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민 Jul 10. 2023

자유 의지라는 착각

우리의 정신 활동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과거부터 진리는 이성적인 활동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겨져 왔다.

혹은 경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고도 여겨졌는데 어쨌든 경험하고 사유하거나 그저 머릿속에서 사유하거나 모두 사유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왜 철학에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과거부터 생각이란 특별하게 여겨졌다.

완전한 무언가를 해내기 어려운 육체에 비해서 생각은 다양한 것들을 너무 쉽게 해낸다.

생각을 통해 직접 본 적도 없는 개념이란 것을 인식할 수 있고 각양각색의 인간이 그 개념만은 어느 정도 동일한 형태로 공유한다.

예를 들어 개개인이 그리는 원은 절대로 완벽한 구체가 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두 완벽한 구체의 개념을 알고 상상할 수 있다.

모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형태의 완전한 무언가를 생각해 낼 수 있다는 통찰은 사물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근원인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가장 순수한 본질이란 것이 존재하고 각종 상황과 주관에 의해서 그 본질이 영향을 받아 현실의 다양성이 생겨난다.

또 본질과 유사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실인 진리라는 것도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도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생각을 통해 본질에 가까운 개념이란 것을 인지할 수 있기에 개념을 사유하는 방법에서 불순물을 더 제거하면 진리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본질과 진리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우리 삶은 완전히 변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고정 값, 그것만 찾아낸다면 불확실함이라는 무기로 끝나지 않는 두려움을 주던 미래는 오히려 정복하고 통제할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시작해 그 영향을 받은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이라는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철학자들이 주장한 어려운 사유 방법 하나하나 살펴보기보다는 애초에 정신세계에서 이뤄지는 활동이, 즉 이성적인 사유가 정말 완전하거나 순수해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 앞선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의 완전무결함을 의심해 보자.

생각이 결국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과 같이 우리가 “의지”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서 온다.

이 글에서는 “의지”라고 부르겠다.

모든 내적 정신 활동과 외부 자극을 의식하는 주체인 “의지”는 우리의 몸과 생각을 조종하는 특별한 무언가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완전한 존재기에 자유의지라고도 불린다.)

‘의지’는 내가 나임을 알고, 나의 신체를 의식하며, 기억을 활용하며, 의식할 수 있는 생각을 조종한다.(이를 sense of agency라고도 부른다.)

때문에 우리는 과거부터 “의지”를 “영혼”이라고도 하며 그것이 육체와 분명 다른 점이 있기에 물질계가 아닌 본질에 더 가까운 세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이 '의지'는 본질과 진리를 향한 불순물 제거 과정을 수행하기에 충분할까?

순수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지가 생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외부 불순물에 휘둘려서 생각이 흔들린다면 진리를 향한 과정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우리 의지는 정말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을까?

슬프게도 근현대 심리학, 아니면 우리가 가끔 하는 바보 같은 실수만 돌아봐도 우리의 의지는 능력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대표적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통찰만 살펴봐도 본능에 끌려다니며 그를 진정시키는 역할만 하는 의지가 정말 우리 몸과 마음의 지배자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의 이론처럼 가끔 우리는 직관과 감정으로 행동을 시작하고 뒤늦게 이성적인 판단을 더 한다.

의지의 허점을 알아갈수록 의지가 진리를 향한 불순물 제거 과정을 잘 수행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넘어 애초에 의지가 추측해 낸 진리라는 존재 자체가 그럴듯한 상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프로이트의 직관을 실험으로 설계해 의지의 허점을 더 깊게 연구할 수 있다.

심지어 몇몇 연구는 프로이트의 주장보다 더욱 의지의 입지를 좁게 만든다.

리벳의 1980년도 연구는 우리의 의지가 우리 몸과 생각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의도하고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즉 순서로 치자면

1. ‘의지’를 통해 의식적으로 행동을 결정한다.

2. ‘의지’의 결심을 수행하기 위해 ‘뇌’가 활성화된다.

3. ‘뇌’의 신호를 통해 우리의 ‘몸’이 움직인다.

의지도 물론 뇌 안의 어딘가 있겠지만 어쨌든 ‘의지->뇌(행동이나 시각을 관장하는 부위)->행동’ 이런 행동 원리가 있다고 믿었다.


