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꿈은 아동문학가였다. 나를 낳고, 그나마 이어가던 학업도 멈춘 채 육아에 전념하셨다. 이후에는 생계를 위해 부업을 겸하며,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취직해 가족을 꾸려나가셨다.
내 꿈은 글작가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의 선택 아래에 놓인 환경은 언제나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상황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몸이 덜 고생하는 일을 찾다 보면, 결국 나는 늘 글을 쓰고 있었다.
학보사 기자, 유튜브 단편 드라마의 각본, 공식 석상에서의 전문 번역이 아닌 파견형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 언제든지 필요하면 고용되어 글을 쓰고 통역을 했다. 그러나 “쉽게 쓰여진 글”에 대한 욕심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저자라는 이유로 지키고 싶은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애초에 기자도 작가도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생업 전선에서의 한계를 느낄 즈음, 자연스럽게 그림을 붙잡았다.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글을 “쉽게” 쓰지 않는다. 그림과 글은 돈벌이의 주된 수단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더 이상 안일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엄마는 자존심이 강한 분이 아니다. 무엇이든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실용적이지 않으면 미련 없이 털어버릴 줄 아시는 분이었다. 육아, 집안일, 생계. 그 어떤 것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희 키우는 건 재미였고, 글은 내가 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던 날, 비자 한 번 만들어본 적 없던 엄마가 공항에서 나를 보내던 그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때부터 엄마는 평생교육원의 수필 교실에 등록하셨다. 시작은 어려워도, 한 번 시작한 일은 아주 조금씩 이어나가더라도 좀처럼 중간에 포기하거나 놓지 않는 분이다. 그렇게 6년, 결국 괜찮은 문예지의 신인상으로 등단하셨다.
누군가 축하하며 말했다.
“폭삭 속았수다 현실판이네!”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극중 금명이가 서울대에 간 똑똑한 딸이라면, 나는 분명 금명이는 아니다. 다만, 우리 엄마는 애순이와 견줄 만한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아빠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배짱좋게 밀어부치는 힘이 좋지만, 그 것을 유지할 만큼 냉정한 분이 아니셨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성적인 면이 있어 사업을 시작하면 고용한 사람들에게 번 돈을 모두 나눠줬다. 생계가 어려워진 고용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는 분이였다. 한부모가정인 아들을 기르는 직원이라던가, 너무 순진하고 여려서 술에만 의지하는 친구의 사정이라던가, 러시아에서 온 "세르게이"아저씨의 세탁기가 고장나 옷을 빨아입을 수 없다며 세탁기, 세탁기 노래를 하는 일화들을 엄마와 함께 나눴던 것들이 어릴 적에 남아있다.
나는 그런 전략 없는 부부의 딸로 태어나, 전략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건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엄마 말로는 내가 태어나던 시절, 한국은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신축 아파트들이 대거 들어섰다고 했다. 해가 잘 들고 깨끗한 새 아파트에 입주했지만, 그때부터 알러지성 비염과 아토피, 악성빈혈이 나를 따라다녔다. 유행하는 병은 다 걸렸고, 눈병, 독감, 감기 등은 일상이었다.
과자도 먹지 않고, 조미료 없는 집밥으로 자랐고, 외식도 드물었지만 유아기부터 노출된 환경호르몬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타고나길 겁이 많고 예민해서 위험한 장난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작은 불편은 평생 히스타민제를 복용하고 병원을 전전해야 하는 삶이 되었다. 마치 발가락 끝을 작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이런 예민함은 결국 내 인생 설계를 바꾸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대비하기 위한 장기전략, 현실을 견디기 위한 비현실적인 공상,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지들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노력은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그냥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일이다. 굳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행위는 인간의 헛된 환상이며, 그런 환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은 종종 순박한 부모님의 삶을 전면 부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 집은 엄마가 좋아하는 책으로 가득했다. 한때는 아빠가 책 사재기를 두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나중엔 아빠도 퇴근 후 동화책 읽기를 취미로 삼게 되었다. 그렇게 내 공상에도 불이 붙었다. 나는 조금 더 각별하고, 남다른 것을 좋아했다. 구하기 어렵고, 보기 힘든 것들. 그런 것 중 하나가 집 책장에 꽂혀 있던 <빨간 풍선>이다. 진한 눈매에 오똑한 콧날을 가진 한 프랑스 소년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풍선과 우정을 쌓고, 결국 풍선들과 함께 하늘로 떠난다......
이 단락을 쓰는 지금도 뒷목부터 심장까지 저릿하고, 눈앞이 잠시 하얘졌다. 가끔 흥분할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 그 책을 사랑했던 것 같다. 사실 그건 책이 아니라 영화였다. Le Ballon Rouge, 1956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알베르 라모리스 감독의 환상적인 작품이다.
성당의 성물방에서는 유럽에서 온 희귀한 책을 팔곤 했다. 시골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그런 책들을, 엄마는 가끔 사 오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공상을 통해 삶을 설계하게 된 것도, 엄마가 책을 쥐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을 상처받지 않고 천천히 해결하는 것이고, 아주 작은 것들을 추억하기 위해 기억하고 쌓아가는 일, 어쩌면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지원할 수 있었던 파리 근교의 국제 콩쿠르, 3년간 준비했다. 그러나 해마다 코비드 확진, 월세 체납, 갑작스러운 이사 같은 변수들로 결국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올해, 마침내 나이 제한으로 출전 자격이 사라졌고, 나는 그 모든 아쉬움을 글과 그림 작업에 쏟아붓고 있다.
내 피아노 선생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밀어내신 적이 없다. 다만, 학생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정기 레슨과 꾸준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대신 챙겨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저 조용히 나를 인정해주는 관계로 남아 있다.
“아깝다.”
그 말은 언제나, 어디서 들어도 가시처럼 가슴에 콕 박힌다. 난 한국에서도 아깝고, 프랑스에서도 아까운 사람이다.
행정 기한을 맞추지 못해 놓친 기회들, 아주 작은 변수로 흘러간 시간들, 누군가 조금만 도와줬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상상,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기대지 못하는 내 욕심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만큼 남을 대접할 수 있어야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유로,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라 해도 타인의 성공에 기꺼이 힘을 보탠다. 그리고 때로는 절망한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런 절망은 매우 유아적인 푸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장 학교 가는 것 조차 하늘의 별처럼 쉽지 않은 제3국의 아이들을 떠올리자면, 그리고 그런 나를 그 누구보다, 말로 다 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내 친동생과 다름 없는 아린이. 그리고 내 욕심만큼은 불가능하지만 그 누구보다 날 믿어주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다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투정에 불과하다.
이사를 하자마자 집 앞의 마트가 문을 닫았다. 난 늘, 이사를 하면 그 곳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데, 견디기 힘든 소음을 몇달간 반나절 이상 강행하는 상황이라던가, 도둑이 든다거나 하는 등. 어떻게든 이사를 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공사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그저 간판을 바꾸고 내부를 재배치하는 수준의 개편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집 바로 앞에, 생필품과 먹거리를 파는 소박하지만 편리한 마트가 생겼다.
콩쿨 우승도, 명문 음악학교 졸업도 아닌, 집 앞에 모기약과 알콜을 사러 가는 것이 이렇게나 쉬워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치 인생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다시 해본다.
햇살이 잘 드는 집,
좋은 상권,
편리한 교통,
치안이 안정된 지역...
마트 앞을 장식한 빨간 풍선들은, 책 속의 어린 소년의 일상을 방해한 사고뭉치 친구처럼,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날 놀리듯이 놓여져 있었다. 이제 저 친구들을 묶은 줄을 붙잡으면, 새 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