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9편
여섯 번째 물결: 일을 미루지 않기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착착 처리해나가는 성취감 가득한 모습을 늘 상상합니다. 그런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고 자주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이 늘 있는 인간으로서 가장 분주했던 어제의 하루를 담아보았습니다.
일을 곧잘 미루는 편이다. 매일의 플랜에서 한두 개의 목록 쯤은 쉽게 다음 날로 유보된다. 그러나 모든 계획을 착실하게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타협과 외면,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반성 혹은 자기혐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 사람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할 일을 대부분 마친 날에도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10가지의 목록 중에 8개를 수행해도, 이루지 못한 2개의 목록이 더 마음에 걸린다. 그 2개의 목록이 ‘읽기’거나 ‘쓰기’일 때는 더더욱...
플래너 목록은 크게 4가지 카테고리로 나뉜다. 첫째는 <삼>이고 그곳엔 알바와 약속과 대외적인 활동들이 포함된다. 면접이라든지, 회식이라든지... 하는 일들이다. 그야말로 삶을 이루는 외피다. 매일 지속되는 일보다는 잊어서는 안 될 이벤트에 가깝다.
둘째는 <교회>다. 그곳엔 고정적으로 '말씀'과 '기도'가 있다. 얼마나 중요한지 눈에 딱 보이게. 말씀은 성경 일독을 가리키고, 기도는 자기 전에 하는 기도를 나타낸다. 말씀은 주로 글을 쓰거나 일을 하기 전에 읽기 때문에 일이 없는 날에는 말씀도 자연스럽게 생략된다. 부지런히 고쳐야 할 습관이다.
셋째는 <취미 겸 활동>인데 그곳엔 '읽기'와 '에세이'와 '소설'이 있다. 올해 가장 주된 작업들을 담았다. 소설은 한때 노력했으나 현재는 건드릴 수 없는 무엇이고... 에세이와 읽기는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채우는 일과이다. 읽거나 쓰는 동안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 않은 동안에는 자주 이게 맞나... 생각하는 걸 보면 쓰기가 내 일이 맞는 것 같다.
마지막은 <누벨바그>, 이 프로젝트다. 매번 실천하게 될 물결들이 이곳에 정리된다. 이번에는 '일을 미루지 않기'... 가장 단순한 본질에 가까운 미션이다. 성취감이 주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친 날에는 개운하게 소진된 숨을 내쉬며 일찍 잠든다. 그렇지 못한 날에는 하루를 질기게 연장하며 유튜브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고작 이렇게 하루를 끝낼 수는 없다는 엉뚱한 보상심리 때문이다.
지난번 레터에서 언급했던 작은 출판사와 두 번째 연락이 닿았다. 이력서를 검토하고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감감무소식이라 답답해하던 차였다. 금요일 오후쯤 대표님께 전화가 왔다. 우리가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이런이런 방향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무엇보다 회사용 맥북을 쓰라는 말에 가장 기뻤다.) 그래서 그냥 하자는 줄 알았는데 역시 면접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 면접 일시는 다음주 수요일로 정했고, 준비물은 유유 출판사에서 만든 <중쇄 찍는 법> 읽고 오기.
역시 출판사다운 요청이라 너무 좋았다. 지난번 첫 면접의 기억이 꽤 처참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파트타임 직무라고 해도 꼭 제대로 준비해가고 싶었다. 그래서 세운 목표는 1. 읽고 오라는 책 읽기 2. 해당 출판사에서 만든 책 두 권 읽기 3. 마케팅 전략 외부 강의 듣기다. 그러면서 레터도 쓰고 교회 행사도 준비하고 예배 준비도 하고 오빠도 만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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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2월 23일이 당도했다. 우선 첫번째 일정은 10시에 교회 청소하러 가기. 성전을 청소하는 일은 언제나 기껍고 즐거워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매번 즐겁지만은 않다. 교회를 불나게 청소하다보면 내 집도 이렇게 안 치우는데, 하는 헐거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을 쓸고 닦다 보면 금방 끝이 보인다. 3개월에 한 번 차례가 돌아오는 일인데도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는 데 놀란다.
