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오 년 전쯤에 문학 강연에서 도종환 시인을 뵌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시인이 정치인이 되었을 때는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12년간 정치를 하면서도 계속 시를 쓴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노작문학축전의 <선생님을 위한 시인과 함께 걷는 노작 시숲길> 프로그램을 통해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도종환 시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사실 정치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지, 시인은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9월이지만,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무더운 토요일 아침 9시. 강연은 홍사용 문학관의 야외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놓은 간이 의자에 강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강한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강연 전에 관계자는 오른쪽 의자에 햇살이 비추어 뜨거우니 청중들에게 그늘진 왼쪽 의자로 옮기라고 안내했다.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햇빛은 점점 관중석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함께 했던 강연 내용과 강연 자료를 중심으로 시인의 이야기를 정리하려 한다.
강연 첫머리에서 시인은 윌리엄 헨리 데이비즈의 시 "여유"를 소개하며 말한다.
"시가 우리에게 묻네요.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이 있는데 여유 없이 사는 것이 인생이냐고. 내 인생의 시간표는 내가 짜야하는 것이죠. 지금 여러분은 인생의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나요?"
시는 우리에게 '지금은 어떤 시간인가?'라고 묻는다.
도종환 시인은 얼마 전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출간했다. 알베르 까뮈는 정오를 가장 밝고 환하고 따뜻하며, 균형의 시간, 중용의 시간이라고 했다. 도종환 시인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은 어둡고 두렵고 살벌한 극단의 시간, 죽음의 시간, 균형이 깨진 시간이라 말한다. 시대는 점점 사나워지고, 사람들은 분노와 혐오, 막말을 마구잡이로 분출한다며, 시인은 지혜 없는 용기, 영혼 없는 정치, 혐오와 조롱의 언어가 범람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통탄했다. 스승이 없는 시대, 지도자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길 없는 길을 맞닥뜨렸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시간, 성찰의 시간을 뜻한다 했다. 절제 없는 언어가 넘치는 시대에 의로운 분노 외에도 지혜와 용기, 절제, 정의가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시인은 강조한다. 신경림 시인의 '길'을 인용하며 스스로 성찰하며 다시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 신경림, '길' 중에서 -
시는 '너는 거기 왜 있는가' 하고 묻는다.
도종환 시인은 평교사 출신 최초 국회의원으로 2012년 5월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 수많은 화한을 받았다고 했다. 그중에 근조 화환이 있었다. 배달 온 꽃집 기사가 근조 화환을 들고 와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시인은 괜찮다고 놓고 가라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직업도, 명예도, 돈도 부족하지 않은데 왜 정치를 하냐고 만류하기도 했다. 이제 시인 도종환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낸 근조 화환. '시인이 왜 거기에 있는가?' 시인은 매일매일 그 화환의 꽃을 옮겨 심어 물을 주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그 꽃을 보며 '나는 오늘 살았었나, 죽었었나.' 생각했단다. 정치를 관두고 12년이 지나 그 꽃을 갖고 나왔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겪었다고 했다. 언론의 허위 보도에 최대 5배의 손해배상을 물리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에서 여야가 대립했을 때, 도종환 위원장을 둘러싼 당시 야당 국회의원 중 한 명이 시인에게 '이런 게 무슨 시인이야!'라고 시인에게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시인은 생각했고, '소금'이라는 시를 썼다.
소금
- 도종환
썩어가는 것들과 맞서면서
여전히 하얗게 반짝일 수는 없다
부패하는 살들 속에서
부패를 끌어안고 버티는 동안
날카로운 흰빛은 퇴색하고
비린내는 내 몸을 덮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금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경전은 거룩하게 기록했으나
이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비린내 나는 세상을 끌어안고 버티는 일
버티다 녹아 없어지는 일
오늘도 몸은 녹아내려
옛 모습 지워지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금이야 한다
생선 가게의 생선 위에 뿌려진 소금은 생선의 부패를 막기 위해 검게 색이 변한다. 그렇게 색이 변했다고 해서 소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시인은 '국회에서 시가 어떻게 써져요?"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고 했다. 정치를 하면서 영혼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단다. 정치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참 힘들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어려웠다고 한다.
시는 메마른 영혼에 물을 주고 있는지 묻는다.
시인은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 39'를 소개하며 좋은 시는 영혼에 물을 준다고 했다. 이런 시를 읽으며 생의 슬픔과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가만히 관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탄잘리 39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마음이 굳어지고 메말랐을 때 자비의 소나기와 더불어 나에게 오소서.
삶이 우아함을 잃었을 때 샘솟는 노래와 함께 오소서.
소란스러운 일이 사방에서 소음을 높여 저 너머의 세계로부터 나를 차단시킬 때, 나의 침묵하는 님이여, 당신의 평화와 휴식을 가지고 나에게 오소서.
걸인 같은 내 마음이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때, 나의 왕이여, 문을 부숴 열고 왕의 위엄을 지니고 오소서.
욕망이 헛된 생각과 미혹으로 마음을 눈멀게 할 때, 성스러운 이여, 언제나 깨어 있는 이여, 당신의 빛과 천둥을 동반하고 나에게 오소서.
작가들은 자기가 이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고른다고 상상한다. 정반대로 이야기가 작가를 골라낸다. 이야기 자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라고 명령한다. - 아룬다티 로이
시인은 아룬다티 로이의 말을 인용하며 작가가 산과 강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산과 강이 작가를 선택한다고 했다. 작가가 강을 필요로 하듯이 강도 작가를 필요로 한다고. 현기영 작가가 제주 4.3 항쟁을 선택한 게 아니라 4.3 항쟁이 현기영 작가를 선택한 거라고.
시인이 어느 날 사람들과 걷다가 금계국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계국의 모습을 보며 비가 오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생각하다 시 한 편을 썼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도종환 시인의 대표적인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강연은 매우 짜임새 있었고, 도종환 시인은 직접 여러 편의 시를 낭송하며, 진솔한 경험과 묵직한 화두를 부드럽고도 명확하게 전달하여 깊은 울림을 주었다. 강연이 계속되면서 해는 점점 하늘 위로 떠올라 관객석의 대부분을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강연의 중간중간 시인은 햇살을 피해 의자를 옮기는 시간을 주었고, 해시계 바늘처럼 관객석은 점점 왼쪽으로 이동했다.
정작 시인은 자신의 얼굴에 비치는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관객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연단에서 내려와 말을 이어 나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관객석에서 강연자의 앞뒤 위치를 바꾸자는 제안이 나왔고, 그제야 시인도 그늘에 서서 강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시인이 관객에게 보여 준 따뜻한 배려가 무엇보다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다.
시는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고단하고 쓸쓸한 삶 속에서도 시는 용기를 잃지 않게 한다. 이 가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시집 한 권을 음미하며 읽고 싶어졌다.
<도종환 시인이 햇빛을 피하려 움직이는 청중들을 따라 강단에서 내려와 이동하며 강연을 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