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분주한 시간, 등굣길에 작은 소동이 벌어진 듯했다. 안방 창문 너머로 연우와 친구들의 모습이 심각해 보였다. 무슨 일일까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연우의 자전거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연우는 매일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등교한다. 앞동에 사는 아이들로 셋은 어쩌면 한 몸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교우 관계가 가장 큰 관심사이자 걱정이다. 혹시나 친구가 없진 않을까,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을까, 혹은 상처받고 있는 건 아닐까.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다. 하지만 연우의 친구들을 보면 그런 걱정이 조금은 덜어진다. 함께 웃고 장난치고 때로는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 ‘아, 다행이다. 연우는 좋은 친구를 만났구나.’ 싶다.
아이들의 대화는 따뜻하다. “야, 그거 괜찮아?” “어제 숙제했어?” “너 그거 진짜 잘했다!” 어른들의 사회에서 듣기 힘든 순수한 응원과 위로가 오간다. 서로의 장점을 잘 알아주고 작은 성취에도 기쁘게 반응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여느 때와 같았던 아침,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연우의 자전거가 갑자기 멈춰 서버린 것이다. 헐컹해진 자전거 거치대가 고정되지 않아 힘을 빼고 너덜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자전거를 살펴보았다.
아이들이 시계를 확인한다. 등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지체하면 지각이다. ‘어떡하지?’ 하는 눈빛이 오가는 게 보였다. 나는 창문 너머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자전거가 고장 났다면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먼저 갈까? 아니면 같이 걸어갈까?
연우가 결정을 내린 듯 자전거를 세우고 자물쇠를 걸었다. 걸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를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친구들도 아무 말 없이 자전거를 세우고 연우를 따라 걸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망설임 없이.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찡해졌다. 초등학교 3학년,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아이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이미 깊고 단단했다.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가면 훨씬 편할 것을 알면서도 친구 혼자 걷게 둘 수 없다는 듯 발을 맞춰 걸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제법 크다. 초등학교까지 단지 안에서 걷는다고 해도 연우가 사는 동은 학교와 반대 방향 끝에 있다. 대략 1km가 넘는 거리. 게다가 등교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친구들은 연우를 혼자 두지 않았다. ‘같이 간다’는 선택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생각했다. 같이 걸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함께 걷는 것이 늘 당연한 것은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서로를 놓치고 만다. 때로는 너무 바빠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 싫어서, 때로는 그저 귀찮아서. 하지만 이 아이들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았다.
속도를 맞춰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친구의 걸음에 발을 맞춘다는 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다. 그것은 ‘너를 기다려줄게’라는 마음이다.
‘네가 힘들면 나도 천천히 갈게’, ‘우리 함께 가자’라는 작은 약속이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관계가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깊고 단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계산 없이 베풀고 거리낌 없이 손을 내민다. 손해를 따지지 않는 마음이 순수한 관계를 만든다. 어쩌면 초등학교 3학년의 우정이 가장 이상적인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바쁘고 각자의 속도에 맞춰 달리느라 정신이 없다. 때로는 누군가가 따라오기 힘들어하면 ‘미안하지만 난 먼저 가볼게’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서로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망설이지 않고 함께 걷는다. 친구가 힘들 때, 당연한 듯 발을 맞춘다. 그것이 초3의 의리다.
나는 창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였을까? 나는 그런 친구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