청소가 끝나고 나면 보통 함께 점심을 먹는다. 그러나 오늘은 제각기 약속들이 있었기에 갠플. 다음 일정은 3시 리허설이다. 오매불망 고대하던 성탄절 행사를 위한 전체 리허설이다. 3시가 되기 전까지 무조건 카페에 가서 면접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저녁 11시까지 일정이 차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타이밍을 노려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고, 거기서 '중쇄 찍는 법'을 절반 정도 읽었다. 출판사 사장님이 이 책을 읽고 오라고 했다면 분명 깨어 계신 분일 테다... 책을 만드는 뚝심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중쇄란 준비한 책의 초판을 모두 팔고 새롭게 책을 찍어내는 일을 말한다. 중쇄를 찍기 위해서는 20%의 전복성과 70%의 충분성, 그리고 10%의 미래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 다들 크게 관심이 없을 듯하지만...)
아무튼 카페에서 할 일을 마치고 3시 리허설에 참여한다. 청년부는 올해 연극을 준비했다. 제목은 <크리스마스 살해 사건>이고 나는 이벤트 사원 역할을 맡았다. 삶에 찌든 직장인들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의미를 잊고 얼레벌레 살아가는 이야기다. 다행히 영화를 전공한 친구가 있어서 아주 날카로운 디렉팅을 받았다. 그 애가 자주 한 말은 ‘다시 할게요~’ 혹은 ‘거기서 그거 왜 하는 거예요?’ 등등... 아무쪼록 무섭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안내자였다.
리허설을 마치고 추가 연습에 돌입했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일이 공연 날이므로 오늘이 합을 맞춰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등장하는 동선, 방향, 대사, 호흡 같은 것들을 맞추는 동안 디테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느꼈다. 잘 맞춘 한 장면이 대충 맞춘 열 장면보다 낫구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연습을 뒤로 한 채 조별 회식을 하러 나왔다 (사람들은 아직 연습중이었지만). 6시쯤 교회 앞 고깃집을 향했다. 하루에 일정이 이만큼 몰린 것도 신기할 일이었지만 아주 가끔 이런 일도 있다. 벌써 연말임을 어색해하며 신기해하며 아쉬워하며 고기를 먹었다. 일 년간 부대껴온 사람들과 헤어짐을 앞두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간이 무참히도 흘러가는구나...
밥과 카페로 이어지는 회식을 마친 뒤 8시쯤 다시 교회로 컴백했다. 찬양팀 연습을 위해서다.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찬양팀 연습은 고정적인 일과다. 모이면 1시간 정도 비교적 가볍게 수다를 떤 뒤, 9시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간다. 그렇게 연습이 끝나면 11시쯤이다. 아주 빠르게 끝나면 10시 반, 보통은 11시인데 오늘은 12시에 끝이 났다. 오래 연습하는 만큼 우리의 외관은 초췌하고 남루해지지만 정신만큼은 되살아난다. 집에 돌아오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만큼만 피곤하다. 아무리 바빠도 피곤치 않게 하시는 은혜를 매주 경험한다.
무려 14시간 동안 교회(혹은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주 조금 유튜브를 보았다. 그마저도 눈이 감겨서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잠에 든다. 아무런 일도 미루지 않은 하루였다. 미룰 수 없이 꽉꽉 채워진 하루였다. 아마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어두지 않았다면 자기 전에 유튜브 대신 책을 읽어야 했을 것이다. 정말 곤란한 때 일이 밀리지 않도록 미루지 않는 것이다.
*
마침내 오늘로 크리스마스 이브가 당도했다. 교회 행사가 전부 끝나고 사람들과 밥까지 먹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8시다. 잠시 노닥거리다가 불현듯 레터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신이 없어서 플래너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레터를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이다.) 이번주가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피곤한 몸뚱이를 일으킨다.
가장 좋아하는 유튜버인 해쭈의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다. 고민도 없이 그 영상을 틀었다가 5분도 보지 못하고 꺼버린다. 아직 일을 미루지 않는 하루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레터를 보내고 난 뒤에는 (못 다한 유튜브를 보고) 면접 볼 출판사의 책을 읽고, 마케팅 강의를 몇 개 들을 것 같다. 눈이 조금 감기지만... 일을 미루지 않음으로써 후회할 구실을 만들지 않는다. 복구하지 못할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
지난 물결처럼 말도, 시간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지켜내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성취감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성취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성취감 역시 인생의 한 부분일 뿐임을 기억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발송일 2023. 12. 24.