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울산 방어진항, 그것은 발걸음을 요구한다

아름다움의 여행

by 같은온도

드디어 일은 끝났고, 일과 후 여행도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뭔가 들어서기 마련인데, 그것은 배회였다. 집으로 돌아갈 열차가 다가오는 오송역에서 쉬 맘을 정하지 못하고 도닐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열차만 타면 아늑하고 그리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일주일 전에도 제천역에서 배회를 했었다. 그대로 안동을 들렀다 경주로 향하고 싶었다. 까다로운 여행이기에, 그날은 속이 좋지 않았고, 오늘은 짐이 너무 무거웠고 일기예보마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행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떠날 수 없던 것은 아직 여행의 끝,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까다로움을 이기는 것은 무념무상, 그냥 나아가야 하고, 가서 보아야 한다.



20241125.

울산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도 고민이었다. 몸의 머뭇거림은 사라졌지만, 머릿속은 부산하게 일정의 아귀를 맞추고 있었다. 사그라들지 않은 욕심 때문이었다. 아니 경주로 갔어야 했나, 경주를 시작으로 내려가며 울산, 부산까지 하루씩 다 보려고 했지만, 언제나 욕심은 불가능이었다. 욕심을 부리면 그렇게 되겠지만, '그것'은 날 피해 갔을 것이다. 성숙은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 선택해 욕심이 예상하지 못한 그 이상以上의 그러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욕심은 딱 그만큼만 얻게 되지만, 성숙의 그러함은 미지의 이상理想이 펼쳐낼지 모를 일이다. 이도 울산역에 내리고서도 알 수 없었지만 통도사 산문을 나오며 깨닫게 되었다.


울산 지역은 꽤나 멋진 곳이 많았다. 그곳들을 다 보려면 이미 내려앉은 어둠을 부산히 헤집고 다녀야 했다. 숙소에 가방을 던져놓고 부랴부랴 통도사 근처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려 서둘러 가려했더니, 중년남자가 날 불러 세웠다. 초행자는 어디를 가나 티가 나기 마련인데, 기사에게 물은 행선지를 들은 모양이었다.

- 이 시간엔 들어갈 수 없을 긴데.

- 부석사는 밤에 가도 열려 있어서, 혹시나 해서요. 못 들어가면 어쩔 수 없고요.

혹시나, 는 대부분 역시나, 이듯 첫 관문조차 들어설 수 없었다.


13. 통도사 입구.jpeg.jpg [ 통도사 총림산문 ]


어쩔 수 없이 숙소가 있는 울산역으로 돌아왔다. 또 망설였다. 국가정원을 갈까, 대왕암이라도 갈까. 하지만 울산의 끝에 자리 잡은 그곳으로 가자면, 그 시간은 이슥한 밤이었고, 돌아오는 차도 끊길 것 같았다. 일그러진 일정으로 터벅터벅 숙소로 향했더니, 여행의 인증 숙소가 날 위로했다. 내가 원하는 잠자리 그 자체였다. 침대의 상태나 용품은 충분했고, 비데가 있는 화장실은 욕실과 분리되었으며, 욕조는 혼자 쓰기에 아까울 정도로 컸다. 욕조 옆에는 더위를 잠시 식힐 수 있는 침상이 있고, 샤워실도 욕조와 분리되어 있었고, 물은 암반수여서 물로만 샤워를 해도 피부가 매끄러웠다. 여행을 하지 않아도 이 숙소에서 며칠 쉬고 싶은 완벽한 숙소였다.



20241126.

img.jpg [ 방어진항 해변 ]


다음 날, 개운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푸르스름한 창에 노크하며 겨울을 부르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먼저 대왕암으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충분한 것 같아 별스러운 것도 없는 방어진항 해변으로 갔다.


img.jpg [ 방어진항 파도 ]


해변은 파도 그 자체였다. 맘 속 상흔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듯했고, 파도에 실린 바람이 짓무른 폐부를 어루만져주었다. 발끝까지 달려드는 파도가 날 위협했지만, 부서지며 물러나는 모습이 올해의 나와 같았다. 파도와 내가 다른 것은 부서져도 다시 나아가는 파도였다. 부서짐에 두려워 말고 부서져도 부서져도 다가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임을 파도가 말해주고 있었다.


img.jpg [ 방어진항 세 등대 ]


해변에서 항구에 가까울수록 비도 그치고, 파도는 이전의 시간을 속인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 평온을 지키듯 세 개의 등대가 꿈처럼 아스라이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로 넘어가고 있었고, 뱃속에서 허기가 고동쳤다. 허기에 많이 걸었더니 벌써 몸은 지치고 있었다. 버스를 탈까 했지만, 버스로 가는 길이 더 멀어 걸었다.


언덕을 넘어 점점 다가가는 대왕암으로 가는 길에서 왠지 모를 벅차오름이 예고처럼 가슴에 전달되었다. '그것'은 여정을 마친 자만이 가질 수 있었고,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공양처럼 발바닥을 갈아내는 걸음을 요구하는 '그것'이었다.



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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