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여행
일과 후 여행이 있다면, 일과 전 여행도 있다. 영주로 향한 길은 갑작스럽고 서두른 발걸음이었다. 사장동생과 동료들은 이미 영주에 숙소를 잡고 있었고, 일은 내일 시작된다. 계절과 날씨, 숙소와 경비, 기분과 상황까지 따지다 결국 오지 않은 미래처럼 여행은 언제나 까다로웠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숙소는 이미 있고 날도 좋고 아직 해는 한참 남았으며 지방일도 지겨워지고 있었지만, 영주에는 전부터 가고 싶었던 부석사가 있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헌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그리 멀고 멀 줄이야. 이도 욕심 때문이었다.
20241028.
인삼과 모시로 유명한 풍기역에서 내렸다. 느낌이 좋은 곳은 땅에 발을 디디딜 때부터 사뿐하면서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날은 흐렸지만 외려 걷기 좋은 빛이었고, 공기는 상쾌하기까지 했다. 곧 도착할 버스를 바로 잡아타고 부석사로 갔다면 여정은 순조로웠겠지만, 역 앞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유혹이 있었다.
1899년 경인선 증기기관차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이래 1967년에 정기선이 폐지된 후, 모습부터 파란만장한 증기기관차 901호는 중국에서 1994년에 관광용으로 도입되어, 2000년까지 서울-의정부 구간을 관광용으로 운행했다. 이후 점촌역 체험학습장에 있다, 풍기역 앞에 전시되었다. [은하철도 999]나 [폴라익스프레스]의 기차와 닮아 기관차가 내달리는 상상의 시간마저 좋았고, 녹이 슬고 관리하고 있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세월이 안겨주는 낡은 느낌 자체로도 좋았다. 애니메이션의 그 기차들도 어딘가 남아있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기관차 내부의 왼쪽에 운전석이 있었는데 거대한 철마에 비해 비좁아 기관사들이 애환이 느껴졌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시계마저 좋지 않은, 저 작은 창을 보며 기관사들은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이곳에서도 빵지순례는 예외가 아니었다. 금선정으로 가는 길에, 영주에서 유명한 정도너츠 본점이 있었지만 월요일 휴무라 먹을 수 없었다. 이틀 후 결국 먹게 되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었다. 대신 커피라도 마시려 인근 카페에 들어갔지만, 주인은 보이지 않아 일단 금선정으로 향했다.
길은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몇 킬로 걸어 금선정에 도착했지만, 가는 길보다 못했다. 어느 동네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정자였고, 그 앞을 흐르는 계곡이 있다고 해서 특별한 감성을 던져주지도 못했다. 입구는 사유물이라며 출입제한 팻말이 달려 있어, 그 안으로 들어서는 것조차 저어했다. 괜히 왔다는 푸념과 함께 괜한 욕심이 자초한 지연이었다. 이런 실망은 여행에서 다반사이니 역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순간에 숨어있으니.
한참을 걸어선지 선선한 날씨에도 목이 타기 시작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가게 하나 없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동양대까지 또 몇 킬로를 가야 한다. 주위에는 사과 밭과 인삼밭이 지천에 깔려 있었는데, 아직도 주렁주렁 달린 빨간 사과의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기만 하면 갈증을 씻어줄 거라며 내 입맛을 자극했고, 그래야 갈 수 있을 거라고 예언하는 듯했다. 마침 사과를 따던 노부부가 보였다. 아저씨에게 사과를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뭐 하는 사람이냐고 동문서답을 했다. 아저씨는 귀가 좋지 않았다. 아줌마가 다가와 파는 것이 아니라며 상태가 좋지 않은 사과를 두 개 주었다. 쌀쌀해질수록 사과는 꿀맛으로 변해있었다. 실망스러운 발걸음에 부처 같은 썩은 사과였다.
원치 않는 고요는 이상하고 두려운 것이다. 십여 년 전 강원도로 처음 홀로 여행을 했다. 첫 도착지가 한밤의 강릉이었는데, 여행의 방법 하나를 얻게 되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다.' 동양대 정류장에도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사람은 나 혼자였고, 그 길에는 차만 쌩쌩 달릴 뿐 인적이 드물었고, 마음은 저 차들을 앞지를 만큼 급해졌다. 돈만 주면 택시를 타고 금방이라도 갈 수 있었지만, 그건 이 여행을 깨는 균열이었으며, 이야기도 끊길 것 같았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기에, 길 위에 것들은 영혼의 일부가 되기에.
어둠을 타고 점점이 떨어지던 낙엽을 보고 있는데, 어느 낙엽에 생각 하나 반짝였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닐지라도, 나의 길이 될 수 있다.'
그래 길을 걸었다. 버스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갈 심산이었고, 더 멀리 가서 숙소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조차 꺾을 결심이었다. 충분히 밥을 먹었는데도, 많이 걷고 별로인 첫 행선지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허기까지 찾아왔다. 길가의 불고기 식당에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럼 오늘의 여행은 이대로 끝나는 것이었다. 가방에는 아직 썩은 사과가 하나 더 있다. 밥을 먹어도 부석사에 도착하고 먹어야 한다. 얼마가지 않아 허기가 퍽퍽한 다리를 멈췄고, 정류장에 쉴 겸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서 기다림처럼 내 삶도 오랜 기다림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때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었고, 그때마다 멈춰야 했다. '고통일지라도 날 멈춰 세우는 것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으며 끝이 보이지 않은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드디어 버스가 왔다. 그렇게 버스가 반가울 수 없었다. 버스는 곧 나를 아름다움으로 데려다줄 것이기에. 안에는 읍내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던 아줌마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발 앞에는 저녁거리로 보이는 짐들이 보였다. 저들의 집에 방문한다면 금방이라도 밥상을 낼 줄 것 같은 맛난 상상은 허기를 더더욱 자극했다. 버스는 어느새 조선 최초의 국가지원 서원인 편액사원이자 세계유산 소수서원을 지나쳤다. 이곳도 가려고 했지만 아쉬운 눈길만 던질 뿐이었다.
드디어 한 시간에 올 곳을 다섯 시간이 걸려 부석사 입구 정류장에 내렸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능선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은 세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사람들이 절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니, 절간의 문이 닫혀 있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부석사는 세계유산이니 출입이 엄격할지 모른다. 갈까 말까. 아름다움은 순간에 있는데. 하마터면 차까지 끊겨 숙소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온갖 걱정이 사지를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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