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실패에서 벗어나 새롭게 삶의 목표에 대한 답을 만들기 위해서 삶의 목표에 대한 답이 가장 이성적인 것이 아닌 가장 본능적인 것에 있다고 보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면 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불확실한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생존 본능은 아주 오래된 생존 지침서를 활용해 우리의 행동을 강력하게 제약한다.
그 제약을 상황에 맞게 해소해 나가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누군가에게는 어색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인간을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법과 생존과 진화의 개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이전 글에서는 인간과 사회를 더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뤘다.
인간 그리고 인간이 모인 사회는 한 가지 강력하고 편향된 의견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양한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 다양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해야 인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그 미래를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이어서 이번 글에서는 생존 본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다양한 행동과 마음에서 어떻게 생존 본능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생존 본능을 이해하고 삶의 목표와 미래 계획을 만드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을까?
복잡한 가치를 모두 덜어내고 더 좋은 삶에 대한 답을 명확히 보여줄 생존 본능에 대해 알아보자.
2016년 봄, 군대에서 봤던 TV속 한 장면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바둑 경기에서 기계가 인간 챔피언을 이긴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늘 하는 생각이지만 조금 다른 맥락이었다.
기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대부분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바둑도 잘하는 똑똑한 기계는 당연히 인간보다 회사 일도 잘할 것이다.
아니 잘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기계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치지 않고 쉼 없이 일할 수 있다.
휴가도 필요 없고 불평불만도 하지 않는다.
기계에게 밀려서 밥 벌어먹고 살 수나 있을까?
전역하고 졸업했을 때, 사회에 더 이상 내 자리가 남아있지 않을 것만 같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관점을 바꿔 조금 더 낙관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 일하고 나라에서는 일하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최소 생활비를 지급해 줄지도 모른다.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이 만족스러울까?
누군가는 꿈꿨던 놀고먹기만 하는 삶이지만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거부감은 단순한 느낌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적게 일하고 많은 여가 시간을 누리지만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불안해한다.
이렇게 삶의 목표를 만들고자 미래를 예측하다 보면 예측된 변화가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곤 한다.
실제로 시간이 흘러 불안이 경고하는 바가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잘 산다고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이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의 불안을 외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좋은 삶의 목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안함이 경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해소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요소가 복잡하게 얽힌 현상 속에서 마음이 경고하는 대상을 더 명확하게 찾을 방법 중 하나는 생존 본능으로 우리 행동과 마음,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해석해 보는 것이다.
우선 우리가 왜 생활 방식의 변화에서 불안을 느끼며 그것이 어떻게 생존 본능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고 지금까지 생존 본능을 통해 문제를 해석하고자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기계가 일해주는 미래를 상상하며 기대감 보다 여러 가지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걱정과 같이 실제로 우리는 현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살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단체 생활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외로워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에 사는 일부 사람은 더 이상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고자 했던 그들의 조상처럼 발견한 음식을 최대한 많이 입에 넣을 필요가 없지만, 여전히 고열량 음식에 참을 수 없는 끌림을 경험하고 그것을 과하게 먹어 비만에 시달린다.
거친 환경에서 시작한 생존과 번영에 대한 고민은 현대의 풍요로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산업과 도시 위주의 삶을 시작한 지 약 300년이나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거친 환경에서 똘똘 뭉쳐 살던 기나긴 경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행동을 변화한 사회에 맞춰 이성적으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냉정한 계산보다 오래된 마음의 끌림을 따라서 행동하는, 생각보다 더 단순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화해도 마음과 행동은 단순하게 한 곳을 바라보면서 작동한다.
마음은 특정한 경향을 갖고 그 마음이 영향으로 특정 생활 방식이 생긴다.
우리 마음이 바라보는 그곳은 무엇일까?
아마 높은 확률로 생존과 번영일 것이다.
우리 모든 행동과 생각을 조절하는 뇌는 정말 대단한 존재이지만 그 역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의식하지 않아도 생명 활동을 이어가고자 작동하는 순환기관, 소화기관, 호흡기관처럼 뇌는 우리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음식을 소화하고, 영양분과 노폐물을 옮기는 일은 보다 직선적이기에 생존과 번영을 향해 일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뇌가 만들어내는 마음과 행동은 매우 복잡하기에 그것이 대부분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생존과 번영 외의 다른 요소도 영향을 주겠지만, 뇌를 포함해 우리를 이루는 모든 기관은 일단 기본적으로 조상이 생존과 번영을 성취하며 물려준 것이다.
환경에 적응한 존재만이 유전자를 남긴다는 이론과 같이 다양한 뇌의 작동 방식 중에서 생존과 번영에 기여한 것만이 이어졌을 것이다.
우리 몸속 생존과 번영을 향한 자동화 기계는 모두 유전자에 기록된 설계도를 따라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전자는 우리 조상이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남고 또 번식했기에 이어질 수 있었다.
다양한 자동화 기계를 가진 조상 중에서 실제로 생존과 번영을 이뤄내지 못한 조상은 자신의 설계도를 후손에게 넘겨주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보면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는 유전자만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때문에 세대를 넘어서 전달되는 생존과 번영의 지침을 따라 설계된 뇌는 의식할 필요 없이 자동으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작동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대부분의 행동을 자신의 의지로 시작하고 통제한다는 감각을 지닌다.
실제로 가끔 우리는 생존을 향한 직선적인 행동을 통제하거나 본능이 아닌 의식이 만들어낸 신념을 따라서 행동하기도 한다.
가끔 의식은 정말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선 자유의지에 대한 글에서 다루었듯 의식은 모든 행동과 생각의 통제자가 아니라 일부에만 관여라고 그 와중에도 항상 의식 밖에서 온 정보와 협업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의식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통제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안다.
이는 평소의 우리 모습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이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냉철한 계산을 통해 행동하지 않고 생존과 본능의 지침서를 따르는 뇌가 주는 느낌을 따라 행동한다.
다이어트를 위해서 평소에 식단관리를 하는 A 씨는 세상에서 제일 달콤해 보이는 한정판 케이크 앞에서 그만 참지 못하고 케이크를 사서 먹어버린다.
