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내가 찾은 삶의 목표는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야.”
미래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새까만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미래에서 어떻게든 한 발자국 내딛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의 이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빛 한줄기를 찾아내본다.
물질적 풍요와 우월함을 과시할 성공, 대다수가 좇는 평범한 삶, 정신적인 만족을 줄 행복, 현자들이 만들어낸 심오한 철학과 같은 목표는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근거로 이성이 찾아낸 정답이다.
하지만 막상 성공, 평범한 삶, 행복, 철학 중 단 하나의 목표를 가장 좋은 목표로 두고 추구하려고 하다 보니 추구하지 못한 다른 목표가 신경 쓰인다.
그리고 꼼꼼히 따져보니 그들 중 하나를 맹목적으로 좇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성공을 위한 경쟁을 하다 보니 자신을 너무 몰아넣는 것 같고 평범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특별한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막상 행복을 추구하려다 보니 행복은 감정이기에 의도와 같이 성취하기 어려우며 철학은 깊게 파다 보면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꼭 하나씩은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삶의 목표를 추구하다가 의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가 결정적인 실패나 장애물을 마주하고 나서는 추구하던 삶의 목표를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자신의 삶의 목표가 옳다고 고집부리기도 한다.
간절한 고집은 때로는 시간과 노력을 매몰시켜버리기도 하고 또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타인의 신념과 삶의 목표를 폄하하게도 만든다.
누군가는 여러 가지 목표를 오고 간다.
성공을 좇다가 성공의 가능성이 떨어지자 평범한 삶을 추구하고 평범한 삶을 추구할 가능성도 떨어지자 개인의 소박한 행복만을 추구해보기도 한다.
매번 전략적으로 삶의 목표를 바꾸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과 환경에 대한 의심만 쌓여간다.
이렇게 매번 삶의 목표를 바꾸는 이유가 자신의 선택이 형편없거나 자신의 주변이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의심만 쌓이다가 어떠한 선택을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소수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도 가장 우월한 목표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완벽히 극복하는데 단서를 줄 진리와 같은 것이 있고 우리 이성이 그것에 도달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불확실한 미래를 극복하고자 끈질기게 매달린 이들은 그렇게 진리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불확실성을 완벽히 극복할 목표를 찾는다는 생각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온갖 변수를 모두 통제할 능력이 있을까?
어떤 미래 예측도 모든 변수를 계산할 수 없다.
나름 미래에 나타날 다양한 변수를 예측하며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좋은 계획과 목표를 만들지만 그럼에도 분명 통제되지 않는 변수가 있다.
때문에 삶이 늘 생각한 것과 같이 흘러가지는 않는다.
예측 실패는 필연적이다.
우월한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영원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과장된 생각이다.
더 먼 미래에 성취할 목표를 기대하며 현재 나에게 불안을 주는 불확실성과 실패의 상처를 이겨낼 수는 있다.
그러나 목표를 성취해 낸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성에 맞서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인 반성과 같이 실제로 의식은 불확실성을 완벽히 통제하기 위한 진리를 찾을 능력이 없는 것만 같다.
우리 의식, 이성은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고 순수한 진리를 향한 오로지 합리적인 생각을 해낼 수 없다.
진리와 같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이겨낼 좋은 삶의 목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미래 예측이 필요하다.
합리적인 미래 예측을 위해서는 이성, 의식이 다른 요소에 영향을 받아 편향적인 판단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려와 같이 우리가 이성, 의지의 영역으로 여기던 생각과 행동은 사실 본능, 감정, 타인 등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아주 높은 확률로 우리 이성이 만든 생각은 순수하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향한 합리적인 사유를 하기 어려워한다.
앞서서 다뤘던 리벳의 연구는 이성과 의식에 대한 과대평가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눈앞의 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 버튼을 누를 의지를 경험한다.
우리는 이성이 그 의지를 통해 생각과 행동을 조종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벳의 연구는 우리가 그 의지를 경험하기 전에 이미 뇌가 활성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 이성과 의지에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의식되지도 않는 뇌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험에서 나타난 사실과 달리 우리는 살면서 이성이 몸을 통제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 의식(이성)이 출처도 모를 의지에 대한 느낌(대리감)에서 만들어지는 통제 환상을 맹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리감을 포함한 다양한 감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의식적인 생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편향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의식이 느낌을 의심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인과관계를 만들기 위한 정보를 오로지 의식(인지한 정보)에서 찾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의식에 떠오른 정보만 가지고 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진실은 때로는, 아니 자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정보에 있다.
