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여행
드라마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다. 서산과 공주를 시작으로 영주와 구미, 해미를 넘어 이제 이 여행도 울산에서 닿아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과 후 마실 같은 산책이 여행이 되었고, 아름다움의 순간으로 향했고, 기억의 여행기가 쓰였다. 그 사이 너를 만나고 나를 보게 되고, 우리로 연결되며 잠시나마 행복했다. 욕심을 버려야 했고 진정한 욕망을 다시 찾았고, 이제 발바닥을 갈아내는 걸음이 요구하는 '그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용광로처럼 모든 것을 녹여낼 수 있지만,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외려 나를 살게 하는 것이었다.
20241126.
대왕암으로 가는 초입에서 물 위를 걷는 듯한 출렁다리를 걸어 보려고 했지만, 아침 기상이 좋지 않아 폐쇄되었다. 헌데 발바닥이 문제가 생겼다. 아침비가 운동화에 스며들고 이내 발바닥까지 쳐들어간 것처럼 물집이 생겨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리는 것처럼 쓰라렸다. 그럼에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고통마저 잊게 하는 '그것' 때문었다.
어딘가 유영하다 지친 용이 드나든다는 용굴과 기다리듯 바다에 마주 앉은 할미바위를 지나쳐, 드디어 멀리서 대왕왕이 보였다. 이토록 예쁜 바위가 있을까. 정말이지 바위 중의 바위, 바위의 왕, 대왕암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인 바위는 빛을 머금은 듯 빛나고 있었고 해풍과 파도의 애무를 받은 것처럼 발그레했다. 바위틈에는 빛의 발그레함을 삼킨 보랏빛 해국까지 피어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더 아름다운 바위가 나를 맞이하고 있어 그 자체가 드리마틱 하여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되어 절정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다. 엉뚱한 행선지인 방어진항에 간 것도, 발바닥에 물집까지 생긴 것도, 수천수만의 발걸음으로 이곳에 닿은 것도, 이상한 만남과 갑작스러운 이별조차도 이 절정 때문인 듯했다. 그것은, 최후의 결투에서 벌어진 피 말리는 긴장과 정신을 잃게 할 공포를 넘어선, 그것이었다.
'그것'은 환희였다. 환희가 온몸을 감싸는듯했다. 두 달 동안의 일을 참아내고 여행으로 지나쳐 온 시간이 나에게 선물이라도 안기는듯한 기쁨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위와 바람과 파도가 유혹하여 그냥 미소가 흘러나왔고 그냥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참고 참으면 참이 올 거라는 믿음에 대한 증명과 같은 시간이었다. 돌연 울컥하는 심정까지 밀려와 잠시 눈을 감으니 파도소리가 내 귓가를 스쳤다. 나아가라고, 끝을 보라고.
'뛰어들고 싶을 만큼 좋아!'
이 환희를 주체할 수 없어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어, 하영에게 카톡을 했다. 내 시선을 잡아당기는 망망한 수평선과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신발까지 벗고 점퍼도 벗고 가방도 내려놓고 대왕암 끝에 섰다.
잠시 후 작은 누나에게서 카톡이 왔다. 누나에게도 같은 문자를 보냈다. 우문으로 물으면 간단한 현답으로 답하는 누나였다.
'뛰어들면 너무 추울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정말로 뛰어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진정 뛰어들고 싶은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것은 이야기였다. 이 여정의 끝에서 온몸으로 느낀 이 환희처럼 나에게 그런 기쁨을 준 것은 이야기뿐이란 것을 다시 깨달은 순간이었다.
영겁의 윤회가 있다면, 물결은 돌고 돌아 삼길포항에서 반짝이던 물빛이, 대왕암 해변에서 녹아들며 부서지는 것 같았다. 생사의 만남과 이별처럼, 반짝임도 그 부서짐도 아름다움이란 걸 깨닫는 이 순간도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이란 순간이 아니었던가. 순간의 아름다움이란 것도 본시 이별을 품고 다가왔기에 그토록 좋았던 것 아니었던가. 한 아름 안고 싶은 아름다움도 언젠가는 이별해야만 또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누구와도 걸어도 좋을 아늑한 대왕암 해변길을 빠져나와, 가장 먼저 가려했지만 마지막 행선지된 통도사로 향했다. 이때까지도 꽃씨 같은 욕심이 마음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뭔가 있을 것처럼, 대단한 걸 말해줄 것처럼.
25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