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여행
일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독방을 쓰게 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같이 쓰는 큰 방을 잡나 허름한 독방을 잡나 그 돈이 그 돈이기 때문이었다. 독방이라면 여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제야 숙소를 둘러봤다. 갈아입을 옷이 담긴 가뿐한 검은 가방뿐, 날 귀찮게 하는 베란다의 세탁기도 부엌의 전기레인지도 없었다. 번잡한 생활의 일부를 도려내니 혼자만의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창가에 숨은 객창감이 흔들리는 커튼 뒤에 숨어 날 엿보고 있었다. 보통은 밤을 새는 객창감은 툭 치며 투정을 부리곤 하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20241024.
늦은 저녁을 먹고 걸었다. 조용함에 담긴 정갈함. 중도시이면서 소도시 같은 아담함. 처음 온 구미의 첫인상이었다. 전날에도 구미에 왔지만 늦게 온 터라 허겁지겁 밥만 먹고 어디 하나 둘러보지 못했다. 자정이 가까운 밤, 사발면으로 남은 출출함을 달랬던 편의점 앞에서 들었던 기차소리를 뒤좇아 어디론가 마음만 따라갔다.
피곤함에도 헛헛함과 찬기운이 잠을 몰아내고 있었고, 걸음은 가벼웠다. 가는 길 위에 있던 경부고속도로는 구미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 아래 원지교를 건너다보니 대추밭이 있었다. 난간에 삐져나온 붉은 대추 하나가 날 노려봤다. 나는 눈싸움을 하다 날름 하나를 집어삼켰다.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길이었다. 자전거 한대 휭 지나갈 뿐 천변길에서 나오는 동안, 사람 하나 그 흔한 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 오롯이 비워내기 좋은 밤이었다. 왠지 모를 끝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목적지도 낙동강이었다. 그 시간에 갈 곳은 그곳뿐이었다.
밤공기 어디에도 앉지도 못하게 숨 막히게 했던 여름의 꽁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겨울 염탐꾼의 날름거리는 혀처럼 미풍이 귀 끝을 서늘하게 스치고, 돌아보면 없는 숨바꼭질 같은 공기였다. 이제 겨울이 될 것이고 한 해가 떠날 것이다. 뭔가 될 것 같은 해였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당연히 나이로 먹어대는 숫자가 늘어나면 희망에서 벗어나는 거리 될지 모른다. 그렇게 희망은 사라지고, 꿈은 갚아야 하지만 갚을 수 없는 빚이 되고 있었다. 없던 걸 있게 하는 걸 희망이라고 하고, 있는 걸 없애려 하는 걸 후회라고 생각하니, 괜한 화가 솟구치고 돌연 실의가 날 흔들었다. 그래서 탈출하듯 이 일을 했는데, 일도 지겨워지고 있었다.
천변길에 나와 낙동강체육공원길을 거쳐 강에 다다랐다. 길이 끊긴 곳에 강이 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강인지 모를, 빛이 사라진 시간이었다. 엷은 미풍마저 도망친 강가에서 눈을 감아도 별 다름없는 어둠에서 강물 소리가 고요히 속삭였다. 처음으로 강물소리를 들은 듯했다. 누군가 부른가 싶어 눈을 뜨니 저 멀리 삼생의 시간을 의미하듯 세 개의 불빛이 동화의 도끼처럼 강에 드려워져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문득 나무꾼 동화가 떠올랐다. 산신령은 애초에 모든 도끼를 나무꾼에게 주려했던 것처럼 미래만을 바라봤던 내가 어리석은 기분이 들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도 다 내 것인데, 삼생의 시간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여기 내가 있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길을 멈춰 세운 강이 달리 보였다. 길이 강에서 끊기고 강이 길을 멈춰 선 것이 아니라, 길과 강이 만나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무슨 말이고 강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입안에 맴돌 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무언지 모른 체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하영의 전화가 왔다.
- 재미난 일 있어?
요즘 하영은 자주 이렇게 묻는다. 그때마다 뭔가를 숨기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재미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오로지 일만 하는 그는 재미가 일이라고 하지만 일만으로 재미가 없으니 재미를 찾는 것일 것이다. 재미를 봤다, 고 하면 만족과 성과고, 재미있네, 라고 하면 흥미와 즐거움이나 허한 인정 같은 것이니, 자신의 일을 만족한다고 주장하는 하영이 찾는 것은 시작과 감정에서 비롯되는 흥미와 즐거움이다. 허면 나의 재미는 무엇일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단체카톡이 떴다. 뭔가 싶어 사장동생에게 서둘러 갔는데, 그는 원청업체 차장이 머무는 호텔 로비에 있었다. 나이트클럽은 어찌하다 호텔 사장과 얘기하다 나온 얘깃거리였다.
소파 앉아 있던 사장동생과 차장은 술만 마시면 연인처럼 보였다. 웃기지도 않은 말에 웃어주고 별 것도 아닌 것에 박장을 했다. 한 번의 이혼을 경험한 사장동생은 차장을 위로하듯 대작을 해줬지만 그도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듯 차장과 술잔을 부딪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즈음 차장의 이혼조정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혼을 했다. 아내의 바람으로 시작된 폭풍 속에서 차장은 탈출하고 있었지만, 그 시간이 못내 겨워 매번 술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바위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멈춰있었고, 얼굴에 돋아난 붉은 취기는 피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필定必의 원리에 따라 이별도 정해진 것이기에 언젠가는 아름다운 만남도 다가올 것이다.
그 밤. 잠에서 설핏 깼다. 충분히 피곤한 날이었는데, 화장실 때문에 깬 것도 아닌데, 어쩌면 내 대답을 듣지 못한 강물이 날 깨웠나 싶기도 했다. 숙소 천장의 취침등이 강의 세 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나아갈 것이다.' 이 말이었까. 강이 해주고 싶었던 말이.
2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