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8편
다섯 번째 물결: 말하기 전에 2번 생각하기
정말이지 가장 어려운 챌린지였습니다. 3일에 걸쳐 진행했는데요. 의식적으로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성공률이 50%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그만큼 어려웠으나 잘 해내고 싶은 일이었는데요. 독자의 요청 덕분에 평소 제가 얼마나 신속하고 경솔하게 말하며 사는지를 절감했습니다.
워케이션
을 다녀왔다. 사실 그리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읽고 쓰고... 지원이 일하는 모습을 많이 구경했다. 그는 정말이지 바쁜 백수였다. 이토록 백수같지 않은 백수가 있을까. 그가 일하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말했다. 말하고 또 먹었다. 무지막지한 강릉의 겨울바람에 추워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입을 열 때마다 이가 시려왔다.
강릉에서의 둘째날에 브런치 공모 결과가 나왔다. 역시 예상한대로 아침 일찍 공개되었고, 내 이름은 없었다. 그건 어느 정도만 예상한 일이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초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에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점심으로 찐한 교동짬뽕을 먹는 순간부터는 그 사실을 조금 잊었다. 차라리 다음 스텝을 힘차게 딛을 수 있을 것 같아 몸이 가벼워졌다.
지원에게 이 사실을 바로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두 번 이상은 생각한 것 같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는 저 애에게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결과를 기다릴 나의 지인들에게 언제쯤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그닥 신나는 소식은 아니지만 듣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슬퍼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가볍게 달래고 넘어가주었다. 나의 실패는 딱 나 하나만 딛고 설 수 있는 실패다.
지금 내 브런치스토리 소개 메시지는 “해, 말아 에서 해를 맡고 있는 사람”이다. 이 원칙은 말에도 행동에도 위로에도 질문에도 대답에도 해당된다. 그래서 새로운 소식, 재미난 이야기, 우스운 사건, 슬픈 사연 등이 생기면 친구들에게 낱낱이 고한다. 만백성에게 고하노니, 보통 5개의 카톡방에 복붙을 하는 것 같다. 똑같이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모두 다른 답변이 돌아온다. 시간도 천차만별이다. 나는 그 이야기에 파묻혀 내 얘기가 제일 재밌는 사람이 된다.
1번 정도 고민한 후에 말한 일이 또 있다. 예전부터 눈 여겨 보던 출판사에 디엠을 보낸 것이다. 수원에 있는 작은 회사인데 8월에 파트타이머 편집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봤다. 당연히 마감됐을 걸 알지만, 따로 마감 공고가 올라오지는 않았길래 메시지를 보낸다.
- 혹시 채용 마감 하셨나요?
- 채용은 모두 마쳤는데 지금 추가 채용 계획은 있습니다.
잭팟... 브런치 공모에 떨어진 걸 알게된 지 1시간 만의 일이다. 바로 이력서를 준비해서 보내기로 한다.
사실 2번 고민했더라도 같은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 전에 시간을 벌려두는 건 다음 스텝에 도움이 된다. 어긋날지도 모를 메시지를 바로잡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후회할 말들을 걸러낼 수 있다.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묻게 되는 말도 꽤 많다. 이번에 지원과 있을 때도 평소처럼 아무 얘기나 막 던지지는 않았다. 웃기고 슬픈 일들을 소화할 겨를이 생긴 것이다. 내게서 걸러지지 않은 말들을 무작정 뱉고 나면 분명 배로 무겁게 돌아올 테니까. 돌아오는 말을 감당할 힘이 지금은 없다.
이를 테면 여행 첫째날 밤,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소중한 사람이 떠나고 내 인생이 망한 줄도 모른 채 그저 두려워하며 삶을 지속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런 불안이 드는 게 어떠한 사람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머릿속의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그 사람들만 있어도 내 인생은 잘 굴러갈거야... 확신한다.
마음을 달랜 후에 루미큐브를 하다가 다시 불안해진다. 만약 그 사람들도 없으면?
생각해보니 나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줄 사람은 다름 아닌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님만 있으면 제 인생은 망하지 않을 거예요. 잠시 헷갈린 거 용서해주세요. 언제나 결론은 용서를 빌기.
미리미리 겸손해할 것. 교만 떨지 않을 것. 내 인생이 내 손에 있다는 착각을 버릴 것.
만약 이 마음을 지원에게 툭 하고 털어놓았다면 그 무게는 배가 되어 내게 돌아왔을 것이다. 귀여운 영상을 편집하고 있던 지원은 침대에서 루미큐브를 하던 나를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볼지 모른다. ‘갑자기 왱~~??ㅠㅠ’ 하며 눈을 반짝일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실망하고 싶지 않고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아서 비밀에 부치기로 한다. 물론 현재는 소화 완료... 발설되지 않은 말들이 미래의 나를 지켜줄 것을 안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을 때의 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나를 배려해야 한다. 말은 언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주워담는 건 언제고 불가능하다.
