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6편
세 번째 물결: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고 최대한 즐기기
아주 오래된... 날 것의 친구들과 1박 2일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져 온 우정인 만큼 어떤 면에서는 깊고 또 어떤 면에서는 얕다. 서로가 통과해 온 굵직한 시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면면을 속속들이, 낱낱이 알고 있지는 못하다. 느슨하게 이어져 온 우정이라 그렇다. 우리가 만나는 일은 사건보다 사고에 가깝다. 중요한 얘기는 시작도 못 하고 실없이 웃다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보다는 과거를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가벼워질 계획이었다. 서로를 헐뜯고 갉아먹고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추켜올리는 여행이 될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날, 플래너에 단 하나의 계획만을 세웠다. ‘모든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 생각보다 여행에서 모든 순간을 즐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부산까지 편도로 세 시간 반. 모두에게 면허가 있지만 실제로 운전에 투입될 수 있는 애들은 둘(혹은 셋)이었다. 자동차 안에서 찌들어가는 동안 웃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엉덩이가 감각을 잃는 순간에도 농담과 유머를 일삼을 수 있을까.
다행인 것은 이 애들을 만나면 일단 시답잖은 걸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했다. 개그에 굶주린 애들이 넷이었다(하나는 구박하면서도 듣고 웃는 포지션). 웃기고 싶은 만큼 잔뜩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애들은 다섯이었다. 다섯 명이 완전체로 모이는 것은 거의 9개월 만인가.
내가 3개월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른 친구가 호주로 워홀을 떠났다. 내가 입국하는 바로 그 날에 걔가 출국을 한 것이다. 만약 내 비행기 시간이 조금 늦어졌거나, 걔의 비행기 시간이 조금 일렀다면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하이파이브를 했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고 덕분에 우리의 완전체 결성은 아주 먼 일로 미뤄져온 것이다.
6개월 간 호주 카페에서 호주식 영어와 라떼 아트를 통달한 친구가 돌아왔다. 2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휴가를 보내는 애 말고도 모두 일정이 빡빡하기 때문에, 걔가 호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시 6개월간 다같이 모일 일이 없다.
그러니 더더욱. 모든 순간을 최대한 즐겨보리라... 서로를 깎아내리는 가혹한 농담과 힐난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며 꺾이지 않을 것. 가볍게 말하는 만큼 가볍게 들을 것. 웃기지 않을 거면 말하지도 말자. 쓸데없는 말은 가차없이 무시 당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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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반 동안 운전을 하게 될 친구를 걱정스러운 맘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뒤쪽 가운데 자리에 앉았고, 내 옆에는 호주에서 9시간을 날아온 외국인 노동자와 당장 노트북을 펼쳐서 일을 하고 있는 방송작가가 있었다. 운전하는 애 옆에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간호사가 있다. 여행하는 내내 그 애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느꼈다. 덤으로 내 인생이 얼마나 안락한지에 대해서도.
부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서로의 안부를 얕게나마 알게 됐다. 호주에서의 삶이 실은 얼마나 심심한지, 사회라는 곳이 얼마나 얼레벌레 굴러가는지, 병원에서 마주하는 인간 군상이 어떤지. 어떻게들 연애하고 있는지. 역시 가장 재밌는 건 서로의 연애사다. 새롭게 만나는 애, 장거리 연애하는 애, 아주 오-래 만나는 애(들)... 카테고리가 다양하다.
온갖 말을 하다 보니 서로의 이름 뜻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친구의 이름이 ‘지킬 수’에 ‘인도할 빈’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지키며 안내한다라... 듣고 보니 안내견을 가리키는 말 아닌가.
- 그거 안내견 아니야?
- 왜 갑자기 사람을 개로 만들어.
이윽고 친구 동생의 이름에 '길 규'가 들어가는지 논쟁하기 시작했다.
- 길규봉규야 뭐야.
정말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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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한 번은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다. 가장 좋아하는 휴게소 음식이 뭐냐. 핫바 어묵바 알감자 소떡소떡 오징어. 온갖 메뉴가 다 나왔지만 우리가 고른 건 핫바와 어묵바와 알감자다. 따끈하게 달고 짠 것들을 먹는 동안 신체와 정신이 모두 환기되었다. (운전하는 애는 아니었겠지만...) 마지막 알감자 두 개가 남았다. 옆에 있는 애한테 먹으라고 줬더니,
- 음~ 모난 감자는 싫어! 큰 거 먹어야지~
- 그냥 큰 거 먹고 싶다고 해.
모든 게 간파 당한다.
숙소는 기가 막혔다. 광안대교가 보이고 감성적인 데다가 없는 게 없었다. 화장실은 무려 건식이었고, 펜트리도 있었으며 창문을 열면 바다가 훤히 보였다. 단 하나... 비 오는 날씨였다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사실 그마저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또 한 녀석이 실은 자기가 날씨 괴물이라고 자백하는 것 아닌가. 날씨 괴물...? 그게 뭔데... 애들이 웃기 시작했다. 얘는 날씨 괴물이 아니라 날씨 요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날씨 요정과 날씨 요괴. 그 사이에 자기가 날씨 괴물이라는 애가 있었다.