눈앞에 있는 달콤한 설탕 덩어리가 현대인에겐 과한 영양분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왜 조절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을 향한 마음의 끌림, 혹은 감정이 행동이 이루어지는데 냉철한 계산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고열량 음식은 과하다는 판단이 나오기 전에 생존 본능을 따르는 의식 밖의 의사결정자가 먼저 움직인다.
오래된 생존 지침을 따르는 생존 본능은 거친 환경 속에서 축복과도 같은 고열량 음식을 우리가 당장이라도 섭취하도록 신호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받은 우리는 눈앞에 놓인 음식에게 참을 수 없는 끌림을 경험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먼저 튀어나온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그것에 끌려다닌다.
이처럼 대부분의 행동은 의식의 냉정한 판단하에 이뤄지지 않는다.
마음의 끌림이나 감정이 먼저 불타오르고 그다음에서야 의식이 대처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저 모호한 느낌을 따라서 판단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냉정한 계산을 통해 움직이기보단 생존과 번영을 위해 뇌가 주는 충동적인 감정에 의해서 움직인다.
혹은 의식 밖에서 행동이 이루어진 후에야 의식적으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감각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마음의 끌림은 때로는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으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우리는 나쁜 느낌을 해소하고자 행동하고 좋은 느낌을 더 느끼고자 행동하게 된다.
즉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는 특정 행동에 기분 좋음을 더 많이 느끼고 따라서 그 행동을 더 적극적으로 한 개체가 살아남았고 유전자를 남겼을 것이며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서 환경이 달라졌음에도 조상과 비슷하게 행동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랜 기간 새로운 환경과 자극에 노출되는 것을 즐겨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 자극을 경험하면 새로운 생존 자원을 찾아낼 수 있기에 이러한 경향은 생존에 유리하다.
그것을 즐기는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유전자를 남겨서 아직도 우리 대부분은 여행을 즐기며 더 나아가 우주나 가상 세계를 여행하고자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혹은 꼭 밖에 나가 활동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기 위해 열심히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물론 사람의 본능과 마음에 이런 진화론적인 해석과 연구를 적용하는 것은 아직 제한적인 부분이 많다.
모든 마음의 작동 방식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아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뇌 안에서 오고 가는 자동적인 감정 신호는 어떠한 학습과정 없이도 발생하고 우리 생각과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유전이 되었고 생존과 번식에 관련이 있을 거라는 설명이 아직까진 가장 설득력 있다.
앞서 다룬 자유 의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 역시 우리의 합리성과 영혼에 대한 과대평가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마음에 대한 진화론적인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다만 하나의 생존 본능이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 결과를 잘 종합해서 극단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행동과 마음이 생존과 번영의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하면 많은 것이 명확해진다.
나 자신의 마음의 끌림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해결될지만 알아도 대부분의 삶의 문제는 훨씬 쉬워진다.
잘 산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이 느끼는 생존과 번영의 위협을 해결하면 된다.
예를 들어 현대인은 혼자서 살아가는 방식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출처를 모를 헛헛함을 경험한다.
헛헛함이나 불쾌한 감각을 해결하기 위해 폭식을 하거나, 자기 계발을 하거나, 모임에 나가거나, 돈을 열심히 벌거나, 종교를 믿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감정의 출처나 해결 방법을 제대로 모르고 행동하기에 가끔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하며 또 자신이 선택한 감정 해소 방법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다.
오래된 생존 본능을 기준으로 현대인의 삶을 바라보면 현대인의 원인 모를 공허함을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이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아주 오랜 기간 인간이 단체 생활을 하면서 생존하고 번영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오랜 생존 지침서를 기준으로 개인 생활이 우리 생존과 번영을 위협한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특정 생활 방식에 어떤 감정이 담기며 어떤 생존과 번영의 지침이 담겨 있는지를 집어낼 수 있다면 잘 산다고 느끼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비교적 명확하게 보인다.
인간에겐 온갖 변화 속에서도 해소해야 될 감정이 있고 그것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삶의 문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다양한 미래 변화를 예측하고 삶의 목표를 만드는 일에도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삶을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이를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신념과 사회, 두 가지가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우선 가끔 우리는 생존과 번영의 경향이 아니라 신념에 더 초점을 맞춰 행동한다.
생존과 번영의 경향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본적이기에 유연하고 포괄적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정해지는데 이때 의식의 환경에 대한 판단과 무리 구성원의 의견이 반영된다.
따라서 생활 방식의 기본 토대는 생존과 번영의 경향이 만들지만 토대 위에 신념과 문화의 영향이 쌓여 구체적인 생활 방식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은 가끔 생존과 번영의 직선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의사결정에 피드백을 준다.
기억이라는 데이터를 토대로 생존과 번영의 지침서를 현재 환경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드백을 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매번 아주 긴 시간을 들여서 계산을 할 수 없기에 기억을 정리해서 몇 가지 행동지침을 만드는데 이것이 신념이다.
환경과 경험이 복잡해질수록 신념도 복잡해지고 생존과 번영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특히 우리는 함께 살며 서로의 신념과 생활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생존과 번영의 흔적은 더욱 희미해져 간다.
사회적인 동물은 생존과 번영의 비법이 담긴 생활 방식을 혼자만 누리지 않는다.
같이 살아남고 같이 번영하면 거친 환경을 이겨낼 확률이 높기에 생존 비법과 생활 방식을 무리의 일원과 공유한다.
생활 방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설득 과정에서 그 생활 방식에 녹아든 다양한 이유나 신념이 뒤엉키며 최초의 생존과 번영의 지침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
오랜 시간 이러한 일이 반복되며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기에 삶의 다양한 문제와 그것을 경고하는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행동과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했고 어떤 경향을 갖는지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의 모든 행동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신호 없이는 일어나지 않고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할 수도 없는 일들은 대부분이 생존과 번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 행동을 분석하면 우리 마음이 바라는 것이 비교적 명확하게 보인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삶의 목표를 만들고자 미래 변화를 예측하며 불안해했던 이유는 생활 방식의 변화가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생활 방식은 지금까지 생존과 번영에 기여했었으며 때문에 마음은 그것이 변화하면 위기를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느껴지는 위기와 불안함의 원인을 생존과 번영에서 찾지 못했다.
