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는 사람들
“주임님, 잠깐 제 자리로 와보세요.” 또 시작이다. 파트장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벌써 진절머리가 난다. 이상한 고집과 엉터리적인 기준을 가진 그가 또 어떤 트집을 잡을까. 자리로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수정해 줬건만 또 그게 마음에 안 든단다. 마음속에 참을 인을 세 번 새긴다. 그러다가 ’ 참을 인 세 번에 살인 한 번을 면한다는데, 그냥 살인 한 번에 참을 인 세 번을 면하는 게 양적으로 낫지 않나?’ 생각이 든다. 자리로 돌아와도 분이 안 풀린다. 책상 위 모니터와 키보드를 손으로 다 쓸어 때려 부순 뒤, 파트장을 가리키면 “그만 좀 하세요. 안 그래도 o나 힘드니까. 그만 좀 하시면 안 돼요.”라고 소리 지르는 상상을 한다. 회사원이 되면 N적 상상만 늘어간다. 사무실에 더 있으면, 욕지거리가 나올 거 같아서 사무실을 나서 사내카페로 향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나와 8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는 회사사람들은 어떤 인연 혹은 악연인 걸까.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니, 내가 회사 상사, 동료들에게 영향받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에서 좋은 사람 찾기는 쉽지 않다. 아니,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이미 내 마음속에서 많은 회사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 남은 삶에 영향을 줄 좋은 사람들을 회사에서 만났다.
내 첫 사수는 사업부 에이스 팀장님이었다. 34살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되었는데, 여유로움과 침착함, 객관성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입사 첫날, 사업 1부 부장님과 면담을 하였다. 면담은 내내 꼰대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부장님은 자신의 말을 하기 급급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듯, 가만히 앉아서 고개만 조아리며 “네”라고 대답했다. ‘휴, 이직 사이트 봐야겠다.’라는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팀장님과 면담을 했는데, 정말 좋으신 분이었다. 첫 면담에서 팀장님은 첫 후임이 생겨서 본인도 잘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말과 함께, 신입이 적응하는 데는 최소 1년 이상 시간이 걸리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여유로움과 어른스러움, 통찰력이 느껴졌다. 이분이 있는 한, 나는 이 부서에 남아있기로 당일 결심한다. 알에서 막 부화한 오리가 어미를 믿고 따라 듯, 팀장님의 메일 스타일, 전화 습관, 업무처리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분의 말과 행동은 나에게 교리였다. 팀장님은 나에게 바쁜와중에도 여유를 가지라고 했다. 여유가 없으면 더 큰 실수를 한다고 하면서. 회계법인에서 호된 생활을 한 내가 실수 하나에도 벌벌 떨며, 무서워할 때, ”주임님, 사람인 이상 누구든 실수는 해요. 실수를 수습하고 더 이상 안 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라는 말을 해주셨다. 모든 실수는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 나는 점점 리틀 팀장님이 되어갔다. ”전화받았습니다. 사업 1부 ooo입니다. “라는 인사말부터, 영업을 할 때 말투와 업무 스타일 모두 팀장님의 파편이 내 파편이 되었다. 그러다가 팀장님이 이직을 한다고 했을 때, 축하드렸지만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흘렸다. 그날 퇴근길 나는 버스 안에서 연인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는 회사를 떠났지만, 사회 예절과 업무 스타일, 팀장님의 잔해는 나에게 남아버렸다.
팀장님이 떠난 후, 이렇다 할 사람 없이 회사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대리님이 사업부로 이직해 오며 다시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다. 대리님은 금융권에 재직하다가 IT사업부로 처음 이직해 왔는데,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밝음과 긍정적인 태도,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어쩔 때는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본인이 손해를 본다. 지켜보던 내가 “대리님은 억울하지도 않아? 왜 가만히 있어?”라고 대신 화를 내자, 대리님은 빙긋 웃으면 “어쨌든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괜찮아.”라고 말했다. 또 본인이 오해를 받아도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그저 본인 일만 묵묵히 그리고 친절하게 할 뿐이다. 이런 대리님의 모습을 보며 ‘역시 금융권 출신은 친절함이 다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묵묵히 전진하는 법, 단단하게 삶을 지켜가는 법을 배웠다.
항상 좋은 사람들만 나의 파편이 된 것은 아니다. 회계법인의 악랄한 대리는 나에게 항상 엑셀로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 강박적인 습관으로 나는 처음 배운 모든 업무를 엑셀로 정리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또, 현 기분파 파트장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무조건 히스토리를 남겨놓는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여러 관계 속에서 이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이루는 파편으로 남아 있다. 회사뿐만 아니라, 중고등 대학교 때 친구들과 동아리 선후배, 발레 학원 사람들, 발레 선생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일상생활에 들어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달이면서 지구이다. 달은 지구와 충돌한 소행성과 충격으로 떨어져 나간 지구의 파편들이 모여 탄생하게 되었다. 나도 달과 같다. 나는 각자의 지구라는 세계와 충돌하고 만나며, 그 사람들의 파편을 고스란히 내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파편을 남기지 않더라도,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들은 흔적을 남겨 내 달에 ‘달의 바다’를 만든다. ‘나도 누군가에겐 하나의 지구겠지.’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작게나마 기도한다. ‘내 파편이 달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풀자’
*귀여운 정민이, 누구 와든 친구가 될 수 있는 소연이, 친절함을 잃지 않는 수민이, 호정이,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지은이, 힘이 돼주는 지수, 수현이, 멋지고 당찬 유진이, 오랜 친구가 돼준 예진이, 민희, 이가네발레단 나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