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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imming Aug 12. 2024

나를 기르는 법 5_짝사랑으로부터

중소인배의 사랑



인정하건대, 나는 찌질하다. 속도 좁고 식견도 짧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나를 중소인배(?)라고 부른다. 소인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인배도 아닌, 그래서 내 그릇은 중인배와 소인배 그 중간인 중소인배라는 것이다. 내가 중소인배여서 그런지, 내 사랑들도 중소인배스러웠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 [또 오해영]의 오해영, [질투의 화신]의 표나리는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주인공들이다. 저들은 자기 마음에 당당하고 솔직했는데 내가 갖지 못한 것이라  퍽 부러웠다. 이렇게 속좁고 소심한 내가 사랑을 하는 건 쉽지 않다. 또, 나는 쉽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입사 후 4개월 뒤,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신입에게 4개월이란 ‘이 회사를 나갈까 말까’ ‘정말 모든 회사가 다 이런가, 내가 이상한 걸까, 다시 취준을 시작할 수 있을까’ 등의 고민으로 가득 찬 시기이다. 합격의 기쁨은 잠깐이었고 나 역시도 갈팡질팡한 마음과 회사 부장님을 보며 ‘ 저 사람이 내 10년 후 미래라는데,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10년 장편 소설을 머릿속에 쓰고 있었다.


첫 만남은 정말 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도 울적한 마음으로 회사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 아래층 화장실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화장실과 이어진 계단문을 열자 그가 서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나는 그와 50센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는 옅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코로나로 눈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 사람의 눈만이 내 기억에 남는다.


깜짝 놀라 인사를 하자 그 사람은 옅고 수줍게 웃음을 달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어느 소설 속 ‘그에게는 항상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표현처럼 그 순간 나는 우습게도 비누냄새를 느꼈고 짝사랑이 시작될 것을 알아버렸다.  맹세컨데, 나는 사랑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아니다. 아주 철저한 나만의 검증 시스템을 거쳐 ‘내 마음‘을 주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판명 나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뜻밖의 아래층 화장실 길목에서 만남으로 나는 그가 뇌리에 박혀버렸다.  사무실에서 죽상을 하고 있던 나는, 그와 다른 만남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그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겹치는 업무가 없고 겹치는 지인도 없는 탓에 멀리서 지켜보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20대 후반의 짝사랑도 10대의 짝사랑과 똑같았다. 노래를 듣거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볼 때,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물음표.  ’그 사람도 이런 노래, 음식, 영화를 좋아할까?‘, ’ 무엇을 좋아할까?‘를 생각하며 미지의 사랑은 커져갔다.  그러다가 그와 가끔 사내 메신저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회사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최대한 그 사람에게 회사 지인의 틀 내에서 관심을 표했다. 그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라 모든 것을 받아주었는데, 이게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모두에게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에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의미를 부여하며 설레는 마음을 숨겼다.


하지만 그는 정말 나를 지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비루하여 잘 안 되는 친절함과 다정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회사에서는 아닌 척했지만 사랑 노래를 들으며 눈물도 흘리고 지독한 20대 마지막 짝사랑이었다. 그 이후 나 자신이 별로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단점이란 단점을 모두 찾겠다는 심산으로 나의 모든 것을 지적했다. 특히 외적인 것에 집중되어 살찐 내 모습도 싫고 피부도 안 좋고, 각진 얼굴과 두꺼운 입술, 올라간 눈꼬리 등 모든 것이 싫었다. 그것이 결코 모든 문제가 아니지만, 그냥 내 탓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oo아이돌처럼 이뻤다면’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우습지만 이김에 짝눈 성형 수술을 하고자 마음도 먹었다.


그렇게 나는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콧볼축소주사, 보톡스도 닭똥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맞았다. 이제 다이어트에 돌입해서 열심히 미용체중으로 가던 중, 마음을 접지 못하고 그 사람 곁에 업무라는 명목하에 맴돌았다. 지인과 같이 밥을 먹거나 업무 핑계로 전화를 하는 등 찌질한 짝사랑은 계속되었다.  지지부진하게 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중 나는 그의 연애 정황을 알아버리게 되었다. 우연히 휴대폰 배경화면을 보고만 것이다. 나는 약간 헛웃음이 났다. 그제야 마법 해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나의 잘못된 짝사랑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있었던 걸까?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정말 외적으로 만족되면 그 사람과 내가 잘될 거라고 생각한, 그런 일차원 생각에 빠진 내가 웃겼다. 내 상상 속 그는 절세미녀와 사귀어야 했고, 항상 다정해야 했고, 단정한 외모를 유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다 상상일 뿐이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인지, 아니면 그의 마음에 들고자인지 모르는 마음속에서, 시술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행복한 연애 중이었던 것이다. 약간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이로써 나는 아직 내가 어리고 철부지임을 다시 깨달았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 ‘라는 답 없는 의문만 남았다. 내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고치더라도 나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거다. 항상 내 못난 모습만 보이게 하는 사랑이 얼마나 오래갔을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네가 밉고 싫었지만,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내가 네 단 하나의 사랑을 원했다는 게 명백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사랑만을 원했다. 어른이 되면 드라마나 영화처럼 심오하고 멋진 사랑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지만 내 사랑은 아직까지 미성숙하고 유치하다.


 

파리 퐁피두 현대미술 센터를 방문했을 때, 잊지 못할 사랑의 모습을 직관했다. 퐁피두 전 층을 관람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층, 커다란 미술 전시품 앞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 한 동성 커플이 작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마치 그 공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로를 보다, 입맞춤을 했다. 나는 갑자기 커다란 그림을 배경으로 입맞춤이라는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서로의 두 눈에는 서로만이 보이는 듯싶었고 입맞춤 후,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는데 그 미소와 입맞춤이 내 뇌리에 박혔다. 사랑이 사치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지만, 나는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 30대에는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 거절에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존감,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가기 위한 시간을 가져 대인배의 사랑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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