통제 환상, 신념, 사회 문화적인 영향이 생활 방식에 반영되며 생존과 마음의 흔적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불편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겪으면서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제는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본능과 마음을 알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현대와 미래의 생활 방식이 생존 본능과 어떻게 어긋나는지 이해하면 해소해야 할 감정이 보인다.
결국 잘 살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생존과 번영을 따르던 마음의 끌림을 해소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마음의 끌림을 상수로 두고 미래에 대응해야 미래에도 잘 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우리의 새로운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미래에도 우리가 원할 것은 잘 바뀌지 않는다.
털 없는 원숭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전의 생존 방식이 주던 마음의 안정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생활 방식의 변화가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지를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고자 한다.
뛰어난 기계, AI의 출현으로 인해 더 이상 판단하지 않고 노동하지 않게 되었을 때의 우리 마음에 대해서 다뤄볼 것이다.
발전한 AI가 우리의 충실한 비서나 혹은 우리의 충실한 노동자가 된다면 우리 마음은 어떠한 영향을 받을까?
변화할 기존의 생활 방식이 어떻게 생존과 번영에 기여했으며 때문에 변화가 우리 마음에 어떤 위험을 줄 것인 지를 다뤄볼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순수하게 생존 본능의 영향만을 구분해 내기 위해서 문화의 영향을 분리해 보고자 한다.
사회적인 동물에게 문화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깊숙이 침투한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특정 시기, 특정 환경에서 분명 생존과 번영에 기여를 했던 문화는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화면서 오히려 우리 생존과 번영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해 때문에 불쾌함을 느끼지만 너무나 당연한 문화가 원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하지 못한다.
불쾌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오며 다양한 가치가 부여되고 너무나 당연해진 사회 문화를 오직 생존과 번영의 기여도로만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수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가 빈번하게 생기는 현대인에게 이러한 문제가 점점 더 쌓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특정 사회 문화가 생존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를 알아보고 그것이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에 다른 생존 본능과 부딪힐 가능성을 알아볼 것이다.
사회,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그것이 특정 시기의 생존과 번영에만 관련이 있다는 근거를 찾아볼 것이며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특히 다양한 문화 중에서 노동하는 기계가 출현했을 때, 여러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능력주의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본능에 대한 이론과 마음에 대한 연구를 활용해 미래의 우리 마음을 예측해 보는 방법이 과연 합리적인지 평가하고 예측한 미래 변화와 마음의 변화를 어떻게 삶의 목표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이다.
기계가 판단해 주는 세상
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맞이할 첫 번째 변화는 우리가 더 이상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의사결정 방법을 고민해 왔다.
정량화된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기도 했으며, 정성적인 데이터에서도 정량화된 데이터를 뽑아내는데 이르렀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 부탁만 하면 알아서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심지어 선택지도 추천해 주는 도구를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이 도구는 자신이 알아서 학습을 하고 역량을 기른다.
엄청난 연산속도로 인터넷상의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학습해 빠른 의사결정을 해준다.
이런 도구가 나온 세상에서 누가 긴 시간을 들여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의사결정을 하려고 할까?
아주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계산기가 발명되었는데 주산을 쓰고 있는 꼴이다.
혁신적인 기술이 출현하고 우리 대부분이 그 기술을 활용할 것이기에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변할 것이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우리가 더 이상 의사결정에 있어서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사결정을 위해 해 오던 많은 일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고 이러한 차이가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기계에게 선택을 맡기고 그들이 제시한 미래만을 따라가서 비이성적인 선택과 도전은 줄고 합리성만 넘쳐나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 마음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기계를 따르기만 한다면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에게 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직접 판단하는 행위가 우리 마음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알아보고 미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해 보자.
-1. 자율성(통제감, 대리감) 침해
우선 우리는 선택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 및 결정하고 행동을 조절할 때, 자율성을 느낀다.
다양한 동기이론은 자율성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매우 강력하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동기이론 중 자기 결정이론을 연구한 Deci, E. L. & Rian, R. M. (1985)은 자율성을 기본욕구로 두고 인간의 확장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라고 하였다.
하지만 늘 더 나은 판단을 해주는 기계에게 판단의 권한을 넘기면서 이 본능적인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느낄 수 있다.
Langer, E. J., & Rodin, J. (1976)의 유명한 양로원 연구는 자율성이 침해가 우리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해당 연구는 자율성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노인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자율적으로 생활하게 하고 한 그룹은 통제 속에서 생활하게 했다.
예상대로 자율성을 갖고 산 그룹의 행복이 더 크다는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후속 연구를 진행하며 두 그룹 간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차이가 나타났다.
통제를 당한 그룹에서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물론 다른 변인을 완전히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꼭 자율성 통제가 수명에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자율성을 빼앗긴 그룹에서 더욱 많은 사망자가 생겼다는 결과는 분명 우리에게 큰 충격과 경고로 다가온다.
본능적인 욕구인 자율성이 훼손당한다면 단순히 불편함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 더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판단하는 기계에게 빼앗긴 자율성은 어떻게 우리 마음과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다양한 추측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자율성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아보자.
자율성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과 주변의 환경을 통제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율성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자율성이 앞서서 다룬 의식의 통제감 혹은 대리감(Sense of agency)과 비슷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통제감이나 대리감은 자신감, 책임감 등에 관여하며 생존에 기여한다.
우선 환경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은 우리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비록 과장되고 비합리적일지라도 통제감은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행동할 근거가 되어 왔고 때문에 우리는 거친 환경 속에서도 기회를 발견해 내며 번영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제감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가시적인 변수 몇 가지만 통제해 내면 환경이나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변수만 가지고 세상의 인과를 해석한다.
예를 들어 면접에서 내가 떨어지고 친구가 붙은 이유는 친구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이라는 변수만 조절한다면 나 역시 성공을 실현시키며 내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뛰어난 능력은 분명 면접에 붙을 확률을 높이긴 하지만 실제로 면접에 붙거나 떨어지는 이유는 면접관이 주관적으로 느낀 인상, 면접관과 면접자의 인간관계 등 보이지 않거나 조절할 수 없는 요소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의 능력을 조절해 환경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실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통제감은 오히려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에 기꺼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노력만 더 한다면 다음 면접의 결과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실패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허점을 찌를 예상치 못한,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모두 경계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행동도 섣불리 하지 못할 것이다.