예를 들어 뇌가 활성화되고 신호가 신경을 타고 손끝을 움직이기까지, 모든 과정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식은 단지 대부분의 일이 자동적으로 처리된 이후에 대리감, 시각, 촉각 정보 등을 인지할 뿐이다.
실제로 손을 움직이기 위해 온갖 세포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의식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의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을 조합해 자신이 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이와 같이 의식은 자신이 접근할 수 없는 의식 밖의 일들을 해석하는데 자신이 접근 가능한 정보만을 활용하고 그것을 맹신한다.
의식 밖 기능이 만들어 낸 느낌에 큰 영향을 받고 또 그것을 의식 안에 있는 제한적인 정보(이 정보도 의식이 직접 고른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만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성, 의식은 자주 사실과 다른 정보를 만든다.
당연히 이러한 이성 혹은 의식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합리적인 계산 끝에 진리에 가까운 삶의 목표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진리와 같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극복할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는 애초에 이성, 의식이 외부의 영향을 받고 엉성한 추리 실력으로 만들어낸 허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합리적이지 않은 의식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만들어낸 삶의 목표는 무가치한 것일까?
이러한 결론은 조금 극단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전제 하에 만들어진,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정복할 삶의 목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이 잘못되었다.
따라서 우선 의식과 환경에 대한 오해로 만든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면 된다.
불확실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해 그 위에 만든 것 들을 모두 부정한 이후에 남는 것은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와 여전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살아가기 위해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삶의 목표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추구했던 목표가 무너졌고 완전히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고민이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다.
이제는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게다가 우리는 삶의 목표를 만드는 주체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의 목표는 뇌 속 의식과 의식 밖 요소의 합작품일 것이다.
그들 각각에 대해서 더 알아갈 수 있다면 삶의 목표에 대한 더 올바른 접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망감을 안겨준 의식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둘 수 없기도 하다.
지금까지 의식, 이성 혹은 의지가 삶의 모든 경험에 있어서 주도적인 주체인 줄 알았고 그래서 삶의 목표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도 당연히 주인공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의식은 대부분의 행동에 있어서 그 시작과 과정에서는 제외된, 오로지 결과에만 접근 가능해 보이는 무언가였다.
어쩌면 의식은 이미 모든 게 정해지고 난 뒤에 결과의 일부만 구경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식에게 삶의 목표를 위해 공부하고 고민하는 일을 다시 한번 맡겨도 되는 것일까?
의식 위에서 이루어지는, 글을 읽고 쓰고 생각을 정리하는 활동이 정말 삶의 목표에 관여할 수 있긴 한 것일까?
새로운 방식으로 삶의 목표에 접근하기 전에 우선 손상된 의식의 자율권과 합리성을 어느 정도 회복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의식은 특정 기능이나 의지가 있는 실체가 맞을까?
자신만의 의도와 권한이 있어서 삶의 목표를 만드는 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의식이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다.
뇌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경험의 실체를 연구하고자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뇌의 활성화를 나타내는 다양한 신호를 포착하는 것이다.
뇌에서 나오는 다양한 전자기 신호를 측정해 특정 정신적인 활동을 할 때, 어떤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뇌의 특정 기능이 뇌의 어떤 부위에 종속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해당 뇌 부위를 더 연구하며 특정 정신적인 활동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주관적인 정신활동을 실재하는 뉴런 뭉치로 증명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정신활동의 객관적인 근거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식이라는 정신 활동 역시 그것을 만들어내는 실체를 찾게 된다면 많은 부분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식이 정말 의식이라는 정신 현상의 실체를 찾는 일에도 적합할까?
의식이란 머릿속에서 처리되는 많은 정보 중에 일부가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무언가에게 보다 명확하게 인지되는 현상을 얘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에서 식사 후 테이블 위에 있는 접시를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 시야는 테이블 위에 대부분의 것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지만 우리는 접시만 의식할 수 있다.
그래서 책상 위에 핸드폰을 두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접시만 구경하다가 핸드폰을 잊고 집을 나서곤 한다.
