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에선 웅웅 대는 소리가 짧은 파도 소리와 어우러지고 있다. 영감을 일깨워준다는 주파수. 효과가 증명되었는지 알 길 없는 이 소리를 켜놓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오늘은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어제도, 그제도 글 한 편 완성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은 오늘의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무엇이든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주파수에 집중하며 저 구석 어딘가에 고꾸라져 있을, 가느다란 실낱같은 무언가가 걸리길 바라고 있다.
주파수가 정말 효과가 있는지 영감 하나가 솟아오른다.
‘배고픈데 사과를 하나 깎아 먹을까.’
이건 그냥 딴생각이고, 단지 허기를 느끼는 나를 알아차린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글을 쓰자고 책상에 앉은 뒤 5분이 되지 않아 발걸음을 냉장고로 움직이고 주섬주섬 사과를 꺼내 싱크대로 향한다.
이왕이면 영감이라는 녀석도 사과처럼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며 사과를 씻는데 남편이 백화점에도 같은 제품이 놓여 있다며 자신의 안목을 자랑하게 만든 주방용 세제가 눈에 들어왔다. 무려 과일, 채소 세척용. 비싸다고 툴툴댔던 이유가 이거였나 싶어 그렇다면 한번 써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펌핑을 한번 하고, 뽀얗게 거품을 일으켰다가 헹궈내기 시작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사과에 윤이 날 때까지.
어차피 껍질을 벗겨 먹을 사과를 왜 이리도 정성스럽게 씻고 있는 걸까. 그야 물론, 세제를 덜 헹구면 껍질을 깎다가 거품이 사과의 속살에 묻을 테고, 그러면 세제를 먹게 되니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사과를 뽀득뽀득 씻는다.
세제를 먹게 될 게 걱정되었다면 애당초 전용 세제로 씻을 필요가 있었을까. 전문가라는 어떤 사람들은 물로만 씻어도 농약 같은 것들 대부분이 씻겨 나간다고 했는데, 또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초를 풀고, 농도가 낮으면 의미 없다는 말이 기억나 식초를 계속 추가한다. 그게 아니면 오늘처럼 세제를 풀어 굳이 껍질을 먹지 않을 과일을 씻거나.
도대체 난 어떤 말을 믿고,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어떤 걸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걸까. 사과를 뽀독뽀독 씻으면 거품이 사라지고 윤이 나던데. 진실도, 마음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 반짝거릴까. 이것이 진짜라고 명확해질까. 열 길 물속을 아는 것보다 어려운 한 길 사람 속이라 쉽지 않겠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겠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작은 통에 담겨 있는 세제를 보고 있는 나에게 이걸로 씻어야 농약이 말끔히 씻긴다더라 하길래 ‘굳이 이런 세제 쓰지 않아도 물에 10분만 담가두면 다 씻긴대’ 했다가 그럴 리 없다는 친구의 눈빛을 받았다. 안 믿으면 어쩔 수 없지. 한 길 사람 속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보고 싶은 것을 보려는 마음이 있으니까. 생각해보니 나조차 안 믿었던 그 날 그 말의 진실이지 않았던가.
일본 영화 <라쇼몽>을 보았다면 아마도 그때의 내가 받았던 충격을 똑같이 경험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같은 사고 현장을 봤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이 제각각 달라서 놀랐던 경험. 일어난 사건은 딱 하난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진술하고 해석하는 것은 여러 개. 상황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쉽게 각색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것.
교수님께선 이때 역사가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진실은 분명 존재한다며 그러니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나 지금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은 건, 교수님, 진실이 과연 있는 걸까요? 니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There are no facts, only interpretations.(진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
세상의 말이 진실이라 믿었고, 뉴스에서 나오는 전문가들의 말이 진실이라 믿었고, 책 속에 담긴 것들이 진실이라 믿었는데 이즈음 살아보니 세상의 말에도 진실이 아닌 것이 있었고, 뉴스에서도 책 속에서도 일부만 진실이거나 진실인 척하고 있거나 진실이길 바라며 애써 아전인수 하고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내가 바보였지. 결국 몇 번 데이고 나서야 ‘진실 개인주의자’가 됐다. 모두 저마다의 진실이 있고, 진실이라고 믿는 사회의 약속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생각. 나는 이런 생각에 빠져 있고, 지금은 이것이 그나마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나중에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문득 두려워진다. 저마다의 진실이 있다는 말이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마저도 하지 못하게 만들까 봐. 거짓을 진실로 붙들고 살았던 지난날들에 대한 면죄부가 될까 봐.
나는 분명 글을 쓰려고 했는데 사과를 먹고 있고, 사과를 먹으며 진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귓속에선 웅웅 대는 소리가 짧은 파도 소리가 어우러지고 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 글의 시작 문장.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요즘과 비하면 꽤 의미 있는 사건이다. 글은 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그 한 문장이 어떨 때는 제법 마음에 드는 생각을 끄집어내도록 도우니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말은 진리이자 진실이다. 걸어가고 싶은, 걸어갈 이유가 있는 천 리 길의 한 걸음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또 진실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진리인 양 내 것으로 만든 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는데 오늘은 물꼬가 트였으니 글이 됐든 죽이 됐든 뭐든 써내거나 쒀낼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이 웅웅 대는 소리가 정말 영감을 주는 게 맞구나 하면서 또 다른 나만의 진실을 만들어내고, 그 진실을 믿으며 내일도 모레도 웅웅 대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을 것이다. 진실이 진리가 되면 인간은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되니까.