비합리적인 통제감이 없었다면 아마 인류는 나무늘보 정도만큼만 번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술과 학문이 발달하며 온갖 변수 모두를 고려하는 방식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끝에는 엄청난 데이터를 가지고 온갖 변수를 계산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주는 AI의 출현이 예상된다.
나보다 내 인생과 내 주변 환경을 더 잘 통제할 완벽한 비서의 출현이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긴 하다.
하지만 분명 삶에 대한 자신감은 이전 같지 못할 것이다.
판단을 내려주는 기계의 영향력을 경험하며 우리는 점점 겁쟁이나 나무늘보와 같아질지도 모른다.
또 내가 무언가를 통제해 냈다는 감각은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통제감이 사회적인 동물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했다는 설도 있다 (Haggard, P., and Tsakiris, M. 2009).
통제감은 분업을 하는 사회적 동물에게 그 공과를 명확하게 하고 때문에 사회적인 동물은 책임에 충실하고자 하거나 많은 공을 세우고자 하게 된다.
책임의 충실한 모습이나 더 많은 공을 세우는 모습을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보여주면 해당 사회에서 더 인정받고 번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하는 통제감은 인류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판단하는 기계는 책임의 소재를 모호하게 만든다.
기계가 내려준 판단을 따를 뿐이라면 그 결과의 책임은 기계에게 있을까? 아니면 그 판단을 따른 이에게 있을까?
AI 프로그램을 통해 만든 결과물을 주고받는 팀장과 팀원은 회사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어떻게 평가할까?
이러한 의문과 모호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으나 분명 이는 우리에게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책임 소재가 애매해서 서로를 인정할 근거를 찾기 어려울 수가 있고 결국 회사에서 성과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분배의 기준이 되는 책임소재가 모호해지며 공정함의 기준이 흔들리게 되고 많은 이들이 갈등을 겪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자율성, 통제감, 대리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생존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때문에 우리 마음은 통제감의 부재에 큰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기계가 대신 판단하고 선택해 주는 것은 분명 편리하고 더 효율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와 다르기 때문에 편리하고 효율적인 것을 무조건 최고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남이 제시한 효율적인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조금 모자라더라도 직접 선택하고 나만의 길을 걸을 때 더 만족해한다.
늘 나보다 좋은 판단을 해주는 도구가 있는 세상에서도 자율성을 찾을 방법을 미리 고민해야 한다.
-2. 특별해지고 싶은 인간
AI의 판단을 따르는 삶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된다면 우리는 특별함에 대한 갈증을 느낄 것이다.
인간과 달리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서 늘 최적의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늘 최대의 결괏값을 얻어낼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좋기에 기계가 정해준 삶을 따라서만 산다는 얘기는 마치 디스토피아에 대한 묘사를 듣는 것만 같이 불쾌하다.
불쾌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자율감을 잃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가 부자라면 부자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할까?
아마 아닐 것이고 오히려 모두가 똑같이 부자라면 부자가 되어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다.
무리 지어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해도 무조건 남과 비슷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남과 같으면서도 다르게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특정 무리에 속함을 증명하지 못하고 혼자가 되면 금방 죽는 나약한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리에 속함을 증명하기 위해 주변 개체와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같이 분업을 해왔다.
그래야만 외부 위협에 같이 맞서거나 무리에서 함께 사냥한 고기를 나눠 받으며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도 하다.
우리는 생존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기왕이면 생존을 넘어 번영하고 싶어 한다.
기왕이면 더 많은 고기를 받고 싶다.
기왕이면 무리에서 더 인정받아 많은 것을 누리고 싶고 무리에 계속 남을 수 있다는 안정감을 확실하게 확인받고 싶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무리이지만 내가 더 뛰어남을, 즉 다름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냥 실력이든 다른 분업에서의 실력이든 혹은 그저 외적인 매력이든 그것을 활용해 무리에서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뽐내고 싶어 했다.
조상부터 이어져온 생존 본능의 영향으로 우리는 나 자신이 그 사회에 속하는 평균임을 보여주고 싶어 함과 동시에 내가 그 그룹에서 뛰어난 극단 값이라는 것 또한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 옛날에는 보통 더 뛰어난 신체 능력, 더 뛰어난 자연환경 예측 능력 등 생산성과 직결된 능력만이 자신의 특별함을 뽐낼 수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제는 번영을 고민하는 우리는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극단 값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결국 우리는 가진 신념의 설득력과 차별성으로도 극단 값이 되곤 한다.
현대인은 자신의 특별함을 보여주고자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지향하는 삶을 구체화한다.
자신만의 논리로 남과 다른 것을 믿고 남과 다르게 살아감으로써 특별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채식하는 사람도, 신비한 옷 스타일의 사람도, 부의 축적보다 봉사와 사회 기여에 신경 쓰는 사람도, 희소한 아이템으로 창업하는 패기에 찬 젊은이도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아웃라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한 이들일 뿐이다.
그들은 특별해지고자 최대의 결과를 가장 안전하게 만들어내는 길을 걷지 않는다.
물론 앞선 예시는 조금 극단적인 예시지만, 꼭 예시와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각자의 신념을 갖고 있으며 그 신념을 실천하며 사는 자신이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는 신념과 자아가 공격받는 순간에 마치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받는 것과 같이 절박하고도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AI가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이런 모순적이고도 엉뚱한 생각을 따라잡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특별함과 신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을 활용해서 자신을 설득하는 장면들이다.
비합리성이 나름의 합리성으로 거듭나는 어렵고도 자기중심적인 장면에 기계가 끼어드는 장면은 아직 상상하기 어렵다.
AI가 인간의 이런 비합리적인 마음을 이해해 가끔은 최대 효율을 내는 답이 아닌 이상한 답을 내놓는 배려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AI가 제시하는 합리적인 삶의 공식을 대다수가 따르는 세상에서 답답함을 느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해지고자 AI의 판단을 따르지 않는 일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모두가 전자계산기나 핸드폰을 쓰는데 홀로 주산을 쓰고 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도태됨에 가까운, 안 좋은 방향으로 특별한 모습이다.
