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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Oct 24. 2021

명곡들은 코드가 네 개밖에 없어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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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는 에너지를 만드는 발전기가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발전기란 동기 에너지원이라는 감정을 넣어, 결실 에너지라는 감정을 생산해 내는 직업 또는 놀이, 사랑, 운동 등 모든 다양한 형태의 <행위>를 말한다.

 

내 친구 놈 중 한 놈은 <저 놈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할 만큼 늘 우울함에 빠져 산다. 하지만, 때때마다 이 녀석이 내놓는 곡이 명곡이다.


그가 가진 여러 동기 에너지 중 <우울함>이 녀석의 주원료인데, 다행히 아직까지 우울함에게 목숨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주인 자리는 내어 주지는 않았다. 게다가 녀석은 쉽게 연애할 수 없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성애를 자극시켰는지 요 근래는 마음마저 예쁜 사람과 연애도 시작했더라.


또 한 놈은 2016년 4월의 비극 이후 진상규명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또 감춰지는 형국을 보고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 감정, 분노를 동기 에너지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에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강력한 힘을 지금껏 한 번도 좌절한 적 없이 사회를 보다 진보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내게도 아주 힘이 센 발전기가 있었다.

내 발전기는 콤플렉스를 주원료로 작동했다.


90년대 그 시절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평소 모친은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 부르며 내가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고, 어떤 때는 콘센트를 뽑아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시대가 방영하는 시간에는 가만히 내 옆에 앉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훈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저 양반들 전부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신문배달, 우유 배달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아이가> 라며 나를 교육시켰고, 이를 공식화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이 하지 않던 파지 줍기, 신문 돌리기, 전단지 붙이기 같은 것들을 나는 어릴 적부터 성공한 사람 양성 과정처럼 여기며 나름의 비장함으로 임했다.


하지만, 사실  일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매일 밤마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거리 위에서 했다. 나와 누나는  시간 동안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들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했고, 손님 마수 못하는 날은 있어도, 수필을 멈춘 적이 없는 모친은 그날  따끈  시를 낭독해주기도 했다.  여름에는 반으로 갈라 먹는 커피맛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가 있었고, 날이 쌀쌀한 날에는 실비집에서 땡초 듬뿍 들어간 칼칼한 시래깃국을  숟갈 크게  이빨로 끌어 먹는 맛으로 그렇게 나는 씩씩하게 리어카를 끌고 시장을 돌며 파지를 주우러 다녔다.

매일 밤 조금씩 조금씩 쌓아 놓은 파지 더미가 비닐로 덧씌운 창고문으로 기울어 배불뚝이처럼 볼록 튀어나오면 커다란 리어카에다 모조리 옮겨 싣고서 고물상으로 향했다.


한 번은 주말 아침, 파지를 산처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낑낑 끌어 고물상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길을 지나던 같은 반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눈을 피했고, 이 부끄러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일까 어리둥절하다, 학교 아이들의 놀림에 부끄러워하는 나를 발견하였고, 그날 내가 맛본 그 저린 맛이 바로 <빈부격차>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부터 가난은 나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부정적 편견을 지우고 에너지 그 자체로 콤플렉스를 보자면, 콤플렉스는 힘이 세다. 꽤나 탁한 원료였기에 발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돌아갔지만, 예상대로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기기 위해 내 콤플렉스와 더불어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을 발전기에 처넣었고, 작동을 극대화했다.

 

그것으로 나는 외형의 혁명을 이루어 나갔고, 발전을 통해 나르시시즘이라는 결실 에너지를 생산해냈다. 하지만 이 승리에만 치우친 오만한 에너지로는 지속해서 작물을 키울 수가 없었다. 열매 맺은 나무들은 머지않아 썩어버렸고, 싹을 틔워 자라던 것들도 이내 시들어버렸다. 먹을 것이 사라진 곳에는 노래하는 새도, 사냥하는 동물도 찾아오지 않았고, 땅을 일구는 벌레도, 청소하는 파충류도 결국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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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끝 수월봉에서 바라보는 환상적 일몰과 아름답게 분절된 밭의 경계, 그리고 산책 길에 종종 마주치는 돌고래의 행진을 경이롭게 지켜볼 수 있는 곳, 한경면 고산리에서 처음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이곳에 지내며 돈에 대한 걱정은 처음 예상과는 달리 크게 들지 않았다. 제주거지라는 이름으로 사는 삶은 매우 홀가분했다. 행색뿐만 아니라, 이름부터 가진 것이 없으니, 누구도 내게 돈 좀 빌려달라는 무리한 부탁이나, 밥 한 끼 얻어먹으려 억지 부리는 사람이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와 *우프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숙식을 해결하는 물물교환 방식의 여행은 풍요롭기까지 했다.


돈 버는 일은 돈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했다.

내가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지를 알면 일을 고르기도 수월했다. 자고 먹는 것이 해결되고, 시골 촌구석에서 입고 치장하는데 돈 쓸 일이 없으니, 내가 필요한 돈의 양은 하루 이틀 정도의 데이트 비용이면 충분했다.


*우프_ 글로벌 유기농가 커뮤니티 World Wide Opporyunities on Organic Farm

 

한 달에 일주일 정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나갔다.

돌담 쌓는 일, 2만 평 무밭에서 돌부리 뽑는 일, 귤 선과장에서 까대기 하는 일. 어떤 것은 힘에 부치고, 또 어떤 것에서는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 했다.


한 번은 지내던 게스트하우스에 우쿨렐레를 가지고 온 손님이 있었다.


<저렇게 앙증맞고, 간단한 악기가 있다니>


유년 시절 때부터 노래 부르길 좋아하던 나였다. 그때부터 내 여행에는 항상 우쿨렐레가 함께 했다.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 하나 둘 늘고, <명곡들은 코드가 4개밖에 없어>라는 말에 용기 내어 단순한 코드 몇 개에 내 여행기를 입혔다. 나름 싱어송라이터의 요건을 갖추게 되었는지, 어느 가난한 예술가가 살았던 곳, 이중섭거리 플리마켓 무대에 초대받았다. 현악기인지 타악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내 우쿨렐레 연주와 험악히도 이기적인 노래를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었던 고마운 사람들과 거리는 그날 내게 공연비로 10만 원을 주었다.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는 내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노래를 해서 돈을 번 기쁜 날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한다>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니 돈이 벌렸다>로 일과 돈 사이에서 주객의 전도가 일어난 변곡점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내 이야기와 여행에서 받은 영감을 소재로 계속해서 노래를 (한 곡에 코드를 여섯 개 이상 쓰지 않고, 아니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고) 만들었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내 노래가 흘러나오고, 나를 초대하는 무대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하나둘씩 생겼다.


그리고 <내 노래에 위로받아 사는 날을 좀 더 연장했다>는 피드를 받으며 표현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이날의 경험으로 <일은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한 것>으로 삶의 맥락이 또 한 번 크게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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