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백한 푸른 점
이토록 희미한 세계. 발 붙일 땅. 숱한 고민과 탄식. 주저하는 사랑과 생생한 고통.
가만히 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 작음을 작음으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해방된다.
기억 속을 떠다닐 수많은 먼지들. 생각들. 파편들.
빛이 쏘이는 면마다 환하게 타올랐다 사그라진다. 그 앞에서 얼마나 울고 웃었나.
내가 나이지 않기를 바라는 순간이 빛난다. 조금 더 주저하고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경솔한 과거와 바람과 희망이 멀리. 창백할 만큼 멀어진다.
시를 읽지 않는 날들을 보낸다. 시 없이는 어떠한 말도 리듬을 찾을 수 없는데.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그리워할 수 있나.
빽빽하게 가로막힌 산문을 쓰며 보며 팔며 지낸다. 무수한 빌딩숲 안에서 자꾸만 길을 잃는다.
더 넓은 곳으로, 더 먼 곳으로. 휑하고 고요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고 싶어 몸을 비튼다.
내가 나라고 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곳. 누가 옆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뿌연 곳으로.
실상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야채 돈까스를 포장해 올 아빠를 기다리며 동생이 집을 비우길 기대한다고 해도.
수리된 차를 기다리는 남자친구를 궁금해하며 아직 답이 없는 대표님의 카톡을 고대한다고 해도.
이 느슨하고도 빡빡한 연결이 툭, 하고 끊어지기를 내심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심.
내가 잡고 싶을 때 조용히 가서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언젠가 그럴 수 있도록 미리 발 맞추어 걷는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사람들과 딱 한 발 떨어져 걷는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지 않아서 생긴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이토록 혼자이지 않은 날들. 기필코 연결된 사람들. 비로소 혼자인 순간.
내가 연마하는 모든 행복도 결국 창백한 점이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