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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솔트 Oct 14. 2023

마흔 고개

열정과 능력치를 끌어올려~~

 코시국! 능력을 키울 때


코로나 시국 때에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갇히게 되었고 많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일단 아이들이 다들 초등학생이었기에 줌수업을 도와주며 집에 있지만 오전시간에는 매우 바빴다. 

그것도 계속 바쁜 것도 아니고 같이 수업시간에 지키고 앉아있는 게 가장 큰 업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언제 컴퓨터에서 튕겨져 나갈지 모르니 대기하고 선생님이 바로 안 보이니 아이들의 책상밑 딴짓을 막아야 했기에 엄마의 감시의 눈초리가 더더욱 큰 업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 수업인지 내 수업인지 분간이 안 갈 때쯤 크나큰 현타를 느끼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들의 담임이 내주는 수업시간에 과제를 내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입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너무 아이들의 수업에 과몰입이 되고 말았다.

나의 과몰입 방지를 위해 뜻하지도 않게 사회복지사 자격증 따보기로 시작하였다.

아이들 수업시간에 시끄럽게 살림을 하거나 티브이를 행위는 무척 방해가 되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학위를 따는 공부를 시작하니 나에게 집중을 하게 되어 좋았다.

코로나 시국 2년 동안 인터넷 강의를 돌린 결과 착실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사회복지사를 따면서도 블로그 포스팅을 하거나 유튜브영상편집, 주식공부등 잡학다식하게 공부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2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1일 1 포스팅을 하면서 매일 포스팅을 하면서 애드센스 취득도 한 번에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여기 브런치공모전에도 글을 써서 공모를 하게 되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는 것이 좀처럼 어렵다던데 이것도 한 번에 작가가 되었다.

유튜브는 딱히 기획할 만한 콘텐츠가 없어 영상편집기술을 짧게 배우는데 그치고 말았다.

주식공부는 할 말이 많지만 일단 경제공부 많이 한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블로그포스팅은 2년 후 한 번도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궁금해서 들어가 보면 커피 한잔값이 매달 들어와 있다. ㅎㅎ 2년을 불태운 결과 죽을 때까지 한 달에 한번 커피는 구글이 사주는 결과를 획득한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또 언젠가 백수가 되거나 시간이 많아지면 다시 블로그로 돌아가 포스팅하면 되니 왠지 돌아갈 직장이 있는 기분이다. 이번에는 꼭 한 달에 한번 치킨 사 먹을 수 있는 포스팅 해보리라 은근 백수의 기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경단녀에서 사회복지사까지



3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14년 동안 사회생활을 담쌓고 살았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기대감과 설렘, 반!

내가 진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반!

양가감정이 요동을 쳤다.

일단 지르고 보는 성격이라 조심스레 이력서를 한 곳에 넣어 보았다.

알바개념으로 월, 토만 사람을 뽑는 곳이었다.

아직 막내가 어린 상태라 토요일은 아빠가 아이들은 보면 되고 월요일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시작하였다.  주 2회 정도 일을 하니 삶에 활력이 돌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사회구성원으로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첫 월급을 타던 날, 너무 좋아서 바로 적금을 들기 시작했다.

14년 만의 첫 적금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는 것도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러던 중 센터장님의 권유로 막내 2학년초기에 전일제로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경단녀인 나를 인정해 주어서 전일제로 일할 수 있게 해 준 센터장님이 고마웠다.

하지만 막내가 돌봄 교실에 자리가 있을지 확정이 되지 않아 대기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부모님 둘 다 일하고 다자녀 특혜로 우선순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럴때엔 "다자녀 만세" 다.

걱정반, 기대반 드디어 주 5일  근무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고 나는 출근준비를 하는 분주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은 등교를 하고 나는 출근을 하면서 '아 소속감이란 게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14년 만의 회식



"선생님은 혹시 회식하면 참석 가능할까요?"

센터장님의 우려 섞인 질문이었다.

"일주일 전에만 말씀해 주시면 시간을 맞춰 보겠습니다."

어떻게든 회식에 참여하고픈 의지의 답이었다.

그렇게 신랑의 공조와 아이들의 협조로 나의 14년 만의 설레는 첫회식을 갖게 되었다.

매우 흥분상태였고 머릿속에서는 몇 차까지 가자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 걱정은 한 시간 안에 끝나고 말았다.

일단 모두 술을 먹지 않았다.

사회복지사의 회식이라 그랬을까? 매우 경건했다.

평소 처진 분위기를 못 참는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2차는 노래방 가나요? 다들 어떤 노래 좋아하시나요?"

모두 한 템포 늦게 어색하게 웃는다.

"선생님은 아직도 20대 같네. 무슨 2차야 밥 먹고 집에 가야지... 안 피곤해?"

그러고 보니 모두 다들 표정들이 일의 연장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만 오랜만에 회식에 신났나 보다.... 실망이 매우 컸다.

그 후 회식자리는 안 가게 되었다.

회식이 8시 30분에 끝이 났다. 집에 오니 9시였다.

"어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 모두 피곤해서 1차만 하고 갔어"

"ㅎㅎㅎ 신의 직장이네 회식도 엄청 짧고 매우 바람직해"

신랑은 아주 건전하고 좋은 회사라며 좋아했다.






마흔 고개 초입에 진입한 나는 뭔가 늙어가는 입구의 문을 연것 같아서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공부하며 나를 키워 나갔다.

어떤 것은 끝까지 마스터하여 자격증도 따고 그걸로 취업까지 하게 해 주었고, 어떤 것은 나의 어릴 적 꿈인 '작가'가 될 수 있게 그 밑바탕을 깔아 주었다. 


지금도 마흔 고개 그 초입 급경사 부분에서 헐떡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 시간 또한 일 년 뒤 나의 큰 밑거름의 일부분이 되리라 생각한다.


마흔이지만 아직은 20대처럼 놀고 싶고 20대처럼 공부하고 싶은 나!!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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