만약 예시와 같은 상황에서 뇌의 활성화를 찍어본다면 주로 시각 자극을 처리하는 부분이 활성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의식은 해당 시각 정보 처리 부분에서만 생성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의식에는 시각 자극을 포함한 온갖 감각 자극이 올라오기도 하고 또 의식은 기억, 상상, 계산 등 다양한 기능이 표현되는 화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의식이라는 정신 현상은 그 내용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정신활동과 관련 있기 때문에 특정 부위에서 담당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어느 부위가 되었든 그저 뉴런 뭉치가 너무 열심히 일할 때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의식이란 여러 정보가 오고 가며 교차하거나 부딪힐 때 생기는 특수한 현상일 수도 있다.
혹은 애초에 우리가 그저 의식이라고 뭉쳐서 표현했던, 의식 안에 정보가 들어오며 의식이 생성되는 일과 의식 안에서 정보가 처리되는 일이 그 주체가 다른, 각각 전혀 다른 정신활동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와 같이 의식이라는 정신 현상의 근거를 실재하는 뉴런 뭉치의 활성화에서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마치 소프트웨어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의 실체와 1대 1로 대응하는 하드웨어가 존재한다고 하기는 애매한 경우와 비슷하다.
이러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의식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의식에 대한 가장 부정적이고 보수적인 의견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의견을 반박하거나 수용함으로써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의식의 모습을 조금씩 밝혀 나가야 한다.
우선 의식에 대한 가장 회의적인 의견부터 시작해 보자.
의식에 대한 가장 회의적인 의견은 의식이 그저 여러 정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서 의식이란 자신만의 기능이나 의지는 없지만 정보 중 일부를 복사할 수 있는, 마치 거울과 같다.
의식이 직접 행동을 시작하거나 그 과정을 통제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결과에 대한 정보만을 전달받는 존재라는 것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이 생긴다.
그러나 필요 없는 의식이 굳이 다양한 정신활동과 관련이 있는 이유 그리고 필요 없는 정신활동이 유전되는 이유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식에 대한 가장 회의적인 주장은 지지되기 어렵다.
특정 정신 활동이 어떠한 기능도 없는 우연한 부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유전되기 위해서는 해당 정신 활동이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어떠한 기여도 없고 동시에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인데, 만약 의식이 생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더라도 추가적으로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대리감 등 수많은 느낌이나 정신 활동도 부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때문에 의식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부산물이라는 의견이 진실일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따라서 일단 의식을 정보를 복제하는 단순한 거울이 아닌, 특정한 기능이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의식, 혹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이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벳의 연구에 의하면 의식은 우리의 기존 생각과 달리 모든 의식적인 행동을 통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에 의도가 생기고 그다음에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주관적인 경험을 근거로 의식을 행동의 원인이자 지배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의식이 활동하기 전에 이미 행동의 원인이 되는 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행동, 의사결정 전에 의식의 영향이 없었다는 해당 연구결과를 수용하면서도 의식이 행동,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를 고민해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의식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몇 가지 요소와 의식을 분리해 볼 것이다.
첫 번째, 의식의 의사결정 참여 여부와 대리감을 분리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대리감은 의식이 우리 행동의 원인이 되는, 의지를 가졌다는 느낌을 준다.
때문에 대리감은 의식이 의지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리벳의 연구 결과와 같이 버튼을 누르기 전에 느껴진 대리감은 버튼을 누르는데 의식이 관여했다는 실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대리감이 느껴졌음에도 의식은 버튼을 누르기 위한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때문에 누군가는 이 결과를 가지고 대리감이 느껴지는 모든 의식적인 행동이 사실 의식적이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해당 연구가 말해주는 바는 엄밀히 말하자면 대리감과 의식의 의사결정 참여 여부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대리감은 의식이 의사결정에 참여했다는 근거로서 사용되기에 부족하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활동에서 느껴지는 대리감과는 별개로 의식은 행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할 것이다.
리벳이 연구한 버튼 누르기는 대리감이 느껴지지만 의식이 행동에 참여하지 않은, 하나의 경우가 될 가능성이 있다.
