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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Feb 15. 2024

너를 내어주고 얻은 것

밖에서 기쁨이와 행복이의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둘이 또 무슨 사고를 치고는 작당모의를 하고 있는 거지? 아이들이 어렸을 땐 득달같이 달려가 문제를 해결해 주곤 했지만 어느 정도 큰 지금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두곤 한다.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고, 글 발행은 이미 지체되고. 마음이 급해 밖의 상황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데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기쁨이. 



“엄마. 코팅기가 배고팠나 봐. 코딩종이를 먹었어.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해?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것 같아.”

“엄마, 정말 미안해. 진짜 너무너무 미안해.” 행복이까지 살살거리며 내 눈치를 본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밖으로 나가보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놓쳤다. 코팅기에 코팅용지는 눌어붙어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그렇게 우리의 코팅기는 안녕을 고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 한 나는 드라이버를 가져와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지만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고(대체 무슨 생각으로 분해를 한 건지 모르겠다. 이성을 잃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 도끼눈이 향하는 곳은 아이들.     



“아 정말! 이래서 엄마가 엄마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거 싫어하는 거야! 너희 손에만 들어가면 물건이 망가지잖아! 둘 다 들어가! 방 어지른 것 빨리 치우고! 이게 방이야 쓰레기장이야! 왜 이렇게 뒷정리를 못 하는 거니!”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이번 일과 상관없는 일까지 모두 싸그리 합쳐 잔소리 폭격을 날린다. 오늘따라 사이좋은 남매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지 문제를 일으키고도 방에 들어가 속닥속닥, 꺄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럴 땐 또 죽이 착착 맞아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렇게 듣기 거슬리는 건 또 처음이다. 혼자 미련을 버리지 못 한 채 끙끙대며 코팅기를 살려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데 왜 그렇게 열이 뻗치던지. 

외출했다 돌아온 남편에게 아이들의 만행을 고하자 돌아온 반응은,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음부턴 좀 더 조심해서 사용해.”

자기 물건 망가졌어봐 아주 난리난리, 애들을 쥐 잡듯이 잡았을 거면서. 혼자 씩씩대며 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별것 아닌 물건에 혼자 심각해서는 아이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지 못한 걸까, 또 속 좁은 엄마 된 건가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운데 화장대 위에 빼꼼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메모지. 또! 또! 자기 물건 제자리에 안 놓고 여기다 휙 던져놓고 나갔구만. 이것들을 아주 그냥!     


이 와중에 아이의 글씨체가 참으로 거슬린다. 아 저 삐뚤삐뚤한 글씨체!

풉. 웃음이 터진다. 쌓여있던 분노게이지가 스르르 사라진다. 아이들은 나에게 혼이 나고 나면 늘 이렇게 쪽지를 써서 고이고이 접어 화장대 위에 올려놓곤 한다. 정확히 언제인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큰 아이를 크게 혼낸 날이었다. 정말 눈물 콧물 쏙 빠질 정도로 혼을 냈었는데 감정이 조금 정리된 후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 이야기를 하며 상처를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그때 선택한 방법이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그 편지를 받은 큰 아이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받은 것 마냥,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에 꼭 쥐고는 이건 나의 보물 1호라며 상자에 고이고이 간직하던 아이의 모습이. 몇 번의 방정리를 할 때에도 절대 버릴 수 없다며 ‘맑음이의 보물상자’ 안에 넣어두던 그 모습이.     

그 뒤로 아이들은 나에게 혼이 나면 마지막엔 늘 쪽지를 써 마음을 건넨다. 내용은 대부분 엄마를 속상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내용. 큰아이가 하는 모습을 동생들도 보고 배운 건지 둘째, 셋째도 혼이 난 뒤면 어김없이 손편지(쪽지)를 보내온다. 사실 내가 아이들에게 보내야 하는 게 맞는데, 엄마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 이렇게 큰가 보다. 아이의 마음을 읽고 나면 다음 순서는 자연스레 포옹이다. 엄마가 언제쯤 발견하나 눈치를 싹 보고 있다가 엄마가 읽는 모습을 포착.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쪼르르 달려와 폭 안기는 아이들. (이 자리에서 밝히지만 사실 너무 화가 났을 때는 아이의 쪽지를 보고도 못 본 척한 적이 있다. 참 속 좁은 엄마가 아닐 수 없다)     

화장대 한 구석은 아이들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 쪽지들로 가득 차 있다. 맞춤법이 엉망인 쪽지, 앞뒤 호응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엉성한 내용의 쪽지.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는 내용들만 가득해서 보는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는 쪽지. 엄마의 무심함, 냉정함을 한탄하는 쪽지가 더러 있기도 하다. 아이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되어 이제는 나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감사가 되어 돌아온다. 늘 해 준 것에 비해 많은 것들을 돌려주는 아이들.      


오늘도 아이들의 손 편지에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고 나의 방문도 스르륵 열린다.

그래, 코팅기 까짓 거 하나 더 사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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