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표에 생존 도구라는 기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답을 찾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해왔다.
성공, 평범한 삶, 행복, 철학 그리고 진리까지 많은 삶의 목표를 좇고 또 좌절했다.
하지만 애초에 가장 우월한 삶의 목표 하나를 찾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
진리는 허상이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목표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삶의 목표를 위해 한 시도들이 올바르진 않았어도 그것과 별개로 삶의 목표는 분명 다양한 쓸모가 있다.
삶의 목표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 삶의 목표라는 자기만의 기준은 자유로운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삶의 목표 없이 삶이 주는 불안에 대처하다 보면 타인에게 이용당하거나 무기력함을 겪게 된다.
삶의 목표가 여전히 필요하단 것을 알았고 한편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함을 알았다.
이제부터는 그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이전처럼 가장 우월한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진리의 빈자리에 성공, 행복과 같은 가치 하나를 넣는 것은 옳지 않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든 가장 좋은 답이 될 삶의 목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불안을 해소시키고 원하는 미래를 마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답은 없다.
다만 우리 이성, 의식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있지도 않은 삶의 목표를 좇아왔기에 우리는 삶의 목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삶의 목표에 더 알맞을 접근 방식을 찾아보고자 처음으로 돌아가 삶의 목표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순간, 옳은 길로 연결되는 만능의 답이 없다면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야 한다.
애초에 삶의 목표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일까?
이런 질문에 많은 이들이 각각 자기만의 답을 던질 것이다.
토론이라면 그럴듯한 답에 다가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플라톤이 나타난 뒤 2,500년 정도가 흐른 지금 우리는 이미 진리 혹은 이데아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 질문에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정말 중요한 것이 누군가에겐 중요하지 않다.
살아온 환경과 타고난 기질이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제는 수많은 주관적인 주장을 비교하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을 찾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반대로 가장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에 접근해야 한다.
다양한 주장 속에서도 공통된 부분은 무엇일까?
어떤 공통적인 이유로 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매달리고 있을까?
각 주장의 주관적일 수 있는 부분을 모두 깎아버리면 결국 삶의 목표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주장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삶의 목표는 결국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삶의 목표는 생존과 번영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예를 들어 당장의 배고픔이 문제인 가난한 나라에서는 일단 굶어 죽을 걱정이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한편 부유한 나라에서는 어떤 직업을 가져도 굶어 죽을 일은 없기에 물질적인 목표를 넘어 정신적인 만족을 삶의 목표로 갖는다.
두 나라의 차이는 생존 환경의 차이로 '잘 사는 것'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다.
가난한 나라에서 잘 사는 것은 말 그대로 굶어 죽지 않는 것이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굶어 죽을 일이 없기에 그다음을 고민하다가 일반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한 삶이나 정신적인 만족을 키우고자 노력하는 삶을 잘 사는 것의 기준으로 잡는다.
굶어 죽을 걱정이 없다고 해도 생존과 번영의 욕구 혹은 긴장은 끝나지 않기에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도 끝나지 않는다.
둘의 차이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삶의 목표는 잘 살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환경이든 혹은 어떤 성격 차이를 갖든 결국 잘 살아남고자 하는 필연적인 고민이 삶의 목표를 만드는 동기가 된다.
생존 본능이 바로 삶의 목표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비약적일지도 모른다.
생존 본능이 삶의 목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감정과 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면 이들의 관계가 더 명확해진다.
감정 혹은 느낌은 의식이 행동의 동기로 여기는 정보로 의식 밖에서 이루어진 행동을 의식이 납득하게끔 하는 단서가 된다.
혹은 상대적으로 의식의 영향이 큰 행동의 동기가 되곤 한다.
의식의 영향이 더 큰 행동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서 감정의 역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생존 본능에 충실한 뇌 속 다양한 요소는 의식에게 생존을 위한 지침으로서 감정을 내려주고 의식은 그 감정을 해소하거나 더 추구하기 위해서 행동하게 된다.
이처럼 의식에게 전달되는 다양한 감정은 대부분 위험과 보상에 관한 정보를 내포하며 결과적으로 생존과 번영을 위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생존을 위한 지침이다.
예를 들어 결핍이나 갈망은 예상되는 보상을 앞두고 발생하며, 행복은 보상을 성공적으로 획득했을 때 발생한다.
반대로 예상되는 위험에 대비하라는 신호로 불안이 만들어지고 의식에게 전달된다.
감정을 경험한 의식은 행복의 쾌감을 다시 느끼고자 다음 행동을 계획하게 되며 불안의 불쾌함을 해소하고자 다음 행동을 계획하게 된다.
이와 같이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의식 밖 요소가 전해준 감정은 가끔 의식을 거쳐서 생존과 번영을 향한 계획이나 행동이 된다.