대리감이 의식의 의사결정 참여 여부와 상관없기에 버튼 누르기라는 행동을 확장해 대리감이 느껴지는 다른 활동 모두 의식이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실제로 대리감은 의식의 의사결정 참여 여부와는 별개로 생성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리감 형성에 대한 가설을 만든 frith와 wegner 역시 의식의 의사결정과정 참여 여부와는 별개로 운동제어 과정이나 감각 정보와 예측 정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대리감이 형성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대리감이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의식이 관여한 것만 같은 행동도 존재한다.
우리는 때론 기나긴 의식적인 생각 끝에 다음에 할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하곤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기나긴 의식적인 고민이 의식이 의사결정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때도 물론 대리감은 느껴지고 그것보다 앞서서 운동 제어와 관련된 뇌 부위 활성화가 이뤄지겠지만 그전에 의식적인 생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처럼 대리감은 의식의 의사결정 참여 여부에 대한 유일한 근거가 아니며 정확한 근거도 아니다.
때문에 대리감이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의식의 행동 관여를 추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정신 활동이 실제 의사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줄 때만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식에게 모 아니면 도와 같은 극단적인 의견이 생기는 이유는 의식이 늘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심 없이 늘 활성화된 의식에게 모든 생각과 행동에 관여할 가상의 의무를 부과한다.
반대로 그것이 활성화되어 있음에도 생각이나 행동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에 배신감을 느끼곤 활성화와 행동 관여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의식은 그 사이에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즉 늘 활성화는 되어 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만 행동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시스템이 여럿 있는데 예를 들면 경비 시스템이 그러할 것이다.
경비 시스템은 늘 카메라를 통해 얼굴 정보를 수용하고 그것을 저장된 얼굴과 비교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우리는 실제로 허가받지 않은 이가 출입을 시도하고 그것을 알아차린 경비 시스템이 경보를 울릴 때에만 그것이 드디어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비 시스템에는 의식이 없을 것이고 의식 역시 경비 시스템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매번 자신만의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외부에 그 활동이나 영향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 기능이 존재한다.
의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식은 일반적으로 행동의 시작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정보만 전달받는다.
따라서 늘 활성화된 상태로 정보만 받으며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주 가끔 의식 안의 정보가 특별한 형태로 가공되어 다음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끔 우리는 관성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의식에서 시간을 들여 만든 특별한 결론을 따라 특이한 행동을 한다.
이처럼 의식은 의식에 모인 정보가 보다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해서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흔치 않은 순간에만 행동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의식은 예측 밖에서 나타나는 그 중요한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 매번 활성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의식의 활성화나 대리감을 의식의 의사결정 참여 여부와 분리함으로써 리벳의 연구 결과 위에서 의식의 새로운 역할을 찾을 준비를 마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의식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하나 더 다루고자 한다.
바로 의식과 의식 밖 영역의 구분이다.
의식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내용을 삶의 목표에 반영하고자 한다면 의식과 의식 밖 요소의 영역을 아주 엄격하게 나누고자 하는 노력은 다양한 이유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뇌 안에서 내가 접근 가능한 부분이 오직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 밖 부분에 대한 거부감을 갖곤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우리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의식 밖 요소를 감정, 욕망, 본능, 원초아, 무의식 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그들을 경계해 왔다.
의도를 알 수 없음에도 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외부에서 온 침략자라고 느끼곤 했다.
보이지 않는 침략자를 이겨내고 완전히 나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의식의 영역을 찾고 그것을 확장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이 때문에 의식만의 영역을 찾고자 완전히 의식적인 행동, 생각, 의지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의식과 의식 밖 요소는 마치 한 몸처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뇌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세포 뭉치의 집합이며 그 안의 세포 뭉치들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늘 협업한다.
의식과 의식 밖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역시 늘 협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경계는 모호하고 때문에 완벽히 순수한 의식적인 행동과 의식만의 의도는 존재하기 어렵다.
때문에 완벽히 순수한 의식만의 영역을 찾아야만, 생각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뿌연 안개를 넘으면 진짜 의식의 영역을 찾아 침략자를 몰아내고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그 안개 넘어 존재하는 것은 침략자라고 생각했던 것과 공존하고 있던 의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실 위에서 행동, 생각, 경험 즉 삶을 조절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가상의 침략자를 가정하고 존재하지도 않을 진짜 나를 찾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쓰다 보면 정작 진짜로 자신의 삶에 참여하고 이끌어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완전히 의식적인 부분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제대로 된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미궁 속으로 향하는 일만 같다.
