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 일대기
초보 자취생으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난달 자취방 월세 계약을 1년 연장했다. 연장할지 말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보증금 1,000만 원과 월세 55만 원 이하, 서울에 있어야 하고 회사인 영등포와 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애초에 많지 않다. ‘다른 월세 집을 알아보러 다녀볼까?’ 아니면 ‘이참에 전세로 알아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집을 알아볼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내 재정상황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구할 수 있는 집의 수준이 비슷할 거 같았다. 지난해에는 ‘꼭 청약 당첨되어야지’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올해도 내 집은 청약로또를 통해 실현된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내 주거는 로또와 운에 기대고 있다.
내 주거 일대기는 고시를 준비하던 2년 간 신림 대학동 고시원에서 산 것을 제외하면, 27년은 부모님 집에서 거주하는 캥거루였다. 그리고 자취생으로서 1년. 내 기억 속, 첫 집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커다란 복숭아나무가 있던 인천 주공아파트이다. 9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는데,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있어 놀이터가 3개나 있었고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아무 놀이터에서 뛰어놀면 됐고, 모르는 애들과도 어디 아파트 몇 동에 산다며 같이 놀았다. 특히 어렸을 적 주공아파트에서 보낸 여름이 생생히 기억난다. 잠자리, 나비, 매미를 잡으려 뛰어다녀 저녁이 됐을 땐, 살이 빨갛게 익었다. 아파트 입구에 있던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복숭아를 따서 먹고, 문방구에서 팔던 올챙이를 어엿한 개구리로 만들어 자연으로 방생해 주기도 했다. 9살 전까지 나는 2살 차이 나는 언니와 같은 방을 썼다.
그리고 서울 집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은 ‘서울’ 입성에 의의를 두는 듯했지만, 나는 내방이 생긴다는 게 좋았다. 서울이 어딘지도 몰랐던 나에게 ‘서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방이 4개였고 화장실이 2개였다. 아침 학교 갈 때, 화장실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됐고 내 방 문을 마음대로 닫을 수 있다는 것이 어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 보면, 본가 집은 정말 좋은 집이었다. 부모님 집은 서울 보다는 경기도가 가까운 서울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동네인데, 상업지가 없어서 조용하고 학군이 좋은 편이었다. 햇빛이 잘 들어, 불을 켜지 않아도 집은 밝고 따뜻했다. 화장실에도 통풍될 수 있는 외부 창문이 있었고, 베쓰밤을 할 수 있는 욕조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방, 생활공간, 화장실을 분리할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본가에 살 때,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었다. 층간 소음과 너무 가까운 옆 집과의 거리가 싫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주 배부른 투정이었다.
내가 처음 거주지에 대해 충격을 받게 된 건, 2년간 고시원에 살면서다. 고시원의 구조는 침대, 침대와 마주 보는 꽉 들어찬 책상과 옷장 그리고 통풍은 전혀 안 되는 화장실이 전부다. 공간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었는데, 2년을 살며 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최소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장소일 뿐이었다. 고시원 생활이 행복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깊게 생각할 것도 아니었다. 나에겐 돌아갈 ‘집‘이 있었으니까. 고시원에서 생활이 지금 자취방적응을 돕는 토양분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집과 부동산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2020년~2021년 부동산 대란이 났을 때도 나는 부모님의 서울 자가에서 살고 있었기에 크게 와닿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독립을 선언한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내 삶을 오롯이 독립시키고 싶었다. 아무리 독립적인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거주지를 공유함으로써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꾸려보고자, 집을 나섰다. 보증금 1,000만 원으로 여러 부동산을 방문했는데, 보여주는 집들의 양상이 비슷했다. 교통중심지인 지하철, 버스정류장으로부터 내가 고를 수 있는 집들은 위나 아래로 멀어지기만 했다. 언덕길을 올라 위로 올라가거나, 내리막길을 내려 아래로 내려가거나. 상업지 한가운데 있어서 소음을 참거나 오래된 구축 빌라 거주지 사이로 어둠을 참거나. 내가 고를 수 있는 집들은 양자택일 게임처럼 극단적이었다. 돈이 없는 나는 타협해서 지금 자취방을 골랐다. 버스정류장에서 15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면 족히 30년은 넘어 보이는 구축 빌라들 사이 고요함을 넘어 소음이란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죽어있는 것 같은 빌라 속 내 자취방이 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작년부터 나는 집과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졌다. 내 자취방을 올라가는 길에는 ‘롯데 캐슬’ 아파트가 있는데 처음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강남 대치동에 산다고 해도, 신축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별로 부럽지 않았는데, 나는 이제 자취방을 올라갈 때마다 ‘롯데캐슬’이라고 아파트 외벽 영어로 쓰인 금박 단어가 부러워졌다. 그러면서 괜히 청약 앱도 한 번 들어가 본다.
내 자취방은 현관에 들어서면 부엌과 세탁기가 바로 옆에 있고 방으로 들어가려면 미닫이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럼 5평짜리 방이 나온다. 처음 자취를 할 때만 해도, 오늘의 집을 들락거리며 내 자취방을 어떻게 예쁘게 꾸밀까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금세, 이 집은 꾸밀 수 있는 집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미 너무 많은 풀옵션, 옷장 2개와 냉장고, 전자레인지 때문에 내 방은 더블 싱글 침대와 흰 테이블, 서랍장만 놓아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다, 빨래를 말리려고 건조대를 펴면 방을 옆으로 다녀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 게다가 완전한 북향이라, 햇빛이 하루에 3시간 정도만 들어서 이른 아침에도 전등을 켜놔야 한다. 화장실과 테이블(책상 겸 식탁 겸 테이블)의 사이는 2미터도 되지 않는다. 화장실에 욕조가 없어, 베쓰밤은 호텔이나 본가에 가야 할 수 있는 사치품이 되었다. 화장실에는 당연히 창문이 없고 오래된 환풍기만 돌아가서 환기를 위해 무조건 화장실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니, 화장실 청소를 거의 매주해도 사라지지 않는 곰팡이에 나는 손들어 버렸다. 자취방에서 홈트를 하려고 가져온 폼롤러와 매트는 펴보지도 못했다. 홈트를 하려면 침대나 테이블을 버려야 하는 이상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홈트를 버렸다.
내가 유튜브나 미디어에서 보던 그 자취방들이 내 집이 될 거란 생각은 허상이었고 이게 내 현실이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집에서 즐겼던 넓은 공간과 햇빛, 깨끗한 화장실이 그립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돈’인 거다. 중학교 문학시간에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소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난장이가 사는 가난한 마을이 재개발을 위해 철거대상이 되며 갈등이 치솟는다. 평생을 일했지만 가난한 난장이 가족들은 아파트 입주권을 얻는다 한들, 돈을 지불할 수 없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일말의 행복을 상상할 여지도 주지 않고 비참하게 끝이 난다. 중학생인 나는 이 소설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모르던 사실을 알려준 거 같았다. 돈과 거주지 그리고 삶. 이제 다시 현실로 와서 나를 거울로 직시하면, 거울 속 내 모습이 어딘가 난장이 처럼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