실제로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느낌이나 설명할 수 없는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우린 고민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고등적인 인지 활동의 결과인 줄만 알았던 삶에 관한 계획 활동의 시작점은 선명하게 의식할 수도 없는 좋거나 나쁜 느낌이다.
그래서 의식적인 계획과 행동은 가끔 엉성하다.
의식 밖 요소가 만든 위험과 보상에 관한 신호는 경험적인 정보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적지는 않지만 충분하지 않은 정보로 만들어지는 신호와 그것을 동기 삼아 만든 계획과 행동은 가끔 비합리적이다.
만약 우리 이성이 느낌을 만드는 의식 밖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히 합리적인 계획과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보면 인간적이지 않은 철저하게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한 계획과 행동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의사 결정은 그 정도로 합리적이지 않다.
비록 그것이 가장 올바른 의사결정 방법, 계획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해도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너무나 오랜 기간, 감정이나 느낌이 나아갈 바를 정하고 의식이 그 길을 구체화하는 방식만으로도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존을 추구하는 본능의 영향을 받아 감정을 통해 신체와 의식에게 명령을 내리는 뇌 속 여러 의사결정자, 그 명령을 받아 다양한 정보를 생산하는 의식의 협업은 아주 긴 시간 생존에 있어서 유효했다.
그래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인 현대에서도 그들의 협업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삶의 목표는 생존 본능이 자신만의 언어인 느낌 혹은 감정을 통해 우리 의식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시작된다.
사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은 사실 우리 안에 존재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주 긴 기간 우리와 함께 했기에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은 생존 본능이다.
그리고 변하지 않을 무언가가 우리의 삶을 늘 성공과 만족으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생존 본능은 미래에도 행복 추구와 불안 해소를 변함없이 요구하며 우리 행동을 제약할 것이다.
도달하기만 하면 무조건 잘 살게 되는 부동의 진리를 좇는 일을 관두고 부동의 본능적인 욕구와 불안을 현명하게 해결하며 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게 삶의 목표에 대한 진정한 접근법이다.
거창한 것들을 덜어내면 우리는 여전히 생존과 번식이 목표인 그저 털이 좀 없는 원숭이다.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과거 우리가 삶의 목표를 찾고자 노력했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좇아 왔던 다양한 삶의 목표는 그것이 어떤 가치든 결국 생존 혹은 번영에 기여하는 무언가이었기에 추구했다.
물론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 것은 아니며 감정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유도한 것이다.
우리는 보통 행복과 평안함을 주는 대상을 삶의 목표로서 설정하고 추구했다.
목표를 성취했을 때 따라오는 각종 보상은 행복을 주고 반대로 목표에서 멀어질 때마다 불안이 우리를 채찍질한다.
예를 들어 평균적인 삶에 도달하면 소속감과 같은 좋은 느낌을 느낄 수 있기에 앞으로도 계속 내가 속한 사회의 주류와 같이 살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반대로 실업 등으로 평균적인 삶에 멀어지면 소외감과 같은 불쾌한 느낌을 느껴서 평균적인 삶에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이처럼 삶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우리는 결국 느낌과 감정을 좇았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과 번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 혹은 감정을 주는 가치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길을 잃곤 했다.
한 가지 가치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생존 자원을 놓쳐 생존과 번영에서 오히려 멀어졌거나 마땅히 추구할 좋은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지며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방해했다.
감정이란 신호가 너무 강력하기에 행복이나 불안, 혹은 그것을 주는 가치가 그 자체만으로 목적지처럼 보이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수단이다.
당연히 행복을 주거나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다양한 가치 또한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수단이다.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목표로 해왔던 것들은 생존과 번영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에 가기 위한 수단이다.
다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고 보이는 가치와 느껴지는 감정만 믿어왔다.
누군가는 인간이 생존을 넘어 가치를 추구하기에 인간은 원숭이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며 이러한 의견에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특정 가치가 얼마나 숭고한 지를 복잡한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어느 역사든 어느 동물이든 모두 빠짐없이 적용되는 단순한 생존과 번영에 대한 얘기에서 벗어나 플라톤부터 세면 대략 2,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인간이 만든 상상의 세계에서 나오는 이론들을 활용하려면 아주 복잡한 전제조건이 깔리기 시작한다.
보다 불필요한 전제조건이 적을수록 논증이 타당하다는 오컴의 면도날 얘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또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떤 방식이 삶에 관한 답을 찾는 것을 오히려 방해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무엇이 더 나은 지 알 수 있다.
삶의 목표가 결국 생존신호에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하면 많은 것이 더 명확해진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같은 고민은 결국 잘살고자 하는 고민들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이 되는가? 에 대한 답은 성공, 행복, 진리와 같은 어떤 우월한 가치를 일관성 있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마다 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에게 상황에 따라 조언을 해주는 잔소리꾼이 있긴 하다.
