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끝에서 다시 나를 그리다
30대에 접어들고, 나는 그냥 순응하며 살게 될 줄 알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뭔가 되겠지.' 막연하게 그렇게 몇 해를 넘겼다.
하지만 30대는, 어쩌면 20대에 하지 못했던 방황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나의 30대는, 20대에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천천히 되갚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방황은 나에게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나는 일을 그만뒀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는 묻고 또 물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처음 교사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주변의 만류가 이어졌다.
그래서 '1년만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했고, 그 시간 동안 그림과 일을 병행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채우고 싶었다.
결국 그다음 해,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곧 찾아온 건 해방감보다 막막함이었다.
'그만두면 뭔가 되겠지'라는 기대는 오히려 더 깊은 불안을 만들었고,
내 마음은 점점 그림자 속으로 향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이어졌고,
짧은 다른 일을 거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잠시 머물자'는 생각으로 다시 일했고, 또다시 그림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와의 약속을 하나 정했다.
10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그림을 그리자.
그 과정을 통해 나에게 가장 깊이 남은 순간은,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을 그림으로 풀어낸 기억이었다.
그 시절을 담은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브런치에 글로 남겼는데,
지금도 다시 보면 나도 모르게 감성 지수가 높아진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익숙하고 다정했던 풍경과 사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그림 위에 조용히 펼쳐질 때면, 그 순간은 단순한 창작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을 꺼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미술교사로 일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선생님, 그림 잘 그리세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그 말을 들으면 꼭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게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학교 강사로 전환한 후, 인물 위주의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여러 사물들도 엽서처럼 그리며 조금씩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줄어들었고, 강박도 옅어졌다.
그러면서 확신이 생겼다.
'그냥 나만의 방식대로 그리면 되는 거구나.'
'내 그림은 내 감정과 손끝의 흐름이 남긴 색감이구나.'
그림뿐만 아니라 글도 함께 시작했다. 브런치에 100일 동안 그린 그림 일부와 함께 감성 에세이를 올리고, 가상 전시와 온라인 강의 플랫폼의 제안을 받아 혼자 녹화해 업로드하기도 했다.
그 모든 시도들은 결국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무언가'에 조용히 시간을 투자하며 기다리는 과정이었다.
그 기다림 속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건 '필사의 시간'이었다.
책 한 권을 손으로 필사하고, 좋은 문장을 캘리그래피로 옮기며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꺼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학교로 돌아가 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또다시 느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올해는, 다시 내 시간을 나에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처럼 조급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나는 조금씩 자라 있었다.
30대 후반. 나는 불안정한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나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게 뭐니?"
"너는 도대체 누구니?"
빨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감정의 깊이가 생겼고,
불필요한 고집은 한풀 꺾였으며,
무엇보다 '나만의 것'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 기다림은, 해질 무렵 붉게 물든 하늘처럼
말없이 조용히 나를 바꾸고 있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결국 나에게 가장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