리벳은 정말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뇌의 활성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0. 실험 중에는 뇌가 활성화되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뇌전도가 측정되었다.

1. 돌아가는 시계를 본다.

2. 버튼을 누를 의지가 생기는 순간의 시간을 기억한다.

3. 버튼을 누른다.

4. 버튼을 누를 의지가 생겼던 순간(그 순간 시계가 가리키던 숫자를)을 실험자에게 보고한다.

이 실험을 통해 뇌가 활성화되는 순간, 버튼을 누를 의지가 생기는 순간, 실제 누르는 순간까지 세 가지 시간이 측정되었다.


실험 결과, 의지가 행동을 앞선다는 우리의 통념은 증명되었다.

하지만 의지를 통해 뇌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순서는 반대였다.

1. ‘뇌’가 활성화되며 신호를 전달한다.

2. ‘의지’가 그 신호를 눈치챈다. (하지만 의지는 이 신호가 자신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착각한다.)

3. ‘몸’이 움직인다.

순서는 뇌 -> 의지 -> 행동 순서였다. (뇌 활성화 -> 누르고자 의지 생김 -> 실제 누름)

의지가 생각하기 전부터 뇌는 활성화되었다.

즉 버튼을 누르고자 하는 신호의 시작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리는 의식할 수 없는 뇌 속 의사결정 네트워크였다.

뇌가 먼저 누르자는 판단을 하고 그 신호를 의지에게 전달한 것임에도 우리는 의지가 우리 뇌와 신체를 통제하는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후속 연구는 뇌, 의지, 신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후 이어진 여러 후속연구에서는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 신호를 보낼 때 '뇌->의지->운동신경->행동'과 같은 순서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의지를 담당하는 영역과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에 각각 따로 동시에 신호를 보낸다고 보고한다 (Frith, C. 2005).

즉 의지는 몸을 움직일 거라는 신호의 복사본을 받긴 하지만 다시 그 신호를 직접 몸에 전달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 또한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라는 신호는 중간에 의지를 거치지 않고 뇌에서 해당 신체 신경에 직접 전달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즉 우리 의지는 자신이 몸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의지는 우리 몸의 지배자가 아니다.

먼저 뇌에서 신호가 나오고 나서야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또 행동한다.

사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뇌의 신호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보다 모두 앞선다.

우리가 느끼는 우리가 몸을 조정했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며 가짜이자 착각이다.

실제로는 생각과 몸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했다고 착각하고 주장하는 ‘의지’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내 신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착각을 하고 있는 의지가 과연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출처 : Anil K. Seth (2018, Consciousness: The last 50 years (and the next))


의지가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있지 않음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고 믿기 위해서 의지가 어떤 노력을 하는지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의지는 자신이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고 믿기 위해서 의사결정자가 전달한 명령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든다.

의식할 수 없는 의사결정자의 실제 의도와는 별개로 자신이 접근 가능한 기억을 통해서만 이유를 만들기 때문에 의지는 가끔 우리가 한 행동이나 생각에 대한 엉뚱한 핑계를 댄다.

로저스 패리는 50년대와 60년대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손상된 환자를 연구했다.

좌뇌와 우뇌를 나눠 연구한 과거 뇌 연구에 의하면 이들의 역할은 차이가 있다.

좌뇌는 오른쪽 몸의 운동과 시각을 반대로 우뇌는 왼쪽 몸의 운동과 시각을 담당한다.

거기에 좌뇌는 주로 언어와 논리를 담당한다.

연구에 의하면 뇌량이 끊긴 환자가 양쪽 뇌의 기능을 합쳐 사용하기 어려워하는 장면이 종종 목격된다.

혹은 여전히 뇌의 협업은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의지가 더 이상 의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왼쪽 눈으로만 단어를 보면 오른쪽 뇌로 정보가 들어간다.

이때 뇌량의 장애를 가진 사람은 언어를 담당하는 왼쪽 뇌로의 정보 이동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단어를 봤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피험자는 그 단어를 분명 봤음에도 단어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실험에 과제를 추가하면 ‘의지’가 재밌는 허풍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실험 상황에서 피험자 앞에 물건을 놓고 본 단어에 해당하는 물건을 집어 달라는 과제를 추가한다.

