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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18번, 웃기지 마... 근데 진짜 됨

by 클로버


그런 날이 있다.

인생이 우연처럼 손을 뻗어주는 때.

딱 한 번, 그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남편은 재테크에 관심이 없었다.

특히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면 "나랑 안 맞아"라며 공부도, 대화도 슬며시 피했다.


부부는 경제공동체라는데... 이제 우리는 한 팀인데... 서운함에 여러 번 싸우기도 했다.


왜 나만 이렇게 애써야 하는 걸까?
이건 우리 둘의 문제인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회사가 싫은 것처럼 (남편은 회사 가는 걸 좋아한다) 남편은 정말 부동산이 싫을 수 있기에 포기했다. 다행히 나는 여러 재테크 중에서도 부동산 공부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기도 했다. 그래서 나 혼자서라도 진짜 우리 둘의 집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지방이라 서울만큼 비싸진 않았지만, 이때는 대출이 무섭기도 하고, 새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에 청약 정보를 뒤지며 모델하우스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격도 적당하고 입지도 괜찮은 브랜드 아파트가 있어 처음으로 도전해 보게 된 날. 클릭 몇 번에 끝나니 신기하면서도 왠지 허무한 느낌.




띠링-

당첨자 발표날, 나는 예비 18번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희망을 품기도, 내려놓기도 애매한 숫자.


부동산 카페에서는 "그 번호면 포기하라"는 말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나는 갔다. 사람구경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현장에 앉아 있었다.


"예비번호 순서대로 줄 서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가 마이크로 안내를 했고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는데 그 광경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그렇게 차례차례 앞 번호부터 남아있는 동. 호수 중에 추첨권을 뽑아가는데...

"예비 17번분? 안 오셨고, 예비 18번분까지!입니다"




엥??

내가 된 거야?

내가 마지막에 문 닫고 들어간 거야?


평소에 행운이라는 단어와 친하지 않았기에, 엄청난 행운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추첨권을 뽑고 발표하는 시간.

계약포기를 한 저층세대들이 잔뜩 남아있던 상황에서 나는 귀한 고층을 뽑았다.


이게 된다고?
이제 나도 집이 생기는 건가?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생각이 되풀이되고 얼떨떨하게 계약서를 썼다. 집에 와서 결과를 얘기하니 가족들은 우리 집에 금손이 있다며 과한 칭찬을 해주는데도 뭔가 멍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모두 털어 넣어 잔금까지 치르고, 2년을 기다려 처음으로 가본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가는데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 공간이 생겼구나"라는 왠지 모를 울컥한 감정이 느껴졌다.


물론 거창한 집도 아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완벽한 타이밍도 아니었지만.

그날의 예비 18번은 내게 단 한 번의 기회를 내밀어줬고,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기회의 여신은, 준비된 자에게 진짜로 온다는 것을.

아직도 불안은 여전했지만, 그 불안을 이길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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