특히 완벽하게 의식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찾고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행동에는 의식과 의식 밖 요소의 영향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보통 두 영역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특정 행동에서 의식의 영향력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그 행동을 하는 이유부터 행동에 대한 시뮬레이션까지, 행동을 실행하기 위한 정보를 모두 의식적으로 처리하고 그다음에 그 정보를 반영해서 행동한다면 그 행동은 주로 의식의 영향을 받은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의식적인 정보 처리 및 가공 없이, 즉 아무런 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행동했다면 그 행동은 대리감이 느껴지지만 의식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는 전자와 같은 경우도 주로 의식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의식이 활용할 정보를 조달하는 기능과 의식의 의견을 통제된 운동으로 전환해 주는 기능의 도움이 없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후자와 같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행동에서도 의식의 영향이 남아있을 수 있다.
의식적으로 해왔던 행동은 보통 익숙해지면서 점점 의식 없이도 할 수 있게 되고 또 하나의 관성이 되곤 한다.
때문에 신발 끈 묶기나 자전거 타기처럼 이제는 의식적인 무언가가 필요 없어진 행동들이 많지만 그러한 행동들 역시 처음에 의식적으로 관성을 깨던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관성에서 벗어나는 행동(의사결정)을 하는 순간 지금까지 그 행동을 반복하던 의식 밖 무언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의식(그리고 다른 의식 밖 요소)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몇 무의식적인 행동에는 의식의 영향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행동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복잡한 과정과 역사가 있고 의식과 의식 밖 요소의 영향 역시 복잡하게 섞여있다.
이러한 과정과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특정 행동을 완전히 의식적이거나 혹은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정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의식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의식을 잘못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 과학이 발전해 이 애매한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 수준에서도 더 명석한 통찰력을 가진 자가 의식에 대한 더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의식 밖 요소를 자신이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가는 나 자신과 의식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에 대한 자유와 통제권이 가끔 의식 밖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의식할 수도 없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도를 알 수도 없는 악마가 내 안에 숨어 있고 그것이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꽤나 불쾌하다.
그러나 진실은 의식과 그 악마가 한 패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내 뇌 속 주민들이며 심지어 생존과 번영이라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즉 처음부터 악마는 없었고 그저 잘 의식되지 않는 또 하나의 나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세포 덩어리이다.
몇몇 세포는 자신만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나의 집단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각 집단은 각자의 역할을 알아서 해내기에 꼭 집단끼리 모든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식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도 그들은 모두 다 같이 살아남고 그들이 공유하는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는 것을 꿈꾸며 열심히 일한다.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정보 공유가 되는 부위와 안 되는 부위를 굳이 나눠서 차별적인 시선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모두가 나이다.
의식만의 영역을 찾는 것과 별개로 이와 같이 의식 밖의 영역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나 자신과 그 삶에 대한 고민을 쌓아갈지도 모른다.
다시 의식 나름의 기능과 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미 앞에서 조금씩 의식만의 기능을 추측해 봤었는데 의식은 실제로 그 추측과 유사한 기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앞선 글에서 다뤘던 Persaud, N., McLeod, P., & Cowey, A. (2007)의 연구는 의식만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밑그림을 그려준다.
그들은 한 실험에서 피험자에게 A, B, C, D 4가지의 카드 뭉치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
카드 뭉치를 고른 뒤에는 10달러나 20달러를 걸게 했고 돈을 건 뒤에는 고른 카드 뭉치에서 가장 윗 장을 뒤집어 나온 카드에 따라서 돈을 주거나 뺐었다.
예를 들어서 피험자는 뒤집은 카드가 하트나 다이아면 돈을 잃고 스페이드나 클로버면 돈을 탔다.
또 그 돈의 액수는 카드의 숫자와 건 돈을 곱한 액수로 정해졌다.
즉 만약 10달러를 걸었는데 하트 10이 나오면 100달러를 잃는 식으로 과제가 진행되었다.
이때 카드 뭉치 A, B는 전체적으로 돈을 벌 확률이 더 높은(예를 들어 스페이드나 클로버 높은 숫자가 많이 포함됨) 뭉치였고 C, D는 전체적으로 돈을 잃을 확률이 더 높은 뭉치였다.
