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행의 끝, 눈으로 돌아오다

아름다움의 여행

by 같은온도

²'3일 걸어갔다, 3시간 만에 돌아오겠소.'

여행을 하면 매양 생각나는 말인데, 영화 [ 잉글리 페이션트 The English Patient 1997 ] 에서 온갖 것을 녹일듯한 붉은 사막을 걷던 알마시가 죽어가는 캐서린에게 말하는 독백이자 다짐이다. 여행의 길은 언제나 멀고 아득했다. 지칠 때쯤 나는 알마시의 말을 되뇌며 여행을 버텨내곤 했다. 간결하면서도 가뿐하게 돌아오는 길은 여행이 던진 엇갈림들에 대한 보상이자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 운명이 여행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유혹을 위해서라면 속임과 둔갑을 서슴지 않게 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의 끝도 다시 집에서 여행이 시작되기에,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여행이다.



20241126.

[ 여행의 신발 ]


통도사에서 절뚝거리며 나와 멈췄다. 사위는 어두워졌고, 산문을 돌아보니 어제 들어가지 못했던 그 시간이었다. 아름다움을 찾던 내 모습도 아스라이 사라지는 듯했다. 내려다보니 발의 방향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신발을 벗었다. 발은 비와 땀에 젖어 아직도 마르지 않았고, 물집은 덩그러니 한기에 시큰거렸다. 두어걸음 걷다 돌벤치에 앉아 신발을 내려다 봤다. 내내 여행을 같이 한 운동화에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초록 신발과도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녹음이 사라지고 있는 계절을 새삼 절감했다.

[ 하이패스 작업 ]


일과 후 여행이라면서 한 번도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의 일은 일종의 오엑스 게임이었다. 충청과 경상의 고속도로에는 하이패스가 있다. 오래된 장비를 교체하기 위해 도로를 차단하면 'ㅗ' 모양의 커다란 도로전광표지가 적색의 X를 표시한다. 작업이 끝나면 초록의 화살표가 표시되고, 차가 통과할 수 있다. 여행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신호등 같은 이 표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런 표지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삶이 녹녹치 않다며 자조하곤 한다. 스스로에게 비웃지 말고, 스스로가 그 표지를 만들어 어떤 끝이든 잘하니 못하니 말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웃어주면 그만인데 말이다. 통도사의 대웅전처럼 부처 없이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하듯 말이다.


[ 눈 오는 나의 동네 ]


이슥한 밤. 동네로 가는 길목에는, 눈이 꽃처럼 내렸고, 비가 눈 사이 숨어있었다. 두 달여의 일과 여행 사이, 여름 같은 가을에서 봄 같은 겨울로 돌아왔다. 삼길포항의 물빛이, 대왕암의 흩어진 물결이, 아름다움을 냉동하기 위해 눈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집으로 들어가고, 여행은 끝이 난다. 문득 두류공원을 산책하며 든 의문이 생각났다.

'여행의 끝은 어디일까.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뒤돌아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니, 눈이 꽃처럼 내리고 눈과 함께 비가 내리고 있으니, 부처의 꽃비처럼 보여 미소가 지어졌다. 눈雪과 눈眼이 만나는 작은 행복이었다. 이도 공산성의 환영처럼 잘 못 본 것일 수 있으나 그것이 거짓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는다면, 진짜로 향하는 이야기 같은 가짜의 문턱일 수도 있다. 비를 싫어하고 눈비는 더 싫어하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영혼의 분여를 통한 나의 해체와 만남과 이별을 통한 정필定必의 원리가 어어진 순간이었다. 그것이 분여된 나의 영혼이 또 다른 여행자로 환생하여 다시 여행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하여 흩어진 영혼도 정함定을 만들고 반드시必 오게 된다. 내가 원하는 진짜로 말이다.



20241127.

[ 창덕궁 ]


다음 날, 눈 덮인 창덕궁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영의 전화가 왔다. 내가 눈을 보고 있다고 하자,

- 눈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면서?

하영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가 싶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자면 나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제의 여행을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뜨고 밝았는지, 하영이 한마디 덧붙였다.

- 재밌게 여행해서 다행이네.

별스런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 때문에 정말 여행의 끝이 잘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하영과 여행을 같이 하지 않았지만, 그는 너나에게 보내는 편지같은 이 여행기를 끝까지 기록할 수 있게 한 내 여행의 벗이었다. 여행의 끝이 집이듯, 그 집에서 기다리던 여행의 벗을 발견하는 것도 진정한 여행의 일부일 것이다. 벗도 내 영혼의 일부이기에.


[ 창경궁과 종묘 사잇길 ]


전화를 끊고, 망연히 눈 덮인 길을 보고 있었다. 창경궁과 종묘 사잇길. 그 길은 산 자의 집과 죽은 자의 집 사이에 가로놓이고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고 있는 묘한 곳이었다. 묘함이 유영하다 하영과 처음 만난 그날의 기억으로 날아갔다. 그와의 인연도 이십 년이 되었다. 그날도 눈의 세상이었다. 그곳은 잠시 푸르름을 삼키고 있었지만 금처럼 빛나고 있던 눈 덮인 잔디밭이었다. 하영은 내게 먼저 말을 걸고 먼저 밥을 사준 최초의 동생이었다. 말도 밥도 아닌 '먼저'를 오래도록 기다린 것처럼 고마운 날이었으며, 그곳은 그와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었고, 그때도 오늘처럼 겨울이 해의 끝이 아닌 시작처럼 보였다. 허니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이 멋진 길을 금잔디처럼 빛나는 하영과 걷고 싶다.



나의 첫 번째 독자, '하영'에게 [아름다움의 여행]을 헌사한다.



끝,

이면서 시작에서.



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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