자신의 신념에 더 강한 확신을 갖고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면 도태처럼 보이는 남과 다름을 실천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결국 대다수는 특별함에 대한 갈증과 도태됨의 딜레마에서 불편함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AI가 판단해서 제시해 주는 길은 물론 가장 안전할 것이고 가장 좋은 결과를 보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남과 다르게 살며 특별해지고 싶은 인간에게 최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나 똑똑한 AI가 삶의 방향까지 정해주는 미래에서 내 삶의 특별함을 증명할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기계가 일해주는 세상
두 번째 변화는 우리가 더 이상 노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 조상 때부터 아주 긴 시간을 생존하기 위해 노동했다.
노동은 생존에 필수적이며 특히 사회적 동물에게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미덕이다.
하지만 노동은 단순한 생존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에는 인정에 대한 갈망, 더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바람, 에너지를 절약하고 싶은 마음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더 쉽게 더 많은 효과를 낼 더 뛰어난 노동 방법을 고민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 고민은 완전한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미래, 기계라는 완벽한 노예가 우리를 대신해 일할 것이며 우리를 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도 또 우리 본성도 아직 그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우리 마음에게 일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긴 시간 이어진 노동에 적응한 우리는 노동을 통해 마음속 보상을 얻도록 진화했다.
일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보상을 얻을 순 있어도 마음의 보상은 얻지 못하기에 우리는 마냥 행복해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지금 노동을 하는 생활 방식에는 사회, 문화의 영향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회적인 동물은 자신이 사는 환경에 더 알맞은 생존 방법과 신념을 다른 사회 구성원과 공유하는데 그 내용은 문화의 형태로 공유된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서 문화가 정해준 생활 방식은 오히려 생존과 번영을 방해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생산성 개선이 필요한 풍요롭지 않은 환경에서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우리 생존에 기여했다.
긴 시간 능력 개선에 몰두한 결과 우리는 결국 더 풍요로운 사회에 살게 되었지만 능력 이외의 생존 재화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 너무 풍요로워지고 발전한 사회는 더 이상 대다수 인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해당 미래에서는 능력 이외 다른 생존 재화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크게 올라간다.
만약 그러한 미래가 다가오는데도 문화가 남긴 관성의 영향으로 능력만 중요하게 여기고 능력 이외 생존 재화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익숙한 관성에 가려진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좋은 삶을 목표로 한다면, 변화한 환경에 맞는 새로운 생존 방식과 신념을 공유해야 하고 기존의 문화는 그에 맞춰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를 수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회적인 담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내는 일이 어렵기도 하지만 애초에 개인이 자신의 행동이나 신념에서 문화의 영향력을 구분하고 수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우리는 왜인지 모르게 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느끼고 또 문화를 따르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없고 모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애초에 문화를 공유하는 행동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강아지가 별 다른 교육 없이 젖을 물듯이 인간은 별 다른 이유가 없어도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가르치거나 반대로 타인의 행동이나 생각을 모방한다.
때문에 문화를 만들거나 공유하는 과정은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생존과 번영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철저하게 계산하며 만들어진 문화는 거의 없으며 또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의식적인 계산을 통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유전자와 비슷하게 이성적인 계산 없이도 거친 환경에서의 생존에 기여할 수 있다.
의식적인 계산 없이 태어난 다양한 유전자 중 생존과 번영에 기여한 것만 살아남았듯, 다양한 문화 중에서 성공적으로 사회 유지와 발전에 기여한 문화만이 역사에 기록되거나 현재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발현되는 유전자와 달리 문화는 보다 구체적인 생활 방식과 신념을 강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때론 현재 환경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심지어는 불편하기만 한 문화를 따르면서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더 나아가 문화를 따르는 것이 어떤 좋은 의미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전에도 다뤘지만 우리 의식은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이루어진 행동을 자신이 통제했다고 생각하기 위해 나중에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
별생각 없이 문화를 따르는 행동에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일단 타인을 모방하며 문화를 따르고 나중에서야 문화를 따른 자신의 행동을 더욱 정당화하고자 다양한 이유가 붙게 된다.
예를 들어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라는 이유를 붙이거나 군대 가혹 행위 문화에 체계를 확실히 하며 전투력을 올리기 위한 행위라는 이유를 붙인다.
때문에 문화를 따라야만 할 것 같은 느낌과 명분 모두 사실 문화를 따라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느낌과 명분은 우리가 생존 본능과 마주하는 것을 방해한다.
만약 문화와 우리 생존 본능이 지향하는 바가 같다면 별 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특정 환경에만 알맞은 구체적인 생활 방법과 신념이다.
환경이 변화하면 생존과 번영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으며 때문에 이를 경고하고자 생존 본능은 불쾌한 감정을 보낼 것이다.
원인 모를 불쾌한 감정을 해소하며 잘 살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 다양한 대상을 생존 본능의 관점으로 봤듯이 문화 역시 생존 본능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너무나 익숙한 능력주의를 생존 본능의 관점으로 파악하고 기계가 대신 노동해 주는 환경과 능력주의 문화의 공존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일을 대신하는 기계의 출현이 우리 마음과 사회, 문화에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해 보자.
-1. 노동 공동체의 부재로 인한 인정 부재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하는 존재라고 얘기했다.
그의 통찰이 어느 장면에서나 맞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이 단순히 생계유지만을 목적으로 노동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분업과 노동은 배고픔 해소 수단일 뿐만이 아니라 무리에서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무리에서의 인정은 생존에 직결되며 더 나아가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도 해준다.
같이 일할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속할 무리를 찾아냈다는 뜻이며 앞으로의 생존 가능성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성체가 되었는데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리를 위해 할 일을 찾지 못한다면 그 집단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회에 진출할 시기의 청년들은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있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간절하게 자신이 속하고 노동할 무리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무리에 속하고 일을 시작했다고 해서 인정 욕구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더 대단하거나 꼭 필요하다고 인정받는다면 그 집단에서 소외될 가능성은 더 낮아지고 더 많은 양의 공동생산물을 분배받게 된다.
