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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와 함께 걷는 즐거움

인제 점봉산 곰배령의 폭우, 평창 선자령의 강풍

by 박상준

걷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틈만 나면 걷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는 도심에 있지만 뒷편에 작은산에 안겨있다. 이곳으로 이사온 것도 산 때문이다.(내 건강의 팔할은 뒷산에 신세졌다). 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해 질 무렵에 주로 걷지만 때를 놓치면 고라니가 눈빛을 밝히며 뛰노는 칡흑같은 밤에도 걷는다.


폭설이 내린 안반데기


한달에 두차례는 전국 각지의 걷기 명소를 찾아다닌다. 물론 비용문제로 아예 걷기카페를 만들어 수십명이 함께 다닌다.(경비도 절감되지만 편도코스에도 반대편에 버스가 기다려줘 편리하다)


버스를 빌려 함께 다니면 장점이 많지만 때로 단점도 있다. 미리 일정을 맞춰 회원들의 신청을 받고 일주일전엔 버스를 임대하고 식당을 예약하기 때문에 갑작스런 악천후 예보에도 웬만해선 강행해야 한다.


작년 초여름엔 강원도 인제 점봉산 곰배령을 갔다. 곰배령은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필수코스인 ‘천상의 화원’으로 5월과 6월쯤에는 탐방객들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점봉산을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잡은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산림청에 예약이 필수다.


한달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참가자 45명의 예약까지 마무리했으나 출발 하루전 기상청 일기예보를 확인했더니 점봉산엔 비소식이 있었다. 미리 회원들에게 우비를 준비하라고 공지하고 아침 6시에 출발했다.


그런데 의외로 영동고속도로에서 내리던 비가 인제로 접어들면서 소강상태를 보였다. 점봉산 들머리에 도착하니 해는 먹구름속에 꽁꽁 숨었지만 비는 그친 상태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상청의 오보가 이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유있게 둘러서서 스트레칭까지 마치고 출발했다.


비가 쏟아지는 곰배령


하지만 한세트에 550억원이라는 기상청의 슈퍼컴퓨터는 우리 일행이 본격적으로 산을 올라가면서 제값을 했다. 고양이 발자국처럼 살금살금 내리던 비는 오르막이 이어질수록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견딜만 했지만 곰배령으로 향하는 마지막 오르막에선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듯 쏟아졌다.(들고있던 카메라에 빗방울이 스며들어 고장이날 정도였다)

'폭우속의 수채화’속을 2시간 남짓 걸었을까. 해발 1100m 5만평의 넓고 평평한 고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곰배령’이다.


하지만 곰배령은 사람보다 송곳같은 비바람과 짙은 운무(雲霧)가 먼저 점령했다. 그 와중에도 곰배령 표지석에는 인증샷을 찍으려는 탐방객들이 20m 줄을 섰다. 놀라운 열정이다.


우리가 원했던 ‘그림’은 아니지만 대신 걷는내내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끽했다. 길은 굉음을 지르며 내달리는 계곡을 옆구리에 낀채 굽이굽이 산허리를 타고 하염없이 기어오르고, 굴곡진 숲은 운무에 갇혀 매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특히 곰배령이 진입하기 직전 운무에 갇힌 송림숲은 마치 사진작가 배병우를 스타급 작가로 만든 새벽 안개속의 '소나무’ 연작을 보는듯 몽환적이었다.


우비를 입었지만 나는 비에 젖은 생쥐같은 몰골로 내려왔다. 하산길이 미끄러워 일행중 몇명은 넘어지고도 했다.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그 험한 빗속을 뚫고 정신없이 내려오자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강풍이 부는 선자령


곰배령은 ‘폭우의 추억’을 안겨줬지만 작년 5월에 오른 강원도 평창 선자령은 ‘강풍의 추억’을 남겼다. 사실 이 곳에서 바람을 탓한다면 선자령은 억울할 것이다. 워낙 바람이 많이 불어 거대한 풍차모양의 풍력발전기가 능선을 이국적인 풍경으로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자령에 바람이 거친것은 지형적인 특징 때문이다. 대관령 북쪽 능선은 고위평탄면이고 동쪽은 가파른 산악지형인지라 기류변화가 많고 바람이 강해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르긴 한다.


하지만 선자령을 계절별로 수차례 올랐지만 이날은 옛 대관령휴게소에서 버스에 내리자 마자 제대로 바람을 맞았다. 무엇보다 광활한 능선에선 바람이 분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바람에 강타당하고 바람의 의지대로 몸이 끌려갔다. 가만히 서있어도 누군가 뒤에서 밀듯이 강풍이 불었다.


눈부시게 맑고 파란 하늘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것같은 몽환적인 구름이 평화롭게 걸려있지만 능선엔 몸을 가눌기 힘들만큼 거칠고 억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남녀 불문하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한 회원들은 태풍급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정말이다). 아마도 이날 트레킹에 나선 회원들은 여태껏 이런 바람을 경험해 보지 못했을터다.


그런데 회원들의 표정이 의외였다. 헛웃음이 나올만큼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한결같이 즐거움이 가득했다.


햇빛이 강렬한 9월말의 '섬티아고' 기점소악도


‘그림같은 하늘, 이국적인 능선, 어마어마한 바람’이 빚어낸 불가해한 풍경은 오월 선자령 트레킹을 극적으로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아마도 강한 바람에 맞딱트릴때면 선자령이 떠오를것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만큼은 아니지만 10여년간 전국 각지의 트레킹 명소를 걷다보면 어쩔 수 없는 악천후를 겪기도 하지만 계절에 맞지않는 날씨에 맞닥트리는 경우가 많다.


5년전엔 11월에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를 갔다가 엄청난 폭설에 고생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배추밭을 보며 진한 감동을 느꼈다. 작년 9월 하순엔 ‘섬티아고’로 불리는 전남 신안 ‘기점소악도’엔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강렬한 햇볕이 쏟아졌다. 그늘도 없는 10km 이상의 12사도 순례길을 고행하듯 걸었다. 어찌보면 그날 날씨는 순례길의 취지에 딱 맞는 걷기여행이었다.


하지만 순탄치못한 인생과 마찬가지로 어느 길을 걷든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갖춘 길은 없다. 기온이 적당하고 풍광이 아름다웠던 코스는 당시엔 좋았지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각인된 코스는 악천후 때문에 고생한 길이다.


트레킹의 즐거움은 무난함이 아니라 ‘예상치못한 변수’에 순응하거나 극복하느냐에 달렸다, 마치 인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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