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2
행복은 삶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열심히 살고 성공해도 그 행복은 결국 적응이 된다.
그렇다면 결국 성공을 위해서 소중한 일상의 행복을 매번 희생시킬 순 없다.
성공을 어느 정도 포괄하고 일상의 행복까지 생각하는 행복이야 말로 삶의 목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행복을 삶의 목표로서 추구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선 행복이 통제 가능한 목표로서 의도한 성취와 의도한 결과로 이어지는지가 의문이다.
행복은 감정이기 때문에 다른 요소에 영향을 받아 의도할 때 성취하기 어렵다.
또 행복은 특정 행위를 중독시킨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충분히 똑똑한 우리는 이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행복을 얻을 기회에는 행복을 최대한 얻고 그것을 얻지 못할 때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다양한 심리적 준비를 할 수 있다.
감사 일기 등을 써서 의도적으로 행복을 더 많이 인지할 수 있고 마음이 어지러워 행복해지기 어려운 상태에선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시 준비시킬 수 있다.
또 사회적 기능을 해나갈 수 있는 적당한 선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중독을 견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행복이 통제 가능하다면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 충분한 것일까?
통제가 가능하다고 해도 이미 우리의 통념을 여러 번 배신한 행복이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긴 어렵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둘 때, 생길 변화를 더 예측하며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더 고민해 보자.
행복함을 느끼는 빈도를 늘린다는 것은 반대로 경쟁자인 다른 느낌의 빈도를 낮춘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동시에 행복하고 화나거나, 행복하고 슬프거나, 행복하고 불안할 수 없다.
행복을 많이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감정을 줄이고 그 자리를 행복으로 채워야 한다.
그것이 곧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은 정말 인간에게 가치 있을까?
즉 행복은 다른 감정에 비해 우월할까?
정답을 얘기하자면 꼭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각 감정의 우월함을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
각 감정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행복만이 우리 삶을 이끌어갈 유일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각각 다른 감정들을 느낀다.
때로는 잘못된 길에 빠졌단 생각에 불안하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서 슬퍼하기도 한다.
또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나기도 한다.
이때 우리는 적당히 불안해서 발전하고 적당히 슬퍼서 쉬어갈 수 있으며 적당히 화가 나서 공정함을 주장 수 있다.
살다가 마주하는 여러 가지 일들에서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고 그 감정들은 그때마다 본능적으로 대처 방식을 정해준다.
다만 행복과 평안함은 더 특별해 보이긴 한다.
많은 경우 행복함과 평안함은 다른 감정과 그로 인한 행동이 끝난 후 나타난다.
슬프고, 화나고, 불안해서 한 행동 끝에 평안함을 느끼거나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종착지이자 목표는 평안함과 행복함이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감정의 순서는 그저 잘 짜인 시스템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보통 불쾌한 감정은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즉각적인 행동을 부른다.
하지만 불쾌한 감정의 역할은 즉각적인 대처까지이다.
그 뒤에 대처 행동이 정말 적절한지 평가하고 행동을 그 평가에 맞춰 수정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알맞게 행동한 경우 유쾌한 감정이라는 피드백을 추가적으로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감정에서 행동으로 이어져 다시 좋은 감정으로 끝나는 하나의 체계는 지금 뿐만이 아니라 다음에도 올바른 대처를 하도록 이끈다.
그 체계의 결론만 보고 비약적으로 결국 행복이 가장 우월하다고 보는 것은 그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불쾌한 감정의 목표는 평안함이 아니라 불쾌함을 유발한 문제에 대한 대처이다.
불쾌함의 역할을 잊고 무작정 행복의 빈도를 늘리고자 마음을 다스려 불안을 외면하면 기분은 좋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은 인생이 될 수 있다.
즉 각 기분은 세상의 많은 일에 대처하라는 신호이며 이들은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
다만 많은 경우 행복은 다른 감정을 통한 행동이 끝난 후 피드백을 주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꼭 행복만이 우리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때문에 다른 감정에 비해 우월하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행복이 감정 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았지만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다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력한 직관은 행복이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라는 느낌과 함께한다.
그 특별한 느낌을 설명해 내기 위해서는 행복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명확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이유로 인간은 행복을 그렇게 강렬하게 추구하도록 설계되었을까?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그저 신호이다.
특정 행동이 우리의 생존 혹은 번식에 이로우니 반복하라는 신호이다.
이를 증명하듯 행복을 주는 대상은 보통 생존 자원이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일수록 영양, 특히 열량이 풍부해 생존에 이롭고 만나면 즐거운 친구는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리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으면 그 무리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고 무리에서 안 쫓겨날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우리는 인정과 소속감을 통해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
유전자를 남길 기회를 주는 이성과의 데이트는 아주 강렬한 행복을 준다.