때문에 인간은 같이 일할 일원으로 인정받은 뒤에도 더 인정받고자 더 열심히 일한다.
그 인정이 얼마나 달콤한지 가끔 인간은 자신의 에너지 절약 욕구를 무시하고 자신을 혹사시키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노동을 통한 인정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인정 욕구를 갖고 활발하게 활동한 자들이 생존하고 번식하기 유리했고 그 결과 현대 다수는 조상과 비슷한 마음 구조를 갖게 되었다.
즉 현생 인류는 생존과 번영의 경향이 담긴 유전자의 영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자 일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생산물뿐만이 아니라 인정이 주는 만족을 위해서도 일한다.
어느 날 갑자기 기계 덕분에 일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정 욕구를 해소해 오던 수단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다.
기계가 대신 일하게 되며 기존과 같이 물질적인 보상인 생산물은 분배받지만 마음의 보상인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이 목마름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 빈자리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은퇴한 사람이나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 줄 좋은 직장을 찾지 못해 사회에서 소외된 젊은이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쓸쓸함을 우리 모두가 느낄 날이 올지도 모른다.
노동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 전에 사라질 일터를 대신할 공동체와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인정 욕구를 충족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2. 능력주의와 노동하는 AI, 그리고 우리 마음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늘 힘들다.
우리 조상은 자신을 이끄는 생존본능과 살면서 쌓인 경험을 조합하며 더 좋은 생존 방법을 찾아왔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생존 비결 중 하나는 다른 이와 함께 무리를 지어 사는 것이었다.
다른 이와 무리 지어 살면서 협력하고 때로는 더 좋은 생활 방식과 신념(경험)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혹은 거친 환경 속에서 더 좋은 생활 방식과 신념을 공유한 무리만이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봤을 때, 무리를 성공적으로 생존과 번영으로 이끌었던 중요한 공유 가치 중 하나는 바로 생산성 혹은 능력이었을 것이다.
더 나은 능력을 갖은 자와 함께 하거나, 더 나은 능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거나, 생산성을 개선할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공유한 무리가 더 번영할 수 있었고 주변의 약소 무리를 흡수하며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능력과 생산성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사고방식은 그렇게 긴 기간 우리 생존과 번영에 기여해 왔다.
능력과 생산성을 개선시키고자 했던 기나긴 노력은 현대에 와서 만개했으며 우리는 이제 풍요롭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와 기계가 충분히 발전해서 더 이상 능력을 공유 가치로 갖는 것이 우리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지 못할 수 있다.
오히려 앞으로는 능력만 신경 쓰기에 생기던 문제가 더 심화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미 사회 발전을 위해 참아왔던 마음의 불편함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잘 산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기나긴 시간 함께한 능력주의 문화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절대적으로 보이는 능력주의를 수많은 생존 논리 중 하나로 보기 위해 생존 본능이 어떻게 능력주의 문화를 만들어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추측해 보고자 한다.
역시 생존과 번영의 경향으로 그 과정을 바라볼 것이기에 완벽히 증명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닐 수도 있다.
때문에 비판적으로 참고하며 이러한 추측을 하는 이유가 능력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주면 감사하겠다.
그리고 능력주의 문화에서 우리가 어떤 생활방식이나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왜 기계가 노동하는 환경에 맞지 않는지를 다룰 것이다.
능력주의 신념과 노동하는 기계가 부딪히는 순간 생존 본능이 느끼는 불쾌함이 무엇인지 다루며 가까운 미래에 대응하고자 더 필요한 생존 재화나 더 해소해야 할 감정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능력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우리 신념과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무리 동물은 함께 일 하고 그 결과물을 나누면서 생존한다.
개미에서 인간까지 대부분의 사회적인 동물은 분업을 통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 먹이와 같은 생존 재화를 생산한다.
때문에 함께 일하고 그 결과물을 나눠 받는 일은 결속력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아마 사회 규모가 아주 작고 생존이 급급했던 초기 사회는 특별한 기준 없이 먹이를 나누며 서로의 결속만 확인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사회의 규모, 협력의 규모가 커지며 더 많은 공동 생산물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것을 나누는 방법도 더 중요해졌을 것이다.
이제 막 성장하던 원시 사회에서 먹이 분배 규칙을 정하는데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존재는 아마 생산 기여도가 가장 높은 존재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생산 기여도가 공동 생산물 분배 기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능력에 따른 공동 생산물 차등 분배가 사회 유지,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기에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초기에는 다양한 분배 기준이 제시되었을 것인데 구성원들의 생존과 번영 그리고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방법을 가진 무리는 해체되거나 혹은 다른 무리와의 경쟁에서 도태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성공적으로 구성원과 사회에 기여한 규칙만이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능력에 따른 차등 분배 규칙은 실제로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들며 구성원과 사회에 기여했다.
구체적으로 능력주의는 생산성이 높은 우수한 인재를 해당 사회에 묶어두는 기능을 했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생산성 개선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었다.
더 나아가 해당 사회의 주요 산업이 정해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농사 성과가 좋은 이에게 더 많은 공동 생산물을 분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냥과 채집하는 이보다 농사를 하는 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한 사회의 주요 산업은 해당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경과 기술을 고려해 생산력이 가장 높은 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정한 사회가 더 발전했을 것이고 반대로 생산력이 낮은 산업을 고른 사회는 쇠퇴하며 해체되거나 다른 사회에게 흡수당했을 확률이 높다.
때문에 능력주의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환경을 잘 분석하고 추구해야 할 능력, 분업의 세부 내용을 잘 정한 사회가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렇게 사회를 이루고 또 사회를 발전시켜 온 동물에게 능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큰 범주에서 봤을 때, 역사에 기록된 우리 사회는 늘 능력주의 문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시대마다 생산력에 기여하는 구체적인 가치나 능력이 약간씩 달라졌으며 이러한 차이가 분배 규칙과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농사 노하우가 없고 주로 척박한 땅에 살았기에 주로 수렵을 통해 먹이를 얻었고 따라서 수렵실력이 곧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조금 시간이 흘러 농업 시대에는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자연과 하늘이 우호적으로 보는 인간, 즉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지도자이자 먹이 분배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실제로 자연을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하늘, 신과 관련 있는 자들은 분명 생산성이 개선되는데 기여했다.
