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처음 늘린 나의 식구는, 애인 아닌, 책이였다.
‘식구’란 서로의 공간을 나눠 가지며, 유대 관계를 쌓고, 책임을 지는 사이를 말하죠. 저에게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책이었습니다. 책이라는 물성은, 마치 연애를 할 때처럼 짊어져야 할 무게를 함께 데려왔어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동이 잦은 제 삶에서, 가장 큰 짐이 바로 책이었기 때문이죠.
책은 무겁고, 부피가 크고, 어디에 두어도 자리를 차지해요. 그러니까 제게 ‘소유한다’는 행위의 실질적인 무게 중심은 늘 책에 있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크리스마스의 방센느 역 근처입니다. 방센은 파리 동쪽 끝에 자리한,
중세 성과 넓은 숲이 어우러진 작고 아름다운 동네예요. 파리의 분주함에서 살짝 벗어난 고요한 곳이죠. 저는 몇년 전 이 곳 근처의 한 작은 불랑제리(빵집)에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맞이해서, 저는 얇게 썰은 쏘시지들을 접어 꽃을 만들고, 각종 단단한 치즈들을 꼬치에 꽃고, 냉동새우를 까서 바질등의 소스에 발라 토마토와 함께 꼬치에 꽂아 끼우는 등 크리스마스 전용 팩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불랑제리는 대개 가정집과 붙어 있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기원은 18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집에서 빵을 굽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특히 시골에서는 ‘포르 코뮌(four commun)’, 즉 마을 공동 화덕이 있어서, 주민들이 반죽한 빵을 들고 와 함께 구웠습니다.
하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문 제빵사, 즉 불랑제(boulanger)의 역할이 분리되었고, 그들은 집과 작업장을 한 공간에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빵은 새벽부터 반죽을 시작해야 했고, 오븐의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늘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죠. 냉장 설비가 없던 시절엔 반죽을 밤새 돌봐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엌은 가게의 뒷문과 곧바로 연결되고, 주방과 거실, 아이들 방이 모두 같은 건물 안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건, 이런 구조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파리와 소도시 곳곳에서는 여전히 불랑제리가 주거 공간과 연결되어 있고, 주인 가족이 그 안에서 직접 빵을 굽고, 삶을 살아갑니다.
가게 안쪽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점심 무렵이면 할머니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도 자연스레 어우러지죠.
저는 그런 구조를 그대로 간직한, 사진에 보이는 이 뒷문―불랑제리 사장의 사적인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출근하곤 했습니다.
딸깍, 문을 열면 곧바로 좁은 부엌이 나옵니다.
그 뒤편엔 사장의 아이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방, 계단 위로는 실제로 제빵사 부부가 사는 집이 있고, 아래 지하로 내려가면 빵공장이 이어져 있죠.
그리고 실제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직원들처럼 분주히 움직이는 인턴들이 있었습니다. 빵 반죽을 나르고, 케이크를 굽고, 초콜릿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한 모습은 어린 시절 TV로 보던 세계와 너무도 닮아 있었어요.
그 만화와 영화가 허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저는 그날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 상상했던 세계를 이렇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겪은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였어요.
가끔은 일손이 부족할 때, 저도 짤주머니로 케이크 위에 크림을 올리거나, 레몬케이크에 설탕을 바르는 일을 도왔습니다. 제과 실습 인턴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시간이었죠.
살던 곳에서 그 빵집까지는 한 시간 거리. 그곳에서 일하려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아직 어스름한 어둠 속, 저는 그 작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하루를 시작했어요. 때로는 양파를 까고, 당근을 다듬고, 브로콜리를 찌고, 감자를 삶았죠. 샌드위치를 만들고, 샐러드를 채우고, 커다란 통을 들어 냉장고를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물을 틀어 싱크대를 닦고 바닥을 쓸었어요, 그 모든 정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주방을 빠져나왔습니다.
기차 시간은 늘 아슬아슬했습니다. RER 노선은 분 단위로 계산해야 했고, 방센 역에 내리자마자 불랑제리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어요.
한국인 사장은 원어민처럼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예술가 기질이 묻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체력이 바닥났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 예고 없이 주어지는 추가 근무에 지쳐버렸고, 결국엔 집에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을 힘조차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퇴근을 하면 주로, 충분히 쉰 뒤 집을 정리하고는 다락방에 올라가 정적인 일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이렇게 다락방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어요.
