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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imming Sep 09. 2024

나를 기르는 법 12_향기를 남기고

삶의 발자국은 방울방울


작년에 샀던 향수를 다 썼다. 작년 제주도 여행 때, 면세에서 큰 마음먹고 바이레도의 로즈오브 노맨즈랜드를 무려 18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프로럴과 바닐라 향이 미세하게 섞인 향이 좋았다. 알뜰하게 써서 거진 1년이나 애용했다. 향수를 쓰는 것의 큰 장점은 기분이 좋다는 거다. 일을 하다가, 그리고 밥을 먹을 때 은은하게 전해오는 내 향기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또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고요히 눈을 감고 향에 집중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향의 기분 좋음에 취한 나는 다른 향수를 사고자 여러 브랜드를 시향 했다.


코가 찡해지고, 어떤 향이 어떤 향인지 기억하는 게 무색해질 때까지 내 마음에 쏙 든 향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샤넬에 들어가 시향을 했다. '샤넬'이라는 브랜드 이름 때문일까? 샤넬의 시그니처 향 N.5를 맡는 순간, 마음속 퍼즐이 맞춰진 것처럼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성적이면서도 세련된 어른의 향. 향에 대한 지식이 짧아서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 키이라 나이틀리가 무심하고 시크하게 샤넬 제품을 들고 "샤넬"이라고 속삭이는 장면이 그려지는 향이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19만 원이라는 거금을 무이자 할부 3개월로 긁었다.



사람의 오감은 생존을 위해 발전했다.  오감 중 제일 먼저 진화된 감각기관은 흔히 시각 혹은 청각이라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후각이다. 단세포도 후각을 이용해 먹이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래서 후각을 가장 원시적인 감각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그런지 후각만큼 직관적인 감각도 없다. 길거리를 걷다 빵냄새가 나면, 갑자기 갓 구운 노른 노른 한 빵을 먹고 싶어 진다. 퇴근길 치킨 튀기는 냄새가 나면, 치맥이 땡긴다.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좋은 향을 뿜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좋고 왠지 향이 나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된다. 반대로 땀냄새와 불쾌한 냄새가 나면 나도 모르게 인상이 먼저 찌푸려진다. 이처럼 우리는 향에 생각보다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우리가 불쾌한 냄새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건, 생존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청결하지 못한 냄새 그런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이 냄새를 풍기는 물건 혹은 사람 근처에 가기를 꺼려하는데, 청결이 생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체취를 품기는 사람들에게도 은연중 거부감을 느낀다. 나라마다 그리고 인종마다 지니고 있는 체취가 다르다고 하는데, 타국의 낯선 이에게 나는 냄새를 맡고 '나와 다르다'를 느끼는 것이다. 내가 맡던 냄새와 다른 체취를 가진 사람에게 함부로 가지 못하게 후각이 작동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각기관이 예민한 어린이였다. 정말 가리는 것도 많았고 작은 소리도 너무 잘 들렸다.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역한 냄새가 나면 참기가 힘들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 중 하나는 여름의 땀 냄새였다. 물론 나도 땀을 흘리지만,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하다 보면 가끔 땀 냄새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  퇴근길 특히 더 잘 맡아지는데, 맡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내 코를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그러다가 '후각을 통한 계급화'에 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논문은 후각, 그리니까 향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무의식 중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고 사람들을 계급화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땀이라는 건 그냥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있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땀을 흘린다는 건 사냥 때문은 물론 아닐 거다. 그럼 어떤 육체적 활동을 했기 때문에 땀을 흘리는 것인데, 땀을 많이 흘리고 땀냄새가 많이 나는 사람일수록, 육체적 활동을 더 많이 한 사람이고 땀을 식힐 만큼의 여유와 휴식이 없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블루컬러'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블루컬러'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블루컬러'가 아닌, 땀을 흘리지 않는 사무직인 '화이트컬러'와 마주치게 되면, '나의 집단'과 다른 냄새를 풍기는 서로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되고 향기의 집단화와 계급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현시대에 땀의 가치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여름에 겨울 옷 입고, 겨울에 여름옷을 입어야 진짜 부자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만큼, 땀이란 건 지금 시대에는 0의 가치를 넘어 마이너스의 가치를 가진다. 물론 땀냄새가 직접적으로 청결과 연관이 되어 있어, '좋다'라는 생각을 갖진 않더라도 모두가 육체적 노동을 하던 시대에는 땀냄새를 '혐오'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을 거다. 모두가 그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노동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땀냄새라는 건, 참아 줄 수 없는 냄새가 되어 버렸다. 이 내용을 읽고 나는 머리를 한  맞은 거 같았다. 정말 내가 은연중에 향을 통한 계급화를 하고 있었을까? 사람의 뇌가 이리 똑똑한가? 생각도 들었다. 뇌는 상상과 현실도 구분 못하는 바보인데, 왜 이럴 때만 아주 똑똑하게 작동하는 건지, 이상하다. 후각이 내 집단과 타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척도가 되고, 이 향이라는 걸로 집단을 계급화시킬 수 있다는 것. 나는 향기라는 걸로 누군가를 구분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올해는 2018년 폭염을 넘어서는 기록적인 폭염이었다. 퇴근길, 본가에 들르려 마을버스를 탔다. 붐비는 버스 속에서 여러 사람의 시큼한 땀냄새를 맡아야 했다. 버스에 내린 후, 지쳐 본가에 들러서 샤워를 하고 식탁에 앉아 멍 때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달큼한 바디워시와 바디로션 냄새가 났다. 올리브영 세일을 할 때, 고심해서 산 향들이었다. 밤이 짙어지고 8시가 넘어, 부모님이 퇴근하셨다. 엄마가 "밥 먹었니? 좀 늦었다."라고 말하며 식탁으로 다가오자, 버스에서 맡았던 그 시큼한 향이 코를 찔렀다. 머리를 한 대 망치 아니 오함마로 맞은 거 같았다. '그 냄새가 우리 부모님의 냄새였다니.' 부모님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하루종일 기계를 가동하고 물건들을 납품한다. 육체를 움직이는 일이 대부분이니, 당연히 땀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부모님의 냄새도 모르는 자식이었다.



엄마는 멍해져 있는 나에게, 땀을 많이 흘려서 씻겠다고 말한 뒤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씻고 나왔을 때는 나와 같은 달큼한 냄새가 났다. 향수 광고를 보면, 흔히 한 순간의 향으로 사랑에 빠지고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한순간의 향기'로 누군가를 인식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나는 이제 버스나 지하철 혹은 길거리에서 지나칠 때 느껴지는 땀냄새가 누군가의 치열한 삶에 대한 발자국이었음을 그 자리에서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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