뇌는 상황마다 감정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준다.
그것이 곧 늘 정답은 아니지만 뇌가 주는 감정을 해소시켜 줘야 못 살고 있다는 경고에 가까운 감정을 해소할 수 있고 잘 살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운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매번 최대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뇌의 요구를 해소시켜 주면 최대한 잘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뇌의 요구를 만족시켜 준다면 이후 느껴지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서 더욱 생명력 있게 살아갈 확률이 높다.
무조건 감정과 본능에만 충실해서 살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의 똑똑한 의식은 분명 뇌의 요구를 상황에 따라서 더 알맞게 해소시켜 줄 능력이 있다.
또한 의식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통제권을 매번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를 원한다.
결국 뇌에게 받은 생존 신호와 소통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식하고 그 신호를 최대한 현명하게 해소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곧 삶의 목표이다.
이런 방식으로 삶의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동물로서 어떤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발동하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발생시키고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뇌와 본능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왜 사는가? 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뇌 속 생존 본능은 왜 의식이 삶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드는가? 를 고민해야 감정을 주는 뇌를 만족시킬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이외에도 삶에 목표를 만드는 데 유용하다.
자신이라는 인간을 더욱 잘 알 수 있으면 그에 맞게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설계할 수 있다.
불안에는 얼마나 민감한지, 어떤 생존자원을 얼마만큼 추구하는지 등을 알면 그에 맞게 나만의 삶의 목표를 짤 수 있다.
인간만이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담백하게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답이 없어 보였던 문제를 조금씩 풀어갈 수 있다.
인간의 관한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삶의 목표를 찾는데 더 나은 길을 제시하긴 하지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과학 연구는 진리이자 유일한 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몇몇 연구 결과를 활용해 인간이 본능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결론짓거나 안 좋은 유전자로 태어나면 인생이 망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섣부르다.
과학 연구는 단지 확률을 알려줄 뿐이며 또한 후속 연구를 통해서 언제나 상반되는 연구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때문에 과학 연구 역시 비판적인 해석을 통해서 활용해야 한다.
이를 유의하며 사용한다면 과학은 분명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일 것이다.
반면 과학을 제외한 주관적인 지식은 그 내용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더욱 까다롭다.
과학에 비해 일부 철학이나 깨달음 등의 주관적인 지식은 상대적으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가치 판단이 명확하게 들어가 있다.
보통 이러한 지식에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제작자만의 기준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그 지식을 수용하는 사람은 편견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주관적인 주장을 최대한 합리화시키고자 다양한 가정을 만드는데, 때문에 지식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그래서 어디에든 잘 끼워 맞춰지기 때문에 더 그럴듯해 보인다.
예를 들어 분노를 억제하는 게 선이라는 주장과 그 안에 아주 복잡하게 구성된 이론체계는 실재하는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선’이라는 것을 전제하며 분노를 이해하고자 찾아온 우리를 다시 선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복잡한 미궁 속에 빠뜨린다.
하지만 인간에 관한 과학은 분노가 공정함에 대한 주장임을 설명하며 그 감정이 왜 시작되었는지를 추측하고 그 용도를 알려줄 뿐이다.
그 감정을 느끼는 상황과 나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도록만 돕고 다음 판단은 우리에게 맡긴다.
이 때문에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하는 데 있어서 주관적인 지식보다는 과학이 낫다.
과학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도 어려운데 주관적인 지식은 복잡한 세계관과 타인이 만든 기준을 제시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애초에 인간의 변화무쌍한 무지개 같은 삶에서 선이니 악이니, 신이니 악마니, 정치색이 어쩌니 하며 한 가지 색으로 무언가를 색칠하고 판단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 이를 알고 다른 생물을 파악할 때는 최대한 가치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동물 백과사전을 봐보자.
우리가 무언가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 어떤 지향점을 얘기한 적이 있는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파악할 때는 그들의 모든 행동과 형태에서 나름의 쓰임새를 찾아낸다.
그것이 그 생물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란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통찰에서 나온 몇몇 주관적인 지식은 멀쩡한 인간의 행동의 일부를 해서는 안 될 것과 해야만 할 것으로 나눈다.
선을 주장하는 지식은 사회 구성원이 지향해야 할 바를 주관적으로 규정한 내용에 가까우며 그것으론 하나의 인간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주관적이라고 해도 타인이 수고를 들여서 만들어낸 지식체계는 분명 매력적이긴 하다.
무리 동물인 인간의 역사 깊은 생존 노하우 중 하나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고민을 하고 있는 만큼 그 답을 만드는 데 있어서 치열한 의심과 분석 없이 쉽게도 타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따라가는 것은 옳지 않다.