이러한 과제를 진행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피험자는 반복 시행 끝에 특정 시행부터는 결국 돈을 벌 확률이 더 높은 카드 뭉치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내기 성공 확률은 좋은 카드 뭉치를 고르기 시작하고 한 참 뒤에야 개선된다.
이는 참가자가 어떤 카드 뭉치가 더 좋은지 의식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적으로 더 이득이 되는 카드 뭉치를 잘 고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해당 실험은 의식 없이도 학습과 선택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학습과 선택은 잘하는 의식 밖 영역이 내기 수행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며 때문에 해당 내기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의식의 영향이 클 가능성을 보여준다.
연구자는 의식의 영역을 더 명확히 구분해 보고자 무의식적인 카드 뭉치 선택 능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의식적인 내기 성공률만 영향을 주는 요소를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해당 실험에서 특정 그룹은 10번의 카드 선택 시행마다 각 카드 뭉치의 수익이나 손실에 대한 –10부터 10까지의 양적인 평가를 진행했고 이후에 선택하고 싶은 카드 뭉치를 골라보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결과, 질문을 받은 그룹은 질문을 받지 않은 그룹과 비슷한 시행 횟수에서 긍정적인 카드 뭉치를 고르기 시작했다.
즉 10번째 시행마다 한 질문은 무의식적인 카드 뭉치 선택 학습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그룹만이 무의식적으로 이득이 되는 카드 뭉치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기 성공률도 개선되었다.
이는 해당 그룹이 받은 질문이 암묵적인(무의식적인) 학습을 담당하는 의식 밖 요소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의식만은 자극해서 내기를 개선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의식 밖의 요소의 영향과는 어느 정도 구분되는 의식만의 영역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해당 연구를 통해 그 영역을 아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의식은 적어도 자신과 과제(외부)에 대한 정보를 추가적으로 가공해서 활용해야 하는 내기와 같은 과제에서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과제에 대한 양적인 정보가 의식에서 사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정보는 내기를 위한 정보 가공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연구 결과를 조금 더 확장해서 의식의 역할을 찾아보자.
해당 연구에서 의식과 의식 밖 요소 모두 경험을 통해 행동과 생각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의식 밖 요소는 암묵적인 학습을 통해 직관적인 선택의 성공 확률을 개선시켰고 의식은 더 많은 정보를 모으거나 이전의 정보를 양적으로 분석하며 더 나은 선택에 대한 명확한 기준 혹은 규칙을 형성했다.
의식 밖 요소가 의식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선택을 개선하는 학습을 진행한다는 것은 놀랍다.
하지만 그 둘이 이끄는 학습과정과 그 결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 밖 요소는 아마 보상을 맛보게 해주는 성공과 위험을 맛보게 해주는 실패의 경험만 학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학습의 결과 어떤 카드 뭉치가 더 큰 성공 경험을 주었고 더 작은 실패 경험을 주었는지를 구별하며 더 이득이 되는 카드 뭉치를 선택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드 뭉치를 잘 고름에도 막상 자신의 수행에 관한 내기를 요구하자, 제대로 투자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직관을 넘어 확신까지 가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가 더 필요해 보인다.
실험에서는 카드 뭉치 선별 성공을 카드 뭉치 선별에 대한 내기 성공으로 치환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행이나 의식적인 평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직관을 확신으로 바꿔주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시행, 즉 충분히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 보이고 또 의식적으로 수행에 관한 양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처럼 의식은 더 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 혹은 외부 환경을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를 찾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의식은 내기와 같이 무언가를 잃거나 얻을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더 고차원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할을 가질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의식의 기능이 이와 같다면, 우리 삶 속에는 내기보다 복잡한 일들이 많고 때문에 의식의 주무대도 생각보다 많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의식의 역할을 알았어도 우리는 여전히 의식이 언제 행동에 영향을 줬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의식이 행동의 원인이라고 알려주는 느낌인 대리감이 부정확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대리감이 느껴질 때, 가끔 의식은 정말로 행동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때마다 다시 사실과 거리가 있는 대리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는 별개로 의식이 내 삶의 주체라는 믿음 자체가 필요하기도 하다.