매일 새벽 정각 여섯 시.
그 시각에 유니폼을 갖춰 입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로 서 있어야 했죠. 사장은 제가 집이 멀고, 새벽 네 시에 출발해야만 여섯 시에 맞춰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는 흔히 통용되는 약간의 관용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방센 역에 내리자마자 뛰었고, 그날도 역시나 얼어붙은 인도에서 미끄러졌습니다.
바지는 찢어졌고, 무릎엔 큼지막한 멍이 들었죠.
피아노 연습은커녕, 악보를 펼치는 일조차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게 그 곳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길, 두 다리는 후들거렸고, 발은 마치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없었어요.
그날은 1월 1일, 새해가 막 밝은 날이었습니다.
정착을 위해 일을 선택했지만, 오히려 피아노와 멀어지는 현실. 그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방센역 근처의 어느 조용한 골목, 유독 햇살이 천국의 빛줄기처럼 내리던 그 정오―
고요한 차도 한가운데, 미술 도록과 클래식 음반이 한 무더기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 저를 위해 남겨둔 선물처럼.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저를 보며 웃었어요.
“가지셔도 돼요, 맘껏요.”
그 말이 참 이상하게도, 한 해의 시작을 허락해주는 인사처럼 들렸습니다.
처음엔 고작해야 영국의 고서점에서 구입한 중고 원서 몇 권뿐이었어요.
파리 13구의 어느 에어비앤비 숙소, 얇은 매트리스 옆에 쌓아놓은 낡은 책 몇 권이 저의 첫 식구들이었습니다. 클릭해서 자세히 보시면, 짙은 녹색에 색연필 그림의 표지에 "피터래빗" 캐릭터들이 보이실겁니다. 저는 동화작가라면 모두가 존경하는, 베아트릭스포터의 생가에 방문했었는데요, 예산 부족으로 굿즈를 구매할 수는 없었지만, 피터래빗 동화책을 고서점에서 구한 것 만으로 즐거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회차에서 다루게 될 거예요.
"더이상 책을 늘릴 일은 없을거야"
수십번 다짐해도, 프랑스에 사는 한인 사이트에 올라오는 좋은 책들을 헐값에 내놓은 것은 늘 놓칠 수 없었어요.
13구에서 11구로 이사를 왔을 때의 아파트는, 맨 꼭대기층으로, 엘레베이터가 없는 작은 스튜디오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고강도 노동이지만, 이십대 중반이였던 저는 책이 가득 담긴 박스 다섯개를 6층까지 직접 들고 옮겼습니다. (며칠간 하혈하는 부작용을 겪음)
나의 다락방
고양이,
책,
그리고
피아노.
처음에는 책장도 구비되지 않아서, 책이 바닥에 그냥 쌓이고, 널부러져있었어요.
이 때까지만 해도, 고양이가 저의 식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브리 쉬어 센의 다락방.
이 곳은 저의 책방이자 침실이였어요. 아랫층엔 피아노가, 윗층엔 전자피아노가 구비되어있었죠. 피아노가 두 대나 생긴 것은 또다른 회차에 이야기로 실릴 거예요.
이 곳은 제가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별채입니다. 저는 이 곳에 1키로를 간신히 넘는 아주 작은 고양이와 함께 들어오게 되어요. 커다란 피아노를 갖고 독일에서 프랑스까지 이사하는 대장정에, 한 식구가 더 늘어버린 것이지요. 생 제르멍 멍 레의 집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저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고양이는 제게 맡겨졌고, 이 예쁜 삼색고양이는 제가 처음으로 기른 반려묘가 되었죠.
잠깐의 거주증명서류를 작성하고 스쳐 지나가던 방들과는 달리, 3년을 버텼. 2년 째 되는 날, 드디어 조금씩 여유가 생겨 책장을 구비하게 되었어요. 잠깐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 행복했습니다. 드디어 스스로 저만의 성을 갖춘 것 같았으니까요.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둑이 들고,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지만요.
해당 시리즈는 본편이 아닌 라이트 에디션으로 스토리의 진행에 맞게, 일어난 사건의 순서가 아닌 스토리 전개의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축약본처럼 빠르게 진행되는 초반의 전개는 본편에 더 풍성하게 사진과 함께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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