행복은 생존에 유용한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도록 뇌가 주는 피드백인 것이다.
이러한 생존 자원은 한 번만 성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혹은 한 번의 신호만으로는 생존 자원을 쟁취하는데 부족할 수도 있다.
때문에 행복이라 불리는 강렬한 쾌감은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 느끼는 결핍의 불쾌감과 한 세트로 구성되어 행복을 주는 행동을 반복시킨다.
기분 좋았기에 그 행동을 다시 찾게 되고 그 기분 좋음이 이뤄지지 않는 지금 상태가 불쾌해서 그 행동을 다시 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던 것을 다시 찾곤 한다.
맛있었던 음식, 말이 잘 통했던 친구, 멋졌던 이성 등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추억을 더듬으며 그들을 다시 찾는다.
배고픔이나 외로움과 같은 결핍은 이러한 행동을 더욱 부추긴다.
행복은 결국 생존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행동을 반복하라는 강력한 신호이다.
행복을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느끼기 위한 행동을 열심히 반복했던 개체들이 생존 자원을 향한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해서 살아남았고 그 유전자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매우 강렬하게 추구하고 가끔은 행복이 특별한 무언가이니 무조건 추구해야 한다는 동기를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한 계속 먹고자 하는 강아지와 같이 털이 많던 조상이 준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우리는 뇌가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한 계속 누리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신호에 매번 충실하면 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물론 행복을 얻는 것 그 자체가 마음과 신체에 다양한 이점을 주기도 한다.
또 행복 추구 신호를 무시하는 것은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강아지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산다.
나와 한 몸에 있는 본능이 걸어오는 말이기에 분명 우리 이성도 이를 들어주고 싶긴 하지만 우선 상황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매번 내 눈앞에 있는 행복에 달려드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단기적인 이득을 향한 선택으로 장기적인 이득을 잃을 수도 있다.
지금 행복을 위해서 한 일이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에 영향을 줘서 어떤 나비효과가 나타날지 모른다.
행복이 주는 강렬한 신호와 착각이 우리를 후회라는 늪에 빠뜨릴 수도 있다.
앞서서 얘기했듯 성공만 하면 다른 무엇을 희생시켜도 될 만한 큰 행복을 얻는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강아지와 다르게 복잡한 현대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보다 현명하게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이 가진 특징을 알아보며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자 한 것은 결국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행복이란 생존 자원을 취하라는 무조건적인 신호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때문에 행복이 현명하게 조절할 대상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약간은 애매한 결론이 난 것 같다.
뇌가 주는 강렬하고도 생존에 이득이 되는 신호인 행복은 충분히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 인간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를 분명히 조절하면서 추구해야 한다.
행복이 꼭 매번 절제할 대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행복을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서 행복을 더욱 많이 추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무작정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다.
즉 행복이란 본능 입장에선 추구하는 것을 이룰 수단이고 이성 입장에선 조절할 신호이다.
때문에 이것을 유일하고도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할지도 모른다.
유일한 삶의 목표는 우리의 모든 행동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아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행복이란 분명 조절할 대상이기에 무조건 추구할 대상은 아니다.
태어난 자식이 삶의 이유가 되는 소중한 존재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른, 부모로서 볼 때 미래에 더 가치가 생길 수 있는 요구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더 현명하듯이 말이다.
아이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겠지만 그 아이가 바라는 데로만 해주었을 때 그 결과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장단기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이득이 되는 방향을 고민하고 이를 아이에게 제시하며 합의해 나가는 방향이 더 좋은 경우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와 비슷하게 DNA의 영향으로 무의식적으로 뇌가 추구하는 행복이 곧 우리의 기쁨이겠지만 우리는 뇌의 행복에 대한 요구와 그에 대한 반응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행복은 무조건적으로 좇아야 할 삶의 목표가 아닌 살면서 현명하게 조절해 줄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삶에서 분명 필요하지만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로 두긴 부족해 다른 목표를 더 탐색했었다.
성공, 평범한 삶, 행복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가치관을 추구해 보고 또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제대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추가 조건이 붙어, 살면서 추구할 가장 우월한 목표로 보기에는 부족했다.
그렇다면 이미 여러 조건들을 고려한 완성도 높은 세계관을 삶의 목표로 갖는 것은 어떨까?
대단한 천재, 위인들의 철학에는 분명 삶의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철학을 삶의 목표로 갖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참조
서은국. (2021). 행복의 기원.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