삶의 목표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도구는 누군가의 편향되고도 비합리적인 주장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돕는 인간이란 동물에 관한 과학적인 설명서이다.
선과 악은 그저 지각된 내집단에 따른 주관적인 인식이다. (사진출처 : pixabay / 노트르담성당 정문)
한편 생존, 과학 등으로 삶의 목표에 접근하는 것은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바꿔야 할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기준을 주기도 한다.
반대로 삶의 목표를 찾고자 타인이 제시하는 가장 우월한 주관적인 가치를 시도해 보고 포기하고 다시 새로운 가치를 찾는 과정을 반복하는 방법은 매번 어떠한 기준도 없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기 때문에 삶의 목표를 찾는 과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살다 보면 삶의 목표나 신념을 위협받고 그것을 수정해야 할 일이 빈번하게 생기기 때문에 후자의 방식으로 삶의 목표를 만들고 살아가는 일은 더욱 어렵다.
살면서 어떤 우월한 가치를 삶의 목표로 추구하든 실패와 신념의 충돌로 인해 내가 가진 목표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의 목표는 끝없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 중심에 생존 본능이라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생존 본능이라는 기준은 실패를 겪고 삶의 목표를 수정하는 순간에 우리의 길잡이가 돼 준다.
반면에 이런 기준이 없다면 특별한 근거 없이 삶의 목표를 성공에서 행복으로 행복에서 철학으로 옮겨가는 삶의 목표에 대한 잘못된 접근을 할 것이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가다가 길이 끊겨도 제대로 다른 루트를 만들 수 있다.
기존의 삶의 목표가 부정당했다고 해도 계속해서 길을 알려줄, 바뀌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다.
결국 목적지는 잘 사는 것이며 나만의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에는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나만의 개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로움에 취약한 A 씨가 사업하며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삶의 목표를 사람 좋은 사업가에서 사람을 믿지 않고 숫자만 믿는, 냉혹하지만 성공한 사업가로 바꾸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인간관계를 후순위로 두다 보면 행복을 느끼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지만 특히 A 씨의 경우에는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개성이 있기에 잘 산다는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전의 실패를 극단적으로 해석해 인간을 믿지 않고 자신을 고립시켜 외로움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A 씨는 냉혹한 사업가로서 성공해도 잘 산다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가다가 길이 끊겼으면 잠시 멈춰 서서 목적지를 알려주는 다양한 기준을 참고하며 그 기준에 부합하는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이 맞다.
가다가 길이 끊겼을 때 아무런 기준 없이 무작정 잘 포장된 또 다른 도로를 찾아 걷는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원하는 바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인간을 하나의 동물로 보고, 삶의 목표를 하나의 생존도구로 보고 접근하면 드디어 복잡하게 얽힌 각종 가치에서 벗어나 삶의 목표를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심리학, 생물학과 같은 인간에 대한 과학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려줘 이러한 접근을 하는데 도와준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시점으로 인간과 삶의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 어색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 접근 방식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때문에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어떤 삶의 목표를 만들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삶의 목표를 생존 도구로 바라보고 인간을 과학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하고자 한다.
우선 새롭게 삶의 목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사회를 과학을 통해서 올바르게 이해해야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맞춰서 알맞은 삶의 목표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인간의 특성에 대해서 너무 다양한, 때로는 상반된 의견을 내는 연구 결과들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궁금할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과학 지식을 어떻게 취합해야 우리 자신과 사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먼저 다루고자 한다.
인간의 가능성과 그 미래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정리하며 올바른 이해에 접근하는 과정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쉽게 변하지 않는 마음과 생존 본능에 대해서 더 다루고자 한다.
아직 특정 상황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 특정 생존 본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생존 본능에 대한 다양한 의문에 답해보기 위해 인간의 삶을 크게 바꿔 놓을 미래 변화를 가정하고 그 속에서 마음과 생존 본능의 반응을 그려볼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생존 본능이 왜 강력하다고 여겨지는지, 마음의 반응이 생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미래 변화에 대해 본능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며 이를 미리 안다면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지 등을 생각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에 관한 과학을 활용하는데 조심할 점을 다루고자 한다.
인간에 관한 과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할 지식을 주고 우리는 그를 바탕으로 삶의 목표를 만든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섣부른 결론을 내리며 연구를 잘 못 해석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연구를 해석할 때 흔히 하는 오해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 생존과 진화에 대한 개념과 인간에 관한 과학에 익숙해졌다면 구체적으로 삶의 목표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우선 다음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주장을 어떻게 활용해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인간의 미래, 즉 가능성에 대한 과학의 상반된 주장을 살펴보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가능성은 유한할까? 무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