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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Jan 29. 2024

<소설 티처스-안녕하세요, 선생님!> 13화

13화.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기

  두 번의 경찰 조사를 받고 나서 은혜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한없이 무기력해졌고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져다. 입맛도 없었고, 겨우 먹은 것은 설사로 내보냈다. 은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깊숙한 어딘가에서 자꾸 은혜를 끌어당겨서 깊숙이 침전해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붙잡고 있기가 힘겨워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널뛰기를 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두 달이 넘는 상담과 이러저러한 약물 치료에도 은혜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K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대학병원의 정신의학과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동안 경과가 너무 안 좋아요. 호전되는 기미가 전혀 없고 증상이 심해지니 제가 의사로서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이건 순전히 의사로서 책임감이자 제 성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대학병원에서는 환자분께 맞는 약을 면밀하게 조정해 나가기도 훨씬 수월해요.”

  “전 선생님께 계속 진료받고 싶어요. 또 다른 병원에 가서 새로운 의사에게 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도 힘들고, 그냥 선생님이 진료해 주시면 안 될까요?”

  “환자분의 약물 치료 부작용을 줄이는 것도 그렇고, 대학병원 진료를 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진료했던 내역서와 소견서를 제가 상세히 적어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진료 내역과 소견서를 두툼하게 받아 들고 나오면서 은혜의 마음은 더욱 가라앉았다. 대학병원 진료도 다 필요 없고 자꾸만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은혜를 걱정하며 기도해 주는 셀리더 김미연 집사님이 예배 후에 교회 카페에서 잠깐 만나자고 했다. 은혜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것 같아서 호박죽을 만들었다면서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미연은 교회 사모님한테 은혜의 힘든 상황을 전해 들은 뒤, 매일 은혜를 위해 기도하며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집사님, 정말 너무 감사해요. 근데 이렇게 번번이 안 챙겨주셔도 돼요.”

  “부담 갖지 말아요. 선생님이 내 막냇동생 같은 마음이 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입맛 없을 텐데 이거라도 꼭 먹어요.”

  “너무 감사해요. 집사님.”

  “병원 진료는 잘 받고 있죠? 잠이 안 오거나 우울증이 심해지면 약을 바꿔 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해야 해요. 자신한테 맞게 약을 맞춰나가는 게 중요해요.”


  미연은 둘째 딸을 병으로 몇 년 전 하늘로 먼저 보내고 정신의학과를 다니며 우울증 치료를 오랫동안 받고 있었다. 은혜를 처음 만난 날, 미연은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자식 먼저 보내고 어미가 어떻게 사냐고. 자기 같으면 못 살 것 같다고. 그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몰라요. 그럼 나도 죽어야 하냐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잘못이냐고.”

  미연의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혜는 큰 위로를 받았다.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다 해도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지나치게 절망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힘든 사람을 위로하고자 자신의 가장 큰 아픔과 상처를 기꺼이 내보여준 미연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에 더할 나위 없이 큰 감사함을 느꼈다. 마음의 병을 앓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의 병을 더 세심하게 살필 수 있는 법이었다. 미연과 만난 건 몇 달이 되지 않지만, 은혜는 그 누구보다 미연을 가깝게 생각했다. 은혜는 진료하던 의사가 별다른 차도가 안 보이고 상태가 안 좋다며,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다녔던 A 대학병원 정신의학과 괜찮아요. 얼른 전화해서 예약부터 해 봐요.”

  미연의 말대로 다음 날 은혜는 A 대학병원에 전화했다. 한 달 정도 대기하면 첫 진료가 가능하다고 직원이 말했다. 생각보다 대기가 짧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은혜는 예약 날짜를 잡았다.     

     


  길고 지루한 장마 끝에 숨을 고르며 찾아온 8월의 무더위는 늘어진 테이프처럼 세상을 하염없이 이완시켰다. 은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 더 이상 매몰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했다. 예전부터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통영으로 잠깐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은혜의 집에서 아주 먼 거리였지만,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버스와 숙소 예약을 바로 했다.      


  고속버스로 네 시간 정도 걸려 통영에 도착했다. 은혜는 숙소에 픽업 서비스를 요청해서 짐만 미리 보내놓고, 저녁 늦게까지 여기저기를 다녔다. 우선 이순신 공원에 가서 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산책로 옆으로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동피랑에 들렀다 서피랑에도 갔다. 서포루에 올라가니 통영 시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 보였다. 강구안의 절경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저녁 무렵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운치를 더했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와 8월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하염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성취하여 대단히 성공하고, 신나고 좋은 일이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은 단조롭고 지루하게만 느꼈었다. 아동학대 신고를 당하고 경찰 조사까지 받는 엄청난 일을 겪다 보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정말 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하루 무탈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게 가장 큰 행복이란 것을, 이렇게 엄청난 일을 겪고 나서야 알다니 자신이 얼마나 우매한 인간인지 자각했다. 은혜를 덮쳐버린 이 거대한 파도가 잠잠히 가라앉아 더없이 평온하고 잔잔한 물결로 어서 빨리 바뀌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다음 날은 숲을 걷기로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서 미래사와 편백나무 숲을 지나 용화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계획을 세웠다. 숲길에서 용화사 쪽으로 가고 있는데, 저 밑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한 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은혜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은혜 스스로도 놀랐다. 그 감정이 두려움이었는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일부 아이들의 왜곡된 진술로 인해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는 은혜에게는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이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육복을 입고 올라오는 아이들 뒤로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 따라오며 지도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한 손에는 집게와 다른 손에는 검정 봉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환경정화 봉사활동을 하는 중인 듯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시시덕거리며 신나 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은혜를 그냥 스쳐 지나갔는데, 끄트머리 그룹의 한 남자아이가 은혜를 보며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얼떨결에 은혜도 “으응... 안녕!”이라고 답했다. 같이 지나가던 다른 아이가 인사를 건넨 아이에게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라고 말하는 소리가 은혜의 뒤로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한 인사일 뿐인데, 조금 전에 아이들을 보며 들었던 움찔한 마음이 사라지고, 은혜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오후에는 자전거를 빌려 수륙해안로를 달렸다. 자전거 타기에 길도 잘 되어 있었고, 바다와 섬 풍경을 보며 달릴 수 있어 너무나 예쁜 길이었다. 산과 바다와 숲을 모두 즐길 수 있는 통영으로 떠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중앙시장 구경도 했다. 여러 가지 음식을 보니 오랜만에 입맛이 돌았다. 횟집에 들어가 광어회와 곁들일 쌈류를 포장해서 숙소로 포장해 왔다. 숙소 일층 공용공간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 테이블을 막 치우고 일어나려는데, 은혜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대학 선배인 혜진이었다.      

  “뭐 해? 요즘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 연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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