즉 의식에게 의지를 부여해 주는 느낌인 대리감은 우리 삶에 분명한 기능이 있다.
대리감은 의식의 기능과는 별개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다.
때문에 대리감을 적당히 믿어줘야 한다.
우선 대리감은 우리가 환경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하는데 기여한다.
의식에게 부여된 과장된 통제감은 의식으로 하여금 자신이 신체를 조종하고 더 나아가 신체 조종을 통해 환경을 통제하는 존재라고 믿게끔 만든다.
의식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의식에게 부여된 통제권이 쓸모없거나 방해가 되거나 허상이라는 믿음은 자신과 환경에 대한 더 소극적인 활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믿음이 반복되거나 지속되면 우울함, 무기력함과 같은 더 부적응적인 증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갖고 많은 일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우울증(스펙트럼)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로 취급받는다(야오나이린. 2021.).
우울증 환자 혹은 우울한 일화를 상기한 일반인은 대리감이 낮다는 연구결과 또한 낮은 대리감과 과하게 소극적인 태도의 관계에 관한 추측을 지지한다(Vogel, D. H. et al. 2024, Obhi, S. S. et al. 2013.).
우울함이 무조건 나쁘며 적극성이 무조건 옳다고 하기 어렵지만, 낮은 대리감과 우울함은 쌍방으로 영향을 주며 벗어나기 어려운 부적응적인 행동의 순환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대리감을 믿고 의식의 기능과 의지를 믿으며 환경에 관한 적당한 통제감과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또 대리감은 나라는 존재(의식)에게 의지와 유일함을 부여하고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꼭 필요하다.
사회적인 동물이 서로를 믿고 뭉치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고 배신하지 않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주체가 자신의 의식이며 반대로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주체가 상대의 의식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런 능력이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만약 건망증이 너무 심해서 어제 자신이 한 일을 쉽게도 잊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건망증이 심한 A 씨는 어제 나에게 돈을 빌렸다.
하지만 오늘 내가 그 돈을 되찾으러 가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악의 없는 건망증으로 나를 맞이했다.
아마 나는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 여러 고생을 하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기억도 못 하는 A 씨와 다신 이러한 거래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신이 한 일의 책임을 자신의 의식에게 돌릴 수 있는, 대리감과 기억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을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진실과 다를지도 모르는 대리감을 믿고 행동의 책임자로서 나서는 일이 꼭 필요하다.
분명 의식보단 의식 밖 본능이 우리 행동을 주도적으로 조종한다는 말은 어떠한 면에서는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그래서 자신이 어젯밤에 케이크를 폭식할 수밖에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핑계를 늘어놔봤자, 그 얘기를 듣는 헬스장 퍼스널 트레이너는 우리에게 자기 조절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담긴 눈초리를 건넬 뿐이다.
나의 행동의 원인은 내 의식과 의식 밖 요소의 합이고 그것을 엄밀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인은 그 행동의 원인을 자신과 소통하는 내 의식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실제 행동을 통제했냐는 여부와 상관없이 의식을 그 책임자로서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의 의식이 나를 통제하고 대표한다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내 신체와 생각, 즉 내 삶의 유일한 주인이 의식이라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었다.
수많은 의식 밖 의지가 삶을 이끄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의 강력한 영향 때문에 오히려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식도 뇌 안의 여러 주체들 속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갖고 내 삶을 이끌어가는 주체 중 하나이다.
또한 의식이 곧 나를 조종하는 주체라고 믿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의식이 곧 나라고 믿는 대리감은 자신과 환경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느낌을 주고 적극적인 행동의 빈도를 높여준다.
또 내가 한 일의 책임자가 내 의식이라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른 이와 신뢰를 쌓아 가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거대한 의식 밖 요소의 영향을 무시하고 다시 의식만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는 착각을 가졌던 원점으로 돌아오자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우리는 의식에 대해 오해했었고 그가 오만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진리와 같은 허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의식이 주는 다양한 혜택(기능)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의식의 역할을 존중하고 그것이 내 삶의 주체라는 감각을 갖되 동시에 의식 밖의 여러 의지를 존중해야 하고 의식의 섣부른 판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의식 밖 의지 역시 나의 일부이자 아군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속마음을 알 수도 없는 이가 우리 머릿속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내 안의 일부이며 때문에 그들의 목표는 나의 생존과 번영이다.
