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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imming Aug 09. 2024

나를 기르는 법 4_시간을 버려요.

삶을 채우는 법


'시간은 금이다.' , '시간은 돈이다.',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시간의 가치를 표현하는 문구들은 많다.

시간은 앞으로만 흘러간다는 속성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시간을 '잘',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나도 그랬다. 나는 시간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시간강박을 갖게 된 계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학생 때부터 쓴 스터디 스케쥴러의 영향일 거다. 교육계 양대산맥인 메가스터디와 이투스에서 나눠준 스케쥴러. 촘촘히 시간별로 나눠진 스터디 스케쥴러를 보면 항상 무엇인가 빼곡히 적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빽빽이 적고 나면 또 그걸 다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1분 1초가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고시를 2년 동안 준비하면서 시간을 쪼개서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은 점점 심해졌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움직일 때도, 학원 10분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에도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보고 외우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시간을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쉬는 것에도 죄악감을 가지던 2년이 흐르고, 고시를 관두면서 내 모든 시간은 비워졌다. 문서를 쓰다가 렉이 걸려 저장치 못한 파일이 모두 날아간 것처럼, 글자가 빽빽이 적힌 문서 같던 내 시간들은 한순간에 깨끗한 흰 종이가 되었다.



 붕 뜬 시간은 잘만 흘러갔고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 그전부터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경주마는 레이스를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사람들이 세운 이상한 목적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경주마의 시야를 방해하는 모든 사물을 차단하기 위해 '차안대'를 착용한다. 앞에 있는 길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좋은 대학에 가야 했고, 우등생이어야 했고, 행시에 붙어야 했고, 대기업에 붙어야 했다. 내 시간은 대부분 그런 목적을 위해 쓰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주위를 볼 시간들, 심지어 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패잔병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이미 너무 낡고 지쳐있었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다. 눈물이 흐르고 유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끝이 없는 레이스처럼 그렇게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을 걸어야 했다. 고백하건대, 끝나지 않는 이 길을 누군가가 끝내줬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고 애틋했고, 행복하길 바랐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비어져 있기에 살아가려면 다시 삶을 채워야 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계속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까'를 고민했다. 무언가를 처음 배우는 아이는 겁이 없다. 자신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얼마나 시간과 돈이 드는지 따위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 해보는 아이처럼 '겁 없이', '시간을 버리면서' 삶을 채워 보기로 결심했다. 합법적으로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합법적'이란 의미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내 마음이 향하는 대로 시간을 버릴 수 있는 거다.


그 이후, 나는 기꺼이 시간을 버렸다. 해보지 못한 것에 아낌없이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꽃꽂이, 클라이밍, 요가, 발레, 수영, 폴댄스, 스쿼시, 베이커리, 운전면허 따기, 다이빙, 패러글라이딩, 유기견 봉사활동, 부동산 임장, 타투하기, 글쓰기 수업 듣기, 혼자 해외여행 가기 그리고 브런치 작가 되기.

그러면서 내 삶을 채워갔다. 불안한 마음이 다시 들 때면, '합법적인 시간 버리기 기간에 있어'라고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물을 무서워하고 결벽증 때문에 수영을 못한다는 것, 발레공연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손재주가 꽤나 좋다는 것, 새로운 길 걷는 걸 좋아한다는 것, 인센스 피우며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것,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다. 합법적인 시간 버리기 중에 있으니 버스 타고 갈 길을 걸어가도 되고, 밥을 늦게 먹어도 된다. 주말 오후 점심때까지 잠을 자고 느지막하게 일어나거나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아도 된다. 이름 모를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셔도 된다. 마음이 센치해질 땐,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도 되고 비행기표를 끊어도 된다.  버스가 늦을 땐, 정류장에 앉아 읽지 못한 책을 읽어도 된다.





삶을 채우려면 시간을 써야 했다. 하루, 한 달, 일 년처럼 시간을 채우고 나면, 삶이 지나갔다. 자신을 잘 알고 인생을 풍족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시간 공백이 많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공감한다. 이런 공백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 수많은 공백 속에서 나는 차안대를 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걷거나 뛸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시간을 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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