한편으로 그래서 우리 개개인의 삶을 완전히 반영하지는 않는다.

분명 개인의 깨달음과 구원을 주장하던 철학이 사실은 개인을 외면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태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철학이 개개인의 다양성을 고려하기보단 다수가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적인 모습, 사회를 다루게 된 것은 철학이 탄생한 고대 그리스 상황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플라톤은 철학에서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삶을 다루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도는 이후 모든 서양 철학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주장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그 이름조차 국가(론)이다.

구체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자.

그 과거, 아직 지식의 체계적인 축적이 없던 시절, 또 각종 실험과 연구가 이뤄지기 어렵던 시절, 객관적인 지식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정의가 있었고 모두가 공감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정답이 없었다.

목소리만 크고 그럴듯하면 사회의 방향을 정하는 의회조차 그 주장을 따라가곤 했다.(물론 지금도 아주 크게 다를 바가 없긴 하다.)

이 때문에 사회는 혼란을 겪고 또 더 큰 사회로 성장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모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하나의 절대적인 정답으로 대표되는 그의 철학을 만들고 퍼뜨린다.

고전적인 철학은 그렇게 혼란의 시기를 끝내고 사람들이 한 가지 질서 위에서 강력한 협력을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철학의 토대 위에서 다양한 철학이 발전했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변하며 또 새로운 철학이 나왔고 그 철학도 역시 사회가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철학의 등장과 발전의 역사를 봤을 때, 결국 철학은 여러 똑똑한 학자들이 갖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주장하는 학문이다.

즉 철학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입장에서 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같이 고민해 주는 것이라기 보단 보다 이상적인 삶을 미리 정해놓고 사람과 사회를 그쪽으로 끌어오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종교, 신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철학에서 각종 의식과 생활지침이 추가된 모양을 가진다.

종교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의 지침서로 결국 철학과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사회 형태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특히나 과거 그들이 주장했던 사회 질서를 돌아보면 이러한 의도가 보다 노골적으로 보인다.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가 심판과 은총을 내린다고 설명하며 국가에서 왜 지배층이 특별한지를 설명했고 왜 하층민이 그 처지에 순응해야 하는 지를 설명했다.

민주주의 사회를 사는 현대인으로서 이제는 중세 시대나 조선 시대의 종교가 지배층을 위한 지배이념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생활양식으로서 사람들에게 지혜와 도덕성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때를 평가하며 우리는 종교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겪는 문제와 그 해결법으로 철학이 완벽한 답이 되기에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은 사회의 형태를 만드는 데 더 치중하고 있기에 개개인의 삶의 구원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진 않다.

심지어 각각의 교리와 철학에는 그것을 만든 이의 주관이 강력하게 들어가 각각의 괴리감이 크다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면 혹시 인생을 살면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에 맞춰 그때마다 가장 알맞은 철학들을 가져다 써야 할까?

그럼 각 철학의 깊은 세계관이 뒤죽박죽 섞일 것이기에 바람직하진 않을 것이다.

사실 삶의 목표를 고민하는 우리가 원했던 것은 진리 수준까지 도달한 하나의 철학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다른 철학을 찾으면 우리가 원했던 삶의 목표에서 멀어지게 된다.

결국 이 때문에 철학을 삶의 목표로 하고 추구하는 것 또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올바른 대답을 찾기 위해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를 찾아왔다.

지금까지 여러 삶의 목표를 살펴봤지만 그중 하나가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로 채택되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특정 삶의 목표가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좋은 답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방법을 조금 바꿔야 할 때이다.

가장 우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야 한다.

성공, 평범한 삶, 행복, 철학 등을 추구했던 과정을 돌아보며 우리가 생각했던 이상향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삶은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 대단한 가치를 향해 나아갔을 때 분명 만족할 만한 결과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성공한다면, 행복하다면, 가족이 있다면, 철학을 실천한다면 미래에 분명한 답이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가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가 겪는 실패는 저들 중에서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실패했던 가치는 버리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로 한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그 끝에는 분명 무언가 가장 우월한 가치가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우리의 현주소일 것이다.

이 전체 과정을 돌아보며 우리가 잊었던, 삶의 목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처음, 우리는 왜 삶의 목표를 갖고자 했을까?

가장 처음, 우리는 어떤 우월한 가치를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미래라는 미지수를 이겨내고 좋은 미래를 손에 쥐기 위해서 고민을 시작했고 우월한 가치는 그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다.

성공, 행복, 철학 등을 후보로 삼고 우월한 가치를 찾는 과정을 검증했다가 실패했다면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미래의 미지수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해야 한다.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 그런 것을 찾아낸다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내는데 훨씬 수월할 것이다.

결국 이런 흐름으로 우리가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로 추구하게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가 있긴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것을 추구하는 우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논리적인 생각과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는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는데 충분할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한계가 있는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진리란 몇 가지 착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역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철학이 완전한 삶의 목표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진리라는 허상을 만들어낸 인간의 본능과 한계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한계로 인한 잘못된 생각을 고쳐가며 지금 까지 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목표에 접근하고자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철학과 진리가 왜 한계를 갖는지, 애초에 미래의 모든 경우의 수를 통제할 가장 우월한 하나의 삶의 목표를 찾아내겠다는 생각이 왜 잘못되어 있는지 얘기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추구할 정답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진리란 있는 것일까?

진리가 허상이라면 우리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 삶의 목표에 접근해야 할까?

이전 06화 삶의 목표 3. 행복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