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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흘려듣기

by 염치불고

도쿄에 머물던 시절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르듯 아이들의 등교를 마치고 나면 비교적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휴직을 하고 남는 시간엔 일본어 공부라도 해야지, 마음먹었으나 실상 대부분은 바닥에 엎드려 유튜브를 봤다. 가끔씩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왔다. 대한해협을 건너와 겨우 유튜브나 보고 있다니.


그래서 보기 시작한 게 TV다. 이른바 NHK의 시간.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건 왠지 피하고 싶고, 또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자니 죄책감이 들 때 알아듣진 못해도 틀어놓으면 흘려듣기 효과라도 있겠지, 하며 틀어놓은 게 NHK 채널이다. 왜 TBS나 NTV, 후지 TV 등이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마땅히 답할 게 없다. 지진이나 긴급뉴스가 빠른 채널이니 재난에 좀 더 빨리 대비하려고? NHK 아나운서의 발음이 일본어 표준이라는 얘길 들어서? 대략 둘러대면 맞는 말이지만 우연히 보기 시작했고 채널을 돌리기도 귀찮았다 정도가 맞다.


대부분은 아침 8시 시작하는 NHK 아침드라마 ‘TV연속소설’부터 보기 시작했다. 방송시간은 15분. 놀랍게도 이 짧은 아침드라마는 일본에서 시청률이 높기로 손꼽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KBS1의 아침드라마가 최고 시청률을 구가하는 셈이다. KBS는 물론 한국의 여타 지상파 방송에서도 낮은 시청률로 인해 아침드라마는 더 이상 방송되지 않는다. 그에 비교하면 지금도 15~16% 수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일본 아침드라마 힘은 세다. (참고로 요새 한국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KBS2 주말드라마 ‘다리미 패밀리’의 시청률이 15%대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 권장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드라마 보기다. 그중에서도 일부 일본인들은 NHK의 TV연속소설을 내게 추천했다. 한일 교류 모임에서 만난 일본인 A 씨는 “의학드라마나 사극은 단어도 어렵다”면서 “NHK 아침 드라마는 생활에서 쓰는 말도 많고 예쁜 말, 바른말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한국 아침 드라마에는 불륜과 치정, 출생의 비밀이 넘쳐나는 화끈한 스토리가 많다고 설명하며 NHK 아침드라마도 비슷한지 물었는데 A 씨가 손사래를 쳤다. “NHK에선 절대 막장을 다루지 않아요. 굉장히 수준 높은 드라마가 많아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슬쩍 자존심이 상했다. 흥, 막장 드라마도 수준 있는 것은 있다고요, 그리고 뭐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 길래…?


이후 여러 차례 NHK 드라마를 본 후 A의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 이해하게 됐다. 15분짜리 드라마는 보통 100~150부작 방송되는데 웬만한 프라임타임 시대극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갖추고 있다. 내가 봤던 NHK TV연속소설 중엔 여성작가나 여배우 등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게 많았다. 특히 지난해 방송된 ‘호랑이에게 날개’는 일본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훗날 판사가 된 미부치 요시코를 비롯해 1930~1960년대 활동한 1세대 여성 법조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한국 배우 하연수 씨가 한국인 유학생 최향숙을 연기해 국내에서도 주목받았는데,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화제가 됐다. 일본 정부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조선인 학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영방송인 NHK의 드라마에서 이 같은 시도를 한 것에 대해 용기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NHK 아침드라마는 수준 있는 게 맞다.


아침드라마 뒤엔 희극인 콤비인 하카타 다이키치와 하카타 하나마루, NHK인기 아나운서인 스즈키 나오코가 진행하는 토크쇼 ‘아사이치’가 이어졌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아사이치는 한국으로 치면 KBS1 ‘아침마당’과 비슷한데 시사적인 얘기도 많이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게스트로 당시 화제가 되는 유명한 연예인들이 꽤 나왔고, 생방송 중에 문자뿐 아니라 무려 팩스로 시청자의 의견을 받으며 이 내용을 방송 말미에 소개해줬다. 잘 알아듣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토크 내용의 10%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사이치를 보다가 대부분 집중력을 잃었고 바닥에서 뒹글거리다 다시 유튜브로 돌아가곤 했다.


아주 큰 인내심을 발휘하는 어떤 날에는 오전 9시 55분경 방송하는 ‘모두의 체조(みんなの体操)’까지 볼 수 있었다. 모두의 체조에는 주로 체조 시범을 보이는 3명이 등장한다. 여기에 동작을 설명하는 디렉터가 따로 있고, 가끔 피아노 연주자도 화면에 나왔다. 보통 1세트를 2번 반복하는 방식이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동작을 하는 3명의 조교 중엔 의자에 앉아있는 이가 꼭 한 명씩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서서 운동이 힘든 이들을 위한 배려일 거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모두’의 체조인 셈이다. 이 프로그램은 오전 9시 55분 외에도 식곤증이 올 무렵인 오후 1시 55분 다시 방송된다. 물론 동작은 같다. 전날 아침 봤던 동작을 다음날 오후에도 또 반복하는 식인데, 원래 체조란 게 효과를 기대하려면 그렇지 않겠나. 다만 간혹 오랜만에 보면 스튜디오의 배경과 배경음, 동작이 바뀌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 프로그램 관련 위키피디아를 찾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NHK는 1999년 시작한 모두의 체조 외에도 1928년부터 '라디오 체조'를 내보내고 있다고 한다! 체조 프로그램이 곧 100년이 되는 셈이다. 다만 내가 만난 다수의 일본인들은 NHK 모두의 체조의 존재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얘기를 하자 돌아가신 자신의 할머니가 시간에 맞춰 라디오 체조를 했다는 얘길 하는 이도 있었다. 평일 낮에 NHK를 보며 체조를 하는 이들은 주로 노인들이 많을 것 같다. 나는 모두의 체조가 나오기 시작할 때면 방바닥에서 오랜만에 배를 떼고 일어나, 동작들을 따라 했다. 5분간 체조를 마치고 나면 어쩐지 뿌듯했다. 이것이 바로 체조의 효과로구나.


내 1년간의 NHK 흘려듣기는 언어학습효과로 친다면 그냥 실패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흘려듣기에도 엉덩이 힘은 필요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시간에 동네 마실이나 다닐걸 그랬다 싶다. 하지만 어쨌건 빈둥거렸던 그 시간 덕에 NHK 오전 편성의 순서를 꿰게 됐다. 가끔 정신없는 어느 평일 오전 9시 55분쯤 피아노 소리와 함께 체조를 하는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흘려들었지만 추억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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