사람들은 신, 하늘이 내려준 인간을 믿는 것이 곧 신 혹은 하늘을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을 따르며 더 좋은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신의 사자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으며 때문에 이전보다 사회 규모가 성장할 수 있었다.
사회 규모가 커지고 더 큰 규모의 협력이 이뤄지며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개선되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신을 믿기에 사회 구성원은 상호 신뢰를 확인하는데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을 것이고 덕분에 사회 전체의 안정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미신에서 시작된 신과 종교는 어쨌든 정말로 사회에 기여했고 때문에 농업 시대에는 신과 관련된 상징성이 직접적인 농사 능력보다도 더 중요한 능력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성은 중세시대까지 이어졌다.
근대에 와서는 또 다양한 변화로 인해서 사회가 추구하는 바가 변화하게 되었다.
농사의 생산성이 개선되며 많은 것이 바뀌는데 더 이상 다수의 협력 없이도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성이 개선되며 대다수가 생존을 넘어 더 안락한 삶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또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신 없이도 많은 자연 현상들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종교나 종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사회 유지나 발전, 그리고 생산성 개선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환경이 된 것이다.
때문에 사회에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종교 중심 사회가 서서히 무너졌고 상공업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사회, 새로운 분배 법칙이 등장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협력이 더 중요한 농업과 달리 상공업에서는 개인의 혁신적인 능력이 생산력에 충분히 큰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개인이 가진 다양한 능력이 사회의 기준이 되었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각종 능력, 예를 들어 생산력을 개선할 지식, 생산 체계를 만들어 내는 자본력,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효과적으로 주장하는 정치력 등이 더 좋은 지위에서 더 많은 생산물을 받아야 하는 기준으로 새롭게 설정되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공동 생산물 분배 기준은 보다 직접적인 능력이 되었다.
심지어 기술이 발전하며 우수한 능력을 가진 인적 자원은 사회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현대에서 능력은 더 강력한 기준이 되었다.
물론 이전보다 능력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에는 변화를 이끌었던 혁명자들이 이미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은 핏줄이나 상징성을 중요시 여기던 이전의 규칙에 대한 반발이 작용해서 능력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양한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국 현대인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능력주의는 오랜 기간,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 왔고 우리 사회의 질서였다.
긴 시간 이어진 능력주의는 우리 신념이나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능력주의에 적응하며 능력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현대 능력주의 문화에서 우리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능력에 너무 큰 비중을 둔다.
또 과거에 비해 현대 능력의 생산성이 엄청나게 뛰어나기 때문에 능력을 마치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만 같이 여긴다.
문화와 기술발전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러한 집중 투자가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 과도한 집중 때문에 위험이 너무나 커졌다.
기술이 더욱 발전하며 우리의 능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온다면, 존재 가치를 능력으로 평가하던 관성은 나와 타인의 가치를 해칠 것이고 능력에만 집중해서 인간관계를 경시하던 관성은 우리를 외로움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사회와 그 영향을 받은 우리 신념은 미래 변화와 부딪혀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그 결과 우리 마음이 불편해질 수 있다.
변화에 맞춰 개인의 신념을 수정하고 또 신념에 영향을 준 사회, 문화를 수정하기 위한 담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능력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은 사고방식이 미래 변화와 만나 어떤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뤄보자.
기술, 인프라가 발전하며 순수한 인간의 능력(기여도)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와 우리 사회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능력에 너무나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
아직까지 아주 큰 문제는 없지만 특정 직업이 완전히 대체되는 등, 능력의 축소가 가시화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존재 가치를 능력에서 찾는 관성을 수정하지 못한다면 미래에 직업을 잃고 능력을 부정당할 대다수가 큰 상실감과 불안감을 겪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이미 그러한 문제가 조금씩 발생하고 있다.
기계의 발전으로 공동 생산에 기계나 인프라가 기여하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공동 생산에 참여한 개개인의 기여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대다수의 기여도가 애매한 상황 속에서 기여도가 비교적 명확한 소수의 능력이 더욱 눈에 띄게 된다.
이 때문에 기여도나 능력이 명확히 구분되는 소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쓸모없는 존재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가시적인 능력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위기를 감지한 현대인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모두가 의사, 법 전문가, 프로그래머, 자본가, 인플루언서 등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능력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것을 획득해 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쉽게 대체당하지 않도록 사다리를 걷어 차고 반대로 그것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잡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격렬하게 적대하기도 한다.
능력의 부정이 격렬한 저항과 사회 갈등까지 이어지는 것은 사회적인 동물에게 그만큼 존재 가치 부정이 불쾌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사회에서 쫓겨나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 본능은 치명적인 상황을 감지하고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불쾌한 경고 신호를 준다.
그 신호는 마치 종교 사회에서 신에게 파면당하거나 수렵 사회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신체 부위를 잃었을 때와 같은 느낌일 것이다.
혹은 회사에서 잘리거나 은퇴했을 때의 불쾌한 느낌을 생각해 보면 능력의 부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가까운 미래, 기계가 우리 직업, 능력을 완전히 대체하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우리 모두가 존재의 부정에서 오는 공포감, 상실감,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과 비슷하면서도 더 격화된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기계에 대체당한 직업군은 고통 속에서 격렬하게 항의할 것이고 반대로 아직은 대체당하지 않은 직업군은 두려움 속에서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각각의 입장이 반대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가끔 서로를 향해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른다.
미래 변화에 맞게 우리 존재 가치를 다른 곳에서 찾아낼 방법을 찾고 그에 알맞은 문화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 부정의 고통과 사회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한동안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또 능력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타인과의 교류와 같은 생존 본능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놓칠 수 있다.
사회,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평균적인 능력 역시 고도화된다.
아주 옛날에는 초등 교육 수준만 받아도 일할 수 있었겠지만 선진국에 사는 현대인은 고등교육 초입인 대학도 모자라서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따고서 직장에 진출하곤 한다.
그만큼 능력을 개발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 때문에 다른 활동에 투자되는 시간은 적어진다.
또 어렵게 학위를 따내 인정받은 능력은 더욱 소중해지고 능력을 증명할 커리어 역시 더욱 중요해진다.