*
나영이
를 만나 마라탕을 먹기로 한다. 강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영과 만났다. 점심에 브런치를 먹은 탓에 속이 아주 느끼했기 때문이다. 반면 속이 안 좋아서 어제 하루 동안 밥을 굶고, 점심으로 순두부계란탕을 먹은 나영도 마라탕을 원했다. 나는 속을 내리고 걔는 속을 채울 계획이었다. 오창에 사는 절친한 친구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애라 만나면 무조건 반갑다.
반가우면 일단 말이 많아진다. 서로의 새로운 근황을 쏟아내느라 무슨 말을 가리고 삼켜야 할지 애매했다.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얘를 향한 나의 관심과 애정이 전해지기를 바랐을 뿐인데. 말도 빠르고 성격 급하고 대충 듣는 나와는 달리, 대부분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말하는 애라서 의식적으로 말을 거르려고 노력했다. 정제된 말이 우리를 덜 곤란하게 할 테니까. 그래서 평소보다는 말을 덜한 것도 같다.
궁금한 말, 웃긴 일, 묻고 싶은 말을 한 번씩은 삼켰다. 두 번 삼키는 동안에는 국물도 열의도 짜게 식을 테니 한 번씩만. 말을 삼키고 뱉는 동안 근래 최고의 마라탕을 먹었다. 무채색 옷을 입은 중고딩들 사이에서 매우 뜨겁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허버허버 먹었다. 나영은 마라탕을 다 먹은 순간부터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다시 속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눈길을 걷는 할머니의 걸음으로 집까지 엉금엉금 걸어가게 되었다. 걔를 집앞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짧고 굵은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말에 걸리는 것 없이 편하게 넘어가기를 바라며.
*
노팅힐
을 보았다. 3일 만에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는 영화를 보는 아늑함. 담요를 두르고 소파에 잔뜩 늘어져있는 사이에 아빠가 들어온다. 무슨 영상이든 거실에서 티비로 보는 편이라 아빠나 동생이 지나갈 때마다 한 마디씩 얹는 게 피곤하지만, 소파에 누우면 모든 게 귀찮고 아늑해서 그냥 참는다.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하는 아빠가 노팅힐은 세 번, 프리티 우먼은 두 번을 보았다는 말을 얹는다. 내 생각보다 더 팬이군… 생각만 하고 대답은 으응, 정도로 마무리한다. 혹은 마지막 말을 따라한다. 아, 프리티 우먼?
노팅힐 초반부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기의 허름한 책방에 유명한 여배우가 다녀갔다는 말을 하려다 만다. 함구한다는 것은 간직한다는 것이다. 가장 진귀한 기억을 한 켠에 모셔두고 생각으로만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나누지 않음으로써 조각나고 납작해지지 않도록 보존하는 일이다. 혼자만의 생각은 마음껏 조각나도 되지만 말이 조각나면 누군가 긁힐지도 모른다.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아빠가 주머니에서 구운 계란 두 개를 꺼내 식탁에 올려둔다. 스크린 골프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골프를 치기 전에 사람들과 먹었다는 싸이버거, 각종 약이 들어있는 종이 봉투도 올려둔다. 두 시간 전에 내가 강릉에서 사온 카푸치노 빵과 마늘 바게트를 올려놓은 바로 그 자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픈 곳은 없냐고 묻는다.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냐고 또 묻는다. 아빠는 늘 성실하게 묻는다.
그와의 대화에서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일정한 톤의 대답을 건넨다. 관성으로 하는 것이다. 으응, 혹은 맞아, 혹은 밥 먹었어? 무성의와 관성과 애정을 오가는 말들이다. 다음주에 아빠 공항 갈 때 택시 불러줘야 해, 오늘을 포함해서 그에게 세 번 정도 들은 말이다. 이 정도면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반복해서 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캘린더에 적기로 한다. 아빠가 떠나는 그 오후에 아무도 집에 없으면 안 되니까... 내가 말을 거르고 멈추더라도 그가 거듭하는 말만은 꼭 잊지 않기로 한다.
*
말, 말, 말. 말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생각합니다. 살리는 말, 세우는 말, 위로하는 말. 죽이는 말, 깎아내리는 말, 저주하는 말. 살리지는 못해도 죽이지만은 않았으면 했는데요. 쓸데없이 무성하거나 별수없이 무성의한 말로 나의 관점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뚫린 입을 앙 다무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챌린지는 혼자만의 싸움으로 지속할 듯 싶습니다.
2023.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