사과와 진실. 이 두 단어에 정신이 팔린 지 30분이 흘렀다. 웅웅 대는 소리와 파도 소리는 30분이면 끝이 나고, 그럴 땐 귀에 꽂힌 이어폰을 두 번 두드리면 다시 30분 동안 재생이 되는데, 툭툭 두드릴 때 제법 소리와 진동이 커서 귀가 아프곤 했다. 하지만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조작하는 건 더 귀찮은 일이라 그냥 두드리는 동작으로 다시 주파수를 재생시키고 꾹 손가락을 대고 있으면 재생되는 걸로 바꿔주실 수 없을까 하는 바람을 마음속으로, 그것도 한국어로 하고 있으니 그 바람이 이뤄질 방법이야 요원하겠구나 싶다.(사과 직원분들, 혹시 제 바람이 들리나시요?)
적어도 바람을 이루려면 간절함이나 행동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행동에 간절함마저 더해지면 금상첨화로 효과가 있겠지만, 어떤 바람은 그저 지금처럼 마음속에서 한번 내뱉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어쩌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아서겠지. 간절하지 않으니까 간절함은 없을 거고, 행동하는 거야 귀찮아서 안 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바람은 그렇게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한번 고개를 들었다가 사라져 버릴 바람이어도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바람이라도 바라고 상상해볼 수는 있는 거니까. 그렇지 않나요? 이건 진실이라고, 그동안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말해주니까요.
어쩌면 그날 교수님께서도 완전무결한 사실로서의 역사를 규명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역사에 첫발을 디딘 젊은이들이 불가능하지만 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하라는 당부를 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각자의 진실이어도 진짜 진실에 가까운 합당한 것을 진실로 믿으라는 바람을 담아 꺼낸 말씀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쓸데없는 바람이라도 바라보고 상상해보는 거다. 쓸데있는 바람이 되고, 현실이 될 때까지. 그러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되고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음, 어떤 것들은 분명 행동하게 만들고, 말하게 만들고, 간절한 마음을 더하게 만들어서 다행이다. 나는 눈을 뜨고 있고, 소리를 듣고 있으며, 심장은 아직 뜨거우니까.
하고 싶은 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여기선 상관없는 이야기니 자제해야지. 그렇게 갓길로 새려는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글을 쓰고 있노라니 장이 부글거린다. 민망하지만, 글을 쓰고 있어서도, 무언가 강한 열망이 나를 들끓게 해서도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고, 비위가 약한 분이거나 무언가를 먹고 계신 분이라면 앞으로 한 단락은 건너뛰어 주시길 바란다.
사과의 서걱거리는 식감을 좋아하지 않은 내가 아침에 사과를 먹기 시작한 건 며칠 화장실을 못가 볼록해진 배에 사과 한 알을 추가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화장실을 갈 수 있었던 경험 때문이다. 숙변을 몸 밖으로 배출하고 난 뒤 사과가 예뻐 보였고, 사과에 어떤 효능이 있나 찾아보았을 때, 사과에 들어있는 펙틴이라는 성분이 배변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침 사과 한 알의 효능은 내게 진실이 되었다.(교수님, 이 정도면 한때 역사학도였던 사람으로서의 자질은 갖추고 있는 거지요?) 그랬는데 변비가 있다는 지인은 매일 사과를 먹고 있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며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고, 진실은 또 나만의 것, 제각각의 모양대로 저만의 것. 아, 이 어쩔 수 없는 진실의 아이러니.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진실 찾기가 어려웠던 때는 없는 것 같다. 누구는 이게 옳다 하고 누구는 저게 옳다 하고, 누구는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고, 누구는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고. 누구는 증거가 있다는데 누구는 거짓 증거라 하고, 모함이라고 하고. 진실이 아무리 제각각의 모양대로 저만의 것으로 자리 잡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극과 극이면 이게 과연 진실일까?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사람과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공존했던 시대. 지금이 그런 시대일까?
진실이 왜 자꾸 여러 모양이 될까. 생각해보면 그건 인간의 본능이자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자꾸 이야기를 보태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인간의 본능과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어렸을 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게임은 네댓 명이 일렬로 서서 앞사람이 뒷사람에게 귀엣말로 전한 것을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맞추는 것. 이 쉽고 당연한 게임을 왜 하나 싶었지만, 마지막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맨 앞사람이 전했던 말과 차이가 나서 이기기 어려웠다. 말을 똑같이 고대로 옮기는 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싶어 분통해하다가, 인간은 제멋대로 각색하는 게 기본 셋팅값이려니 하는 결론을 내렸다.(이 부분에선 전문가가 아니니 혹시 반론이 있거나 첨언 할 정보가 있으신 분들은 무섭지 않게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돈이 걸리고 명예가 걸리고 생계가 걸리고 기타 등등 무슨 이해관계라도 얽히면 ‘아’가 ‘어’가 되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겠지. 각자만의 진실을 만들고 그것을 진리처럼 믿으며 살면 그만이니까.
허탈하다. 진실이 이렇게 나약한 것이라면 왜 진실을 붙들고 살아야 할까. 아니면 내가 진실이 나약하다는 환상 속에, 착각 속에, 거짓 속에 살고 있는 걸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진실이 나약하다고 진실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거짓을 붙들고 살 수는 없기에 계속 진실을 찾고 진실을 규명할 것이다.
극과 극으로 분열돼 세상에 흘러나오는 진실들의 시대에 살면서 나는 역사를 배우길 잘했다고, 그때 교수님께서 <라쇼몽>을 보여주신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의 성질이야 어떻든, 적어도 무엇이 더 합당한 진실인지 더 진짜에 가까운 진실인지 노력할 수는 있으니까. 갈수록 혼탁해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비교해보고 분석해봐야 한다는 경각심은 가지고 있으니까.
“진실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을 뿐이다.
항상 진실을 찾아야 한다. 진실은 우리를 늘 기다리고 있다.”
- 파스칼 -
(이미지 by Michal Jarmoluk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