때문에 현대인은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고 또 일한다.
자연스럽게 능력의 개발과 증명만이 생존에 필요하단 생각이 생기고 반대로 생산성 없는 행위가 가치 없다는 생각이 생긴다.
만약 서로의 이를 잡아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침팬지가 자신과 비슷한 영장류가 이렇게나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본다면 매우 놀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안의 생존 본능이 느끼는바 역시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생존에 필요한 인정과 돈을 가져다주기에 현대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능력을 증명하는데 쓰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허전함을 느낀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친구들과 모여서 서로 털을 가꿔주던 일이 그립기만 하다.
만약 기계가 우리 능력을 대체하며 일터와 인정까지 사라진다면 우리는 더욱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오직 능력만을 생존의 핵심으로 여기고 그것에만 시간을 투자해 왔던 관성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조차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능력 없는 이와 교류하며 시간을 버릴 바엔 그냥 기계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최근에 실제로 우리가 고립되어 살아가는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우리는 한동안 고립되어 살아갔다.
우리는 고립된 상태에서 살아남았고, 현대인의 대단한 능력은 인간이 더 이상 뭉쳐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진보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생존과 별개로 현대인의 마음은 매우 힘들어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글로벌 마케팅 그룹 Ipsos의 보고서 'Global Perceptions of the Impact of Covid-19'를 보면 코로나 유행으로 외로움과 우울함이 증가했다는 통계를 확인할 수 있다.
Ipsos는 코로나 유행 초기에 29개국을 대상으로 코로나 19의 영향력을 조사했는데 그중 지난 6개월간 외로움이 더 증가했냐는 질문에는 전 세계적으로 41%나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람 없이도 생존할 수는 있다고 해도 그렇게 얻은 삶이 외로움과 우울함으로 가득 찼다면 우리가 바라는 삶이 될 수는 없다.
오랜 기간 협력과 분업을 해온 결과 우리는 냉정한 계산뿐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필요로도 타인과 함께 하게 되었다.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미리 이웃과 친구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만약 기계 일꾼과 기계 가정부가 손가락 까딱하지 않아도 필요한 일을 모두 해주는 시대가 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타인을 찾게 될까?
지금처럼 능력, 생산성과 관련 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을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때까지 남아있다면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직장과 교육 기관까지 축소되거나 사라져 더욱 고립되기 쉬운 미래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과 생존 본능이 원하는 바에 다시 한번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무리를 이루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왔다.
더 잘살고 싶다는 마음에 다 같이 더 나은 능력을 추구하기로 했고 능력에 따라서 서로를 차등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더욱 번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인정하는데 능력이라는 조건을 걸고 살아온 날이 너무 길어지면서 조건 없이 나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법을 점점 잊게 되었다.
현대인은 가끔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오직 능력으로만 계산한다.
또 능력에만 몰두하느라 다른 가치를 경시한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 우리보다 뛰어난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 일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능력 대부분은 부정당할 것이다.
이 미래가 올 때까지 능력을 향한 사회의 위험한 집중투자가 이어진다면 우리는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소중한 능력을 부정당하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겪을 것이다.
그러한 공포와 상실감 때문에 사회가 능력을 빼앗기기 싫은 이와 사라진 능력을 되찾고 싶은 이로 나뉘어 대립할 수도 있다.
또 능력에만 몰두하느라 타인과의 보내는 시간을 경시했던 관성은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 수도 있다.
긴 시간 이어진 사회, 문화는 우리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갖게 만들었고 이는 생존과 번영에 기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화하며 우리 생존 본능, 마음과 부딪히는 부분도 생겼을 것이다.
불편함이 커지며 다양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기존의 사회, 문화, 사고방식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문화를 내려놓고 새로운 환경을 분석해야 하고 무엇보다 미래에서도 잘 살아간다고 느끼기 위해 우리의 마음속 가장 원초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축복하며 서로 함께하는 것만으로 기뻐했던, 마음이 간직해 온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가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 뇌는 오래된 생존 지침서를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고 평가 결과는 느낌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결국 잘 산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느낌의 기준이 되는 생존과 번영의 지침서를 공략할 수밖에 없다.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끌림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를 알아낸다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낼 수 있다.
내 감정과 행동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그들을 생존과 번영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을 현명하게 해소할 방법이 보이기 때문이다.
생존 본능과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며 삶의 목표를 만들 때 역시 유용하다.
미래에는 생활 방식을 포함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지금과 달리 더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 우리를 귀찮게 했던 많은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생활 방식에는 생존과 번영의 경향이 담겨있기에 기존의 생활 방식으로 해소했던 수많은 마음의 끌림이 제 갈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뇌는 발전한 기계가 우리 대신 일하고 의사결정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만의 인생을 구축해나가지 못한다는 판단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큰 불안 신호를 계속해서 보낼 것이다.
과거에는 직접 일하지 않고 의사결정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론 사회의 관성과 미래의 변화가 충돌해 우리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고 또 우리로 하여금 능력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만든 능력주의는 기계가 일하는 미래와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가까운 미래에 기계가 우리 능력을 가져가게 된다면 능력주의로 인한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큰 상실감이나 두려움을 줄 수 있고 또 우리를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
장밋빛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에 우리가 실제론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해 보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어떤 관성이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다양한 미래 변화에도 본능적으로 느낄 욕구와 감정은 여전할 것이다.
좋은 삶의 목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를 유념하며 다양한 미래 변화를 예측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생존 본능이 삶의 목표에 큰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생존 본능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활용할지를 알아봤다.
세 가지 얘기를 하고자 했는데, 우선 앞서서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복잡한 인간과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음을 얘기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몇몇 본능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고치기 어려우며 그 영향이 매우 강력함을 얘기했다.
삶의 목표를 상상하며 그려볼 미래에도 높은 확률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생존 본능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목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인간에 관한 과학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주의할 점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생존 본능과 인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는 과학 연구는 분명 삶의 목표를 만드는 데 귀중한 자료이긴 하나 활용하기 전에 명심해야 할 점들이 있다.
다음은 심리학 혹은 과학을 인생에 적용하는데 조심해야 할 점을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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