비 오는 부산은 생각보다 축축하고 슬펐다. 미치게 맛있는 돼지국밥을 먹고 빵을 먹은 후에 숙소에서 노닥거렸다. 하나는 여전히 노트북을 펼치고 일을 했다. 방송 캐스팅 목록을 짜야 한다고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데 원래 이 정도로 바쁘지는 않다고... 아, 너 프리였구나. 걔는 우리가 국밥을 먹고 술에 항정수육을 추가해서 완뚝을 하기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다.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모두가 걱정했으나 걔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이 일을 마치면 걔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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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낮잠을 뒤집어지게 자고, 이제는 메인 이벤트가 남았다. 회를 먹는 일이다. 애들은 술을 맛있게 먹기 위해, 나는 그저 회를 맛있게 먹고 싶어서. 다른 목적의 기대를 품었다. 살아있는 방어와 밀치를 고르고 바로 눈 앞에서 목을 따셨다. (어쩌면 그 때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 회를 먹는 동안 우리는 슬퍼졌다. 모두가 알고 한때 친했지만 이제는 멀어진 친구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걸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슬퍼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맛있는 회였는데 입에 들어가질 않았다. 애들은 술을 먹는 것도 멈추고 멍을 때렸다. 어쩌면 방어 잡는 걸 본 순간부터 잘못됐는지도 몰라. 우리는 10만원 어치 중 고작 3만원 정도를 먹었고, 남은 회를 포장하기로 했다. 회센타에 들어가기 전보다 비가 훨씬 많이 오고 있었다. 다시 힘을 내 보자. 네컷 사진을 찍고 망고 빙수와 와인을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음식과 연관되어있는 건지도 몰랐다.
숙소에서 ‘계집 놀이’를 하겠다고 과자와 견과류와 회를 모두 접시에 펼쳐두었다. 아주 예쁜 잔에 와인도 따르고 호주에서 사온 마카다미아를 신기해하며 까먹었다. 역시 온갖 웃긴 얘기들을 하다가 갑자기 한 명이 해보고 싶었던 게 있다며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머리카락에 반지를 연결하고 손바닥 위에서 조금씩 돌려가며 결혼할 나이를 맞춰보는, 아주 미신적인 일이었다.
전-혀 그런 것을 믿지는 않지만 소름 돋게도 세 명의 애들이 아주 확연한 결과를 얻었다. 그 반지와 머리카락에 따르면 두 명은 스물 여덟에, 다른 한 명은 서른 살에 결혼하게 될 것이었다. 스무 살부터 나이를 세며 반지를 돌리다가 어떤 나이에서는 반지가 크게 빙빙 도는 시스템이었다(같은 힘을 주는데도 반지가 멈추질 않는다). 한 명은 믿을 수 없다며 한 번 더 했는데, 똑같은 나이가 나와서 모두 소름이 돋았다. 조금 무서운 일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결혼식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나기만 하면 웃다가 끝나는 모임이라고 해도... 서로를 비난하고 얕잡아보는 게 묘미라고 해도...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가 결정적일 것을 알기에 서로룰 참아주고 견디는 게 아닐까. 잔뜩 웃다가도 언젠가는 정말 슬픈 순간이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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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오래된 관계의 특권. 갑자기 만나 무턱대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부끄러운 일, 천박한 말, 가차 없는 피드백. 우리에겐 그런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가장 슬프거나 두려운 순간을 꺼내 놓고 웃음으로 휘발시키다 보면 저절로 극복되는 것들이 있다. 묻고 듣고 먹고 웃고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어쩌면 부산에서 가장 부산답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회를 포장하는 길에 광안대교를 옆에서 바라보았지만 해변은 밟아 보지도 않았다. 해운대에서 복지리를 먹고 해리단길을 다녀왔지만 해운대 바다를 보지는 못했다. 해변열차를 타려다가 포기하고 숙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기. 중심에서 비껴나 변두리에 위치하기. 가장 우리다운 여행이다.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른 애가 운전을 했다. 진짜 차의 주인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렌즈를 못 껴서 뵈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입은 쉬지 말라는 뜻이다.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고 말하며 듣는 일에는 내가 제격이었다. 해리단길에서 사온 단호박크림치즈베이글을 나눠먹었다. 운전하는 애가 한 입을 크게 뜯었는데 가슴팍에 단호박이 턱- 하고 떨어진 게 아닌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먹어 라고 말했다. 단숨에 강아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 아, 조수석이 먹으라면 먹고 뱉으라면 뱉는 자리였어?
조수석의 개념을 이제 이해했다.
우리는 서로의 입에서 떨어진 것들을 일단 비난하고 의문하며 결국은 닦아주고 치워주고 웃어주는 자리에 있다. 날씨 요괴인지 날씨 괴물인지 헷갈리는 자리에. 우리 관계의 정의는 입에서 떨어진 단호박같다. 많은 게 우수수 떨어지고 뭉개지고 닦아주고 호탕하게 웃는 여행의 시간이었다. 가장 많은 개그 욕심을 부리는 동시에 후하게 웃어주는 시간이었다. 이틀간 웃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다.
*
갑작스러운 눈에 대비하며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마음, 새로운 계절을 모두 응원합니다!
발송일 2023.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