예를 들어 피험자가 사과란 단어를 왼쪽 눈으로 확인한 뒤, 실험자는 피험자에게 앞에 놓인 물건 중에서 왼쪽 눈으로 본 물건을 집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럼 피험자는 자신이 어떤 단어를 봤는지는 모르면서 성공적으로 사과를 집는다.

그리고 왜 사과를 들었냐고 물어보면 실험과 전혀 상관없는 핑계를 댄다.

사과가 먹고 싶어서요, 사과를 어제 봤거든요 등등을 얘기한다.

실제로는 뇌 속에서 의식할 수 없는 다양한 신호들이 요청받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뇌량이 절제되어도 운동과 시각, 계획을 담당하는 전두엽과 두정엽 사이 상호작용이 확인된다.).

하지만 그 정보가 좌뇌까지 갔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지는 일단 질문에 답하고자 적당한 답을 지어낸다.

망설임 없이 이러한 대답을 하는 피험자를 보면 이러한 거짓말이 ‘의식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피험자는 아마 진짜로 자신이 사과를 먹고 싶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피험자(의 의지가)가 의식을 할 수 있든 말든 뇌는 묵묵히 주어진 역할을 해낸다.

단어를 볼 수 있고 본 단어에 대한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그 무엇도 인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의식이 개입했다고 보기에는 빠른 속도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무슨 단어를 봤는지, 그 단어가 무엇이고 왜 사과를 들어야 하는지, 상대방이 묻는 질문에 정말 내 대답이 맞는지 무엇 하나 판단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인지를 할 수는 없지만 과제를 수행할 수 있거나 없는 상황에서 피험자에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물어보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만든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있다.

뇌의 손상으로 신체 왼쪽이 마비되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왼손으로 컵을 들라고 하면 바로 싫다고 대답한다.(Ramachandran. 1996.)

자신이 실제로는 못 드는 상태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그렇게 행동할 의향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뇌가 내리는 더 상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먼저 뇌가 명령을 내리고 나중에 “의지”에게도 그 명령이 온다.

재밌게도 의지는 그 명령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착각하고 심지어 그 착각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고자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나름의 이유도 만들어 낸다.

혹은 아예 처음부터 뇌가 명령과 함께 핑계도 만들어 주고 ‘의지’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만들어 냈다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어떠한 영향 아래에 있는 ‘의지’가 자신만의 생각을 통해서 순수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것이다.     

차라리 진리도 의지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핑계가 아닐까?

평소처럼, 뇌가 주는 불안이라는 신호를 의지가 잘못해석하고 또 여기에 자신이 몸과 마음 그리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지의 근거 없는 믿음이 더해져 진리라는 그럴듯한 허상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진리가 없다는 사실도 유쾌하지 않지만 더 나아가 그 이유가 비합리적인 의지 때문이라는 것은 더 속상하다.


특정 의도를 갖고 생각과 행동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 안의 영혼을 의지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라고 불러온 것은 의도를 갖고 생각과 행동을 온전히 통제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때문에 영혼 혹은 의지는 그 의미를 알맞게 축소시키고자 차라리 단순히 생각과 경험이 인지되는 공간인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거짓된 믿음을 주는 의식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애초에 왜 우리는 의식을 통해 현상을 인지하고 생각을 있는 것일까?

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그저 뇌의 행동과 핑계에 끌려다니는 부산물에 가까울까?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의지가 사실 의식 밖의 영역의 다양한 의사결정과 그것을 향한 의식의 착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뤄볼 것이다.




참조


Anil K. Seth (2018, Consciousness: The last 50 years (and the next))


Frith, C. (2005). The self in action: Lessons from delusions of control. Consciousness and cognition, 14(4), 752-770.


Gazzaniga, M. S. (2005). Forty-five years of split-brain research and still going strong. Nature Reviews Neuroscience, 6(8), 653-659. ISO 690    


Libet, B. / 1983 / Time of conscious intention to act in relation to onset of cerebral activity (readiness-potential). The unconscious initiation of a freely voluntary act / Brain 106 : 623~642


Ramachandran VS, Rogers-Ramachandran D.(1996). Denial of disabilities in anosognosia. Nature. 382(6591):501. doi: 10.1038/382501a0. PMID: 8700222.

이전 08화 진리의 탄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