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 미뤄졌으면...' 하는 마음과 '빨리 보고 해치워버리고 싶다'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전 날까지도'완벽한' 준비가 되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시험 당일 차로 바래다주던 엄마의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에 도착했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시험날 책 바리바리 싸가기' 신공을 보이며 배치받은 교실 자리에 앉았다.
시험감독관이 들어와 모든 책을 교실 앞으로 갖다 놓으라는 말이 있을 때까지 책을 봤다. 원래 그런 때가 가장 집중이 잘 되는 때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준비가 덜 되었다는불안감에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시험 시작
무슨 정신으로 문제를 풀었는지 모르겠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내내 흥분상태에서 시험을 보고 온몸에 진이 빠진 채로 시험장을 나왔다.
'국어, 영어랑 법 과목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한국사는 망했다... 과락 나오면 어떡하지?' 남들은 효자 과목이라는 한국사가 끝까지 나의 발목을 잡았다. (이과생이라는 핑계를 대기엔 수학을 그리 잘하지도 못했다...-_-)
시험이 끝나고 집에 와서 가채점을 해보니 애매한 점수가 나왔다. 소위 말하는 1타 강사들이 예상하는 커트라인에서 왔다 갔다 하는 불안한 점수
공시생 커뮤니티에는커트라인을 예상하는 글, 포기하고 다시 독서실을 끊었다는 등 매일같이 온갖 글이 올라왔다. 수험생활 초반 학원에 등록할 때, 받을 수 있는 가산점 중 최대 점수의 자격증을 무. 조. 건. 따놔야 한다던 원장님의 말씀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대학을 1년밖에 안 다녀서 0.5점 가산점이 최대였던 나는 공부하는 와중에, 정보기기 운용기능사 자격증을 따러 컴퓨터학원을 다녔었는데, 당시에는 '바빠 죽겠는데 0.5점이 뭐라고'라며 투덜댔었다. 그런데 시험을 한 번 치르고 나니 0.5점이면, 수많은 수험생의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점수였다. 갈림길에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아빠와의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다.
사실 가족중 누구도 내가 합격할 거라 기대를 안 했으니, 처음부터 반대했던 아빠 입장에서는 애매한 점수를 보고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빠] "더 이상의 지원은 없어, 학교 복학해!"
[나] "결과 나올 때까지만 생각해볼게.. 그리고 지금 전공 나랑 너무 안 맞아"
[아빠] "맞는 것만 하는 사람이 어딨어?! 당장 복학 준비해!"
나는 복학은 정말 하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 늦어지는 게 뭐가 대수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왠지 실패자가 되어 돌아가는 느낌에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수험기간 동안 내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만족할 만큼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아니었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고, 뭐든지 '모 아니면 도'인 나는 공부가 안되면 풀로 쉬었다. 공부는 엉덩이 싸움이고, 적은분량이라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쉬는 건 안된다는 수험가의 말들은 내 체질(?)에 안 맞았다.
남자 친구가 휴가 때마다 놀았고 심지어 그의 부모님과 몇 시간 동안 차 타고 군부대 면회도 다녀왔다.
시험 100일 앞두고 남자 친구에게 차이고 멘탈이 나갔고, 가장 중요한 시험 D-30 중 2주는 거의 공부를 안 했다. 그런데 명언을 주문처럼 외워대서 스스로 세뇌가 된 건지 현실 도피한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때의 나는 내가 불합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