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울산 대왕암, 바위의 드라마가 펼쳐지다

아름다움의 여행

by 같은온도

드라마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다. 서산과 공주를 시작으로 영주와 구미, 해미를 넘어 이제 이 여행도 울산에서 닿아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과 후 마실 같은 산책이 여행이 되었고, 아름다움의 순간으로 향했고, 기억의 여행기가 쓰였다. 그 사이 너를 만나고 나를 보게 되고, 우리로 연결되며 잠시나마 행복했다. 욕심을 버려야 했고 진정한 욕망을 다시 찾았고, 이제 발바닥을 갈아내는 걸음이 요구하는 '그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용광로처럼 모든 것을 녹여낼 수 있지만,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외려 나를 살게 하는 것이었다.



20241126.

KakaoTalk_20250102_211638459.jpg [ 출렁다리 ]


대왕암으로 가는 초입에서 물 위를 걷는 듯한 출렁다리를 걸어 보려고 했지만, 아침 기상이 좋지 않아 폐쇄되었다. 헌데 발바닥이 문제가 생겼다. 아침비가 운동화에 스며들고 이내 발바닥까지 쳐들어간 것처럼 물집이 생겨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리는 것처럼 쓰라렸다. 그럼에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고통마저 잊게 하는 '그것' 때문었다.


img.jpg [ 대왕암과 구름다리 ]


어딘가 유영하다 지친 용이 드나든다는 용굴과 기다리듯 바다에 마주 앉은 할미바위를 지나쳐, 드디어 멀리서 대왕왕이 보였다. 이토록 예쁜 바위가 있을까. 정말이지 바위 중의 바위, 바위의 왕, 대왕암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인 바위는 빛을 머금은 듯 빛나고 있었고 해풍과 파도의 애무를 받은 것처럼 발그레했다. 바위틈에는 빛의 발그레함을 삼킨 보랏빛 해국까지 피어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더 아름다운 바위가 나를 맞이하고 있어 그 자체가 드리마틱 하여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되어 절정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다. 엉뚱한 행선지인 방어진항에 간 것도, 발바닥에 물집까지 생긴 것도, 수천수만의 발걸음으로 이곳에 닿은 것도, 이상한 만남과 갑작스러운 이별조차도 이 절정 때문인 듯했다. 그것은, 최후의 결투에서 벌어진 피 말리는 긴장과 정신을 잃게 할 공포를 넘어선, 그것이었다.


img.jpg [ 대왕암 바위 ]


'그것'은 환희였다. 환희가 온몸을 감싸는듯했다. 두 달 동안의 일을 참아내고 여행으로 지나쳐 온 시간이 나에게 선물이라도 안기는듯한 기쁨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위와 바람과 파도가 유혹하여 그냥 미소가 흘러나왔고 그냥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참고 참으면 참이 올 거라는 믿음에 대한 증명과 같은 시간이었다. 돌연 울컥하는 심정까지 밀려와 잠시 눈을 감으니 파도소리가 내 귓가를 스쳤다. 나아가라고, 끝을 보라고.


KakaoTalk_20250102_212117769.jpg [ 대왕암 앞바다 ]


'뛰어들고 싶을 만큼 좋아!'

이 환희를 주체할 수 없어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어, 하영에게 카톡을 했다. 내 시선을 잡아당기는 망망한 수평선과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신발까지 벗고 점퍼도 벗고 가방도 내려놓고 대왕암 끝에 섰다.

잠시 후 작은 누나에게서 카톡이 왔다. 누나에게도 같은 문자를 보냈다. 우문으로 물으면 간단한 현답으로 답하는 누나였다.

'뛰어들면 너무 추울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정말로 뛰어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진정 뛰어들고 싶은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것은 이야기였다. 이 여정의 끝에서 온몸으로 느낀 이 환희처럼 나에게 그런 기쁨을 준 것은 이야기뿐이란 것을 다시 깨달은 순간이었다.


KakaoTalk_20250102_212103424.jpg [ 대왕암 물결 ]


영겁의 윤회가 있다면, 물결은 돌고 돌아 삼길포항에서 반짝이던 물빛이, 대왕암 해변에서 녹아들며 부서지는 것 같았다. 생사의 만남과 이별처럼, 반짝임도 그 부서짐도 아름다움이란 걸 깨닫는 이 순간도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이란 순간이 아니었던가. 순간의 아름다움이란 것도 본시 이별을 품고 다가왔기에 그토록 좋았던 것 아니었던가. 한 아름 안고 싶은 아름다움도 언젠가는 이별해야만 또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누구와도 걸어도 좋을 아늑한 대왕암 해변길을 빠져나와, 가장 먼저 가려했지만 마지막 행선지된 통도사로 향했다. 이때까지도 꽃씨 같은 욕심이 마음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뭔가 있을 것처럼, 대단한 걸 말해줄 것처럼.



2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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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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