특히 의식 밖 요소와 의식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밀접한 관계이다.
단지 의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식 밖 요소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의식과 나에 대해서 더 정확히 알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 결과, 나를 이해하고 삶의 목표를 만드는 복잡한 과정에서 자신의 구성요소인 의식 밖 요소를 빼버리고 의식에 엄청난 합리성을 가정해 버리는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에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거부감은 나름의 이유를 갖고 생겨난다.
의식은 대리감과 기억을 통해서 나와 내 삶의 주인공이 오직 자신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진다.
다른 이를 밀어내는 이러한 특권 의식은 의식 밖 요소에 대한 수용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특권 의식을 마냥 부정할 수도 없는데, 의식에게 특별한 지위를 주는 것은 환경 적응을 위한 적극적인 느낌이나 타인과의 신뢰 형성 등에 기여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의식)는 행동이나 정신 활동에 있어서 의식 밖 요소의 거대한 영향력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의식의 특권을 유지시켜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의식에게 의식 밖 요소를 살펴볼 의무를 부과함과 동시에 그 의무에 특권이 담기도록 하면 된다.
즉 의식에게 대표자이자 조율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의식이 대표자, 조율자가 된다면 자신에 관한 통제권을 보장받을 수 있고 동시에 다양한 의식 밖 요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의견을 더 경청(적극적인 추측)을 해야 하는 의무를 받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의식(우리)은 삶에 대한 오판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고 동시에 대리감을 통한 적극성도 유지하며 삶의 목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할 부여는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낸 증거 없는 추측이 아니라 의식에 관한 다양한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이끌어낸 합리적인 추론이다.
의식이 의식 밖 요소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와 의식과 대리감이 자신만의 특별한 역할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공존하며 의식에게 자율성과 통제권이 없다는 결론이 아닌 의식이 의식 밖 이에게 귀 기울이고 그 정보를 활용해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의식에게서 전능한 특권을 빼앗아 보다 정확한 권한을 찾아주는 기나긴 과정을 지나옴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결국 의식은 삶의 목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갈 주체로서 충분하다.
생존과 번영은 말도 안 되게 놀라온 일이다.
기나긴 세월 험악한 환경, 넘치는 경쟁자를 극복하는 일을 반복하며 그 수많은 조상들의 밑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경이롭다.
수많은 우연이 겹쳤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요소가 대단한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이러한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식 역시 우리 역사가 지속되는데 분명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의식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는 의식의 통제권과 의지를 위협하지만 그럼에도 의식이 생존과 번영이라는 기적의 한 축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의식에 대한 환상을 축소시키는 이러한 연구 결과는 진짜 의식만의 역할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된다.
이전보다는 그 권한이 작아졌지만 여전히 특별한 의식만의 역할을 찾아냄으로써 우리는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연히 더 좋은 삶의 목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의식에 대한 오해로 만들어진 온전한 합리성과 미래를 완벽히 통제할 삶의 목표를 부정하고자 의식에 대해 더 정확히 알아봤다.
다양한 연구를 돌아보며 삶과 행동에 대한 의식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는데 이는 자칫하면 앞으로 의식적으로 진행할 삶에 대한 고민과 공부가 삶에 영향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때문에 삶에 대한 의식의 영향력을 명확하게 알아보며 축소된 의식의 영향력도 여전히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아보았다.
이전 글과는 다르게 더욱 경험적인 근거가 많고 복잡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앞으로 이어나갈 글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내용을 짚고 넘어갔다.
다음 글부터는 다시 천천히 삶의 목표의 필요성과 삶에 대한 과학, 진화적인 접근의 필요성에 대한 글을 이어나갈 것이다.
우선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삶의 목표를 부정해 왔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회의적인 생각에 대해서 다뤄볼 것이다.
누군가는 애초에 삶의 목표의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진리가 없다면 굳이 삶의 목표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삶에 대한 자신 만의 생각 없이 현대 사회를 살아나가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현대에서 자신만의 삶의 목표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이어서는 이번 의식과 진리에 대한 글과 같이 우리가 삶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과학과 진화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더 다뤄볼 것이다.
그 이후에 마지막